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장. 투자 유치. -01
웃는 얼굴이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그 급격한 표정 변화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서조운과 선우방도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이내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들어도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반호진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은 꺼내기가 쉽지 않기에 먼저 운을 띄워 준 것이었다.
“그럼 말씀하시죠.”
금호연이 괜찮다고 하니 반호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굳이 근황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건 달리 말하면 급한 일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쓸데없이 신변잡기식의 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
“우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알아야 이해가 편하실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혹시 참벽도(斬霹刀)를 아십니까?”
“참벽도요?”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호 같은데 그로서는 처음 들어서였다.
그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녹림십팔채 중 태호채의 채주 아닙니까? 총표파자의 의동생이기도 한.”
“맞습니다. 다행히 알고 계시는군요. 그자가 얼마 전 금가표국의 표물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런데 이자가 본 장의 상황을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와 일 공자 중에 더 큰 금액을 제시하는 곳에 표물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군요.”
조용히 듣던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둑이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에 물건을 돌려주겠다는 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우방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여기까지만으로도 금호연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웃기는 작자네요. 강짜도 이런 강짜가 없는.”
“문제는 그게 통한다는 거지. 금가표국, 정확하게는 금가장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표물은 반드시 되찾아야 해. 근데 문제는 태호채가 녹림십팔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산채라는 점과, 총표파자와 의형제 사이라는 거지. 자칫 잘못하면 총표파자와 녹림십팔채 전체와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정확합니다.”
어깨를 으쓱이는 서조운과 달리 선우방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건 단순히 산적과 표국의 관계가 아니었다.
금가장과 녹림십팔채의 힘겨루기였다.
거기에 참벽도는 영악하게도 현재 금가장의 상황을 이용했다.
“어떻게 보면 경매군요.”
“강매 같은 경매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다만 문제는 저나 일 공자로서는 이걸 피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까?”
“조금 다릅니다. 저는 반 대협께서 저에게 투자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뚱맞은 말에 선우방은 물론이고 서조운의 눈도 살짝 커졌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라서였다.
“투자라.”
“지금까지 반 대협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어떤 목적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반 대협께서 그리시는 그림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게 소림사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요.”
후릅.
확신이 서린 금호연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은 차를 들이켰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나 때로는 침묵이 대답을 대신하기도 했다.
“저에게 투자를 해 주신다면 저 역시 반 대협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전력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금가장의 이 공자가 아닌, 금가장주가 된다면 반 대협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런데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시지요.”
“이번 일을 해결하면, 자신 있으십니까?”
“저 혼자였다면 오 할이 채 되지 않았을 겁니다. 장남이라는 자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큰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반 대협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팔 할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무거워진 주제에 선우방은 물론이고 서조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선뜻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였다.
동시에 둘 다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팔 할이라. 냉정하시군요.”
“과신하는 것보다는 냉정한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인이니까요. 어떤 거래든 절대적인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변수는 늘 있기 마련이니까요.”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에게 투자하신다면 절대 후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금호연이 당당하게 말했다.
둘째지만 그는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경쟁자들을 쓰러뜨리고 올라왔다.
처음부터 금가장주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일 공자와 달리 그는 두 번째 자리까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렇게 쟁취해서 올라온 곳이 두 번째로 가까운 자리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대답해 드리기는 힘들고, 고민을 좀 해 보겠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대신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머무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는 듯하자 선우방이 눈치껏 입을 열었다.
금호연이 반호진과 대화부터 하고 싶어 했기에 아직 짐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선우방은 그 구실로 금호연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그 뒤를 서조운이 조용히 뒤따랐다.
***
개인 수련을 마치고 선우방은 자신의 처소로 들어왔다.
하지만 씻고 나와서도 반호진과 금호연의 대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하나의 의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참벽도는 그럴 수 있어. 녹림십팔채의 숫자가 상당하다고 하나 금가장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감당이 가능해. 금가표국도 있고, 낭인들을 끌어모으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러나 총표파자는 감당할 수 없어.”
선우방이 미간을 좁혔다.
총표파자는 단순히 산적들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무림을 호령하는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이며 악명이 자자한 그가 지금껏 살아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누구도 쉽게 죽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였다.
천하십대고수급은 아니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확실하게 총표파자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무인이 드물었다.
“낭왕들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녹림대군(綠林大君)인데.”
스스로를 산왕(山王)이라 칭하지만 그를 진짜 왕으로 생각하는 무인은 없었다.
무림십왕에 비비기에는 녹림대군의 무위가 확실히 부족해서였다.
그러나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경지는 절대 아니었다.
한데 그가 나설지도 모르는 일에 금호연이 반호진에게 도움을 청하자 선우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 공자는 호진이가 녹림대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여러 개의 패 중 하나인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는데.”
선우방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서 중얼거렸다.
투자 운운하는 걸 보면 절대 반호진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봐도 반호진에게 목을 매는 모습이었기에 선우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똑똑똑.
“나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 들어오세요.”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을 때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선우방이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다가 불이 켜진 걸 보고 들어왔다.”
“이제 막 수련을 끝낸 참입니다.”
“요즘 들어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들의 처소를 찾은 선우청이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두 눈에서 언뜻 장난기가 보였다.
“적어도 두 배는 더 노력을 해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그런 점에서 호진이에게 부러운 것도 조금 있습니다.”
“허허허.”
농담에 진심을 담아 말하는 아들의 모습에 선우청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선우방은 몰랐다.
이 생각을 선우청도 한때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외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문을 지금보다 더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어디까지 생각하느냐?”
“오대세가에 들고 싶습니다.”
“으음!”
선우청의 동공이 커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은 목표를 잡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초를 치지는 않았다.
목표나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었다.
“힘들겠지만 해 보고 싶습니다. 안 된다고 지레 포기하는 것보다는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사내대장부가 그 정도 야망은 있어야지.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주마.”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대단하더구나. 신룡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어. 그저 널 보러 방문한 것뿐인데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완전히 달라졌어.”
선우청이 은근슬쩍 선우방의 눈치를 살폈다.
친구이기에 어쩌면 더 민감할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선우방은 그의 말에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대단하죠. 제 친구라고 하기에는 과분할 정도로요. 사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어요. 성격과 달리 소탈하기도 하고.”
“외모만 보면 되게 까칠할 것 같은데 은근히 털털하단 말이지.”
“근데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요. 진짜 칼같이.”
“남자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줏대 없는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낫다.”
선우청이 단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유부단한 것보다는 차라리 냉정한 게 나아서였다.
그런 점에서 반호진은 조금 신기한 인물이었다.
스무 살이지만 스무 살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저도 그래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알면 됐다. 그보다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서 좋긴 한데 조금 걱정도 되는구나. 죄다 반 소협을 만나고 싶어 하니.”
“남경 인근의 후기지수들은 거의 다 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거기에 화룡점정은 오늘이었지. 금가장의 이 공자와도 연이 있을 줄이야.”
“난감하시겠지만 결정은 호진이가 하는 겁니다.”
선우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친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작정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이들도 이쪽의 사정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하니 묻기는 하되 결정은 반호진이 하도록 하는 게 맞았다.
“설마 그걸 모를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지킬 걸 지켜야 관계가 오래가는 법이다. 우리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반 소협에게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당연한 것을. 네 친구이지 않더냐. 어쩌면 평생 같이 갈지도 모르는. 친구는 소중한 것이다. 이해관계를 따지는 친구가 아니라 진짜 벗은 말이야.”
“저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진이가 먼저 다가와 준 게요.”
선우방은 소림사에서 있었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해맑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찾아온 반호진을.
***
툭. 툭. 툭.
방 안에서 홀로 있던 반호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서였다.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이야.”
금가장과의 끈을 이어 나가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철왕 사무궁을 만난 건 우연이었으나 반호진은 그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었다.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금가장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면 백도무림에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상황이 상당히 재미있게 흘러갔다.
“이게 이렇게 풀릴 줄이야. 이건 안 먹을 수가 없는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