제 14장. 투자 유치. -02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흘러가는 상황이 그에게는 전부 이득이어서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반호진은 녹림대군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천하사패가 중원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며 전쟁을 일으킬 당시 가장 앞장서서 날뛰었던 이가 바로 녹림대군과 녹림십팔채였었다.
속된 말로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 중원인들을 끔찍하게 괴롭힌 이들이 산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천하사패가 노린 점이기도 했다.
힘을 가졌지만 결국 천하사패는 외세의 무리들이었고, 오랑캐였다.
그래서 천하사패는 산적들과 수적들, 거기에 하오문을 이용해서 중원을 괴롭히고 지배했었다.
“이건 뭐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 일거양득인데.”
어차피 치워 버려야 할 세력이 녹림십팔채였다.
물론 쓸어버린다고 해서 산적들이 박멸할 리는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나라에서 산적들과 수적들을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정리한다면 전생 때보다 피해를 확연히 줄이는 게 가능했다.
“거기에 금가장의 조력도 얻을 수 있고.”
서가장에서 헤어진 후 반호진은 단순히 북해에만 다녀오지 않았다.
나름 금가장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 알아봤다.
정확하게는 후계 다툼의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장남인 일 공자가 조금 앞서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의외로 그 격차는 크지 않았다.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뜻이지.”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격차가 크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랬어도 반호진은 결과를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금호연이 그에 대해 알아봤듯이 반호진 역시 금호연에 대해 조사했고, 결론은 나왔다.
“이 정도면 애를 적당히 태운 듯하니, 움직여 볼까.”
금호연에게는 절박한 상황이지만 반호진에게는 아니었다.
세간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무인은 스스로의 무력으로 증명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녹림대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끄으응!”
선우세가에서 가장 좋은 별채 중 한 곳을 배정받았음에도 금호연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서성였다.
누가 봐도 정신 사나운 광경이었으나 수행원들 중 유일하게 실내에 있는 걸 허락받은 호위대주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잘될까? 잘되겠지? 거절하면 진짜 끝인데. 이제는 시간도 없는데.”
땅이 꺼질 것처럼 금호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말을 꺼냈을 때 거절했다면 이렇게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둔 차선책을 위해 바삐 이동 중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반호진이 생각해 보겠다고 했기에 금호연으로서는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능할까요?”
“뭐가?”
“녹림대군은 철왕보다 강합니다.”
“세간의 평가는 그렇지.”
“그리고 녹림대군은 혼자가 아닙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서 있던 호위대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낭왕 중 한 명인 철왕 사무궁은 고수이자 강자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반면에 녹림대군은 녹림십팔채의 총표파자였다.
그의 한마디 말에 수만 명이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괜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녹림십팔채를 놔두는 게 아니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 진짜 고수에게 숫자는 무의미해. 그건 대주도 알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녹림십팔채에는 참벽도도 있고, 고수들이 즐비합니다.”
“맞아. 근데 철왕을 어린아이 다루듯 다룰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될까? 난 녹림대군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총표파자가 철왕보다 강할 거라는 건 나도 인정해. 근데 차이가 과연 클까?”
“으음!”
호위대주가 입을 다물었다.
우위는 가릴 수 있으나 격차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철왕 사무궁은 만난 적 있어도 녹림대군은 말만 들었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개 후기지수가 철왕을 가볍게 쓰러뜨릴 줄 누가 알았겠어?”
“……확실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으니까요.”
그날의 충격은 아직은 선명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더불어 나나 대주의 목숨, 반 대협이 구해 준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의심이라니. 염치가 너무 없는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호위대주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반호진은 칼자루만 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숨 빚도 가지고 있었다.
“근데 딱히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신단 말이지.”
“서 공자의 일 때 말고는 따로 분타를 찾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개의 무인들은 나와 안면을 트면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 진짜 달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무인들과는 전혀 다른 게 반호진이었다.
그래서 금호연은 일 공자와 달리 반호진을 선택했다.
아마 지금쯤 일 공자는 그를 비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패는 까 봐야 아는 법이었다.
똑똑똑.
“어, 이 공자님! 반 대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모셔!”
금호연과 호위대주가 과거를 회상할 때 문 너머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반호진이 직접 찾아왔다는 보고에 금호연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각에 찾아온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니까요. 그리고 새벽에 찾아오셨어도 저는 반 대협을 맞이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금호연이 자리를 권하자 호위대주가 눈치껏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반호진이 만류했다.
“있어도 괜찮습니다. 이 공자께서 가장 믿으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는 걸 알기에 금호연이 빙긋 웃으며 호위대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호위대주가 다시 금호연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대답을 드리기에 앞서,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다 말하겠습니다.”
금호연이 상체를 가까이 대며 대답했다.
무엇이든지 다 말해 줄 기세로 말이다.
“녹림대군과 참벽도를 빼면, 나머지는 이 공자께서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
금호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현재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녹림대군이었다.
참벽도가 금가장을 상대로 이렇게 뻗댈 수 있는 건 뒷배로 녹림대군을 두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일 공자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녹림대군 때문이었다.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일 공자는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무림십왕 중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속해 있지 않은 두 명과 낭왕들에게 은밀히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일 공자 측에서도 금 공자님이 절 찾아온 걸 알고 있겠군요.”
“그럴 겁니다.”
금호연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다 이긴 것처럼 행세하는 일 공자이지만 금호연은 알고 있었다.
일 공자가 자신의 동향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말이다.
삼 공자가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단둘만 남은 만큼 신경을 안 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때문에 비웃음을 받고 계시겠는데요?”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상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결국 결과입니다. 성과를 냈느냐, 내지 못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일 공자가 누굴 데려올 것 같습니까?”
“천하십대고수 중에서는 힘들 겁니다. 장주님이라면 모를까 일 공자 선에서 천하십대고수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안면은 있겠으나 거래는 다른 문제니까요. 장주님도 확실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는데 일 공자가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의 장로급을 데려올 것 같습니다. 두 명 남은 낭왕도 후보이고요.”
천하십대고수는 말 그대로 현재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을 뜻했다.
그런 이들이 금가장주도 아니고 확실한 후계자도 아닌 일 공자의 부탁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없으나 가능성이 희박한 건 사실이었다.
막말로 금호연이 찾아간다고 해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게 천하십대고수였다.
“낭왕이라.”
“한 명으로는 버겁다고 생각할 테니 두 사람을 동시에 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많이 찔러 보는군요.”
“그게 악수라는 걸 모를 만큼 조급해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어떻게든 저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을 테니까요.”
금호연이 씨익 웃었다.
방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초조한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에게는 보였다.
애써 여유로운 척을 하는 게 말이다.
“그건 금 공자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와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영광이네요. 저에게 모든 걸 걸어 주셔서.”
“저는 반 대협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호연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그를 뒤에서 어리석다고 욕했다.
천하십대고수는커녕 그 아래급도 안 되는 반호진을 찾아간다고 했을 때 말이다.
더불어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후계 다툼을 포기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금호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직 직접 본 것만 믿었을 뿐이었다.
“금 공자님은 제가 녹림대군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유가 궁금하군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을 때 반응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녹림대군이라는 말이 나올 때 모두가 놀랐는데 반 대협께서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참벽도는 몰라도 녹림대군은 아시는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리고 방금 전에 물으셨지요. 녹림대군을 제외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그건 제 역량을 물어보신 것이지 않습니까. 녹림대군과 참벽도를 빼면 나머지를 상대할 수 있겠냐고.”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의 저의를 금호연이 정확하게 읽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확신이 생겼다.
이 정도 통찰력이라면 금가장의 주인이 될 수 있겠다는.
물론 일 공자의 능력도 뛰어날 것이었다.
단순히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위치를 누릴 수는 없을 테니까.
금호연을 상대로라면 더더욱.
“가시죠.”
“네?”
“녹림대군, 제가 잡아 드리죠.”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껏 표정을 잘 유지해 왔던 금호연이 마지막에 무너졌다.
그러나 정작 금호연은 그 사실을 몰랐다.
너무 기뻐서 표정을 관리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서두르죠. 일 공자보다 먼저 표물을 되찾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도록요!”
“그럼 저도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반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바쁠 것이기에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손을 붙잡은 금호연이 도무지 놓아줄 기미를 안 보여서였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예, 그럼.”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는 금호연을 놔두고서 반호진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가는 방향이 그의 처소는 아니었다.
“저는 무조건 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네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당연히 다 이해했죠. 어제 금 공자님이 형님께 투자 제안을 한 자리에 저도 있었는걸요.”
“근데도 가겠다고?”
“물론이죠.”
서조운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이 말했다.
아니,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표정이 더 정확할 듯했다.
그 정도로 서조운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참벽도와 태호채는 일부분일 뿐이야. 진짜는 총표파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