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02
그 능숙한 손놀림에 사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상대가 결코 초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이렇게 붙잡을 만한 곳이 없어서였다.
“눈알 굴릴 거 없다. 네가 할 일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뿐이니까.”
“읍읍!”
처음으로 열린 반호진의 말에 사내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혹시나 아혈이 풀렸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반호진이 제 할 말만 한 것이었다.
“기다려. 뭐가 그리 급해? 밤은 길고 시간은 많은데.”
말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반호진의 목소리만 음산하게 허공을 갈랐다.
유일한 빛이라고는 달빛뿐이었는데, 하필이면 초승달이 떠서 그런지 반호진의 모습이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복면에다 두건에, 거기다 검은색 야행복으로 온몸을 칭칭 감았기에 사내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싸늘한 두 눈뿐이었다.
“으으…….”
고저 없는 무심한 음성과 함께 반호진이 품속을 뒤지자 사내가 몸을 떨었다.
무슨 의도로 자신의 품속을 뒤지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역시 개털인가.”
하지만 가지고 있는 건 전낭뿐이었다.
움집에서 생활하는 것과 달리 상당한 금액이 전낭에 들어 있었지만 이건 반호진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사내가 알 수 있도록 손가락을 사용해 아혈을 풀어 주었다.
“누, 누구십니까?”
“말했을 텐데. 질문은 내가 한다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대답뿐이야. 아, 물론 안 해도 돼. 대신 몸이 고통스럽겠지. 그나저나 고문에는 익숙하나?”
“으허업!”
건성으로 푹푹 찌르는데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냥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뿐인데 몸이 관통되는 것 같은 고통에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하나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이었기에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메아리만 칠 뿐 그를 도와줄 이가 올 가능성은 전무했다.
온다 하더라도 천하사패의 수장들급이 아니면 그를 살려 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제 좀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군.”
“으윽…….”
축 늘어져서 미약한 신음만 흘리는 사내의 모습에도 반호진의 눈빛은 싸늘했다.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죽어 나가는 건 무인만이 아니었다.
무림세가의 여인들, 아이들, 심지어 무공 일초반식도 익히지 않은 가솔들조차 가문의 일원이라는 이유하에 목이 잘렸다.
그걸 누구보다 많이 본 이가 반호진이었기에 사내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배신자 주제에 불쌍한 척은 그만하고. 어디 붙어먹을 데가 없어서 철혈성에 붙어먹어?”
움찔!
잠자코 머리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흠칫했다.
의문도 아니고 확신이 서린 음성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언제부터 철혈성의 첩자가 되었지?”
“…….”
사내가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반호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툭.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반호진은 무심하게 발끝으로 사내를 살짝 건드렸다.
그런데 그 순간 사내가 온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렀다.
“끄아아악!”
단순한 접촉이었으나 결과는 달랐다.
사내는 마치 전신이 난도질당한다는 듯이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분골착근(分骨錯筋)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뭐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가 아닌가.”
도무지 신음을 참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내의 모습에 반호진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에 붙잡았던 요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그때도 사로잡았던 요원들 중에 중원인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비명을 지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보이는 족족 심문하지 않고 죽였었다.
“으허어억!”
“언제부터지?”
“저, 저는 올해 초부터…….”
“상관에 대해서 말해.”
“모릅니다. 저는 그저 찾아오는 이에게 서신을 전달할 뿐 제가 찾아가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반각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지옥을 경험한 사내가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전부를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맹이라고 할 만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언제 찾아오는데? 일정 주기가 있을 거 아냐?”
“무작위입니다. 그냥 저를 찾아옵니다.”
“장소는?”
“제 움집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곳에 머물 수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 가지 부탁…….”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던 남자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서서히 흩어졌다.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반호진이 사혈을 짚어서였다.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뻔했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사내를 죽였다.
더 이상 알고 있는 것도 없어 보였고.
“건진 건 이것뿐인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사내를 일별한 반호진이 서책을 꺼냈다.
움집에서 사내가 작성하고 있던 바로 그 책이었다.
하지만 암호문으로 작성되어 있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런 게 점차 모이면 뭔가 보이는 것도 있을 테고.”
첩자 주제에 화골산도 없는 사내를 힐끔 쳐다보며 반호진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내의 옆이 움푹 파이며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반호진은 허공섭물을 펼쳐 시체를 넣은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다.
휘이익!
순식간에 시체를 매장한 반호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본 후 몸을 날렸다.
이윽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돌아와서도 한숨을 안 잔 반호진이 의자에 앉아 서책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시선과 달리 반호진의 머릿속에는 다른 것들이 떠오르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벌써부터 중원에 첩자를 두고 있을 줄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충격적이었다.
야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놀람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어째서 중원무림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엿본 느낌이었다.
“최소 십 년.”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 십 년이었다.
그것도 최소가 십 년이지 십일 년이 될 수도 있었고, 십오 년이 될 수도 있었다.
천하사패는 그 시간 동안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해 온 것이었다.
더불어 중원무림이 순식간에 분열되고 무너진 이유가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이러니 밀릴 수밖에 없지. 그리고 내가 아는 게 너무 적어. 큰 줄기는 알지만, 그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반호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일단 어제의 일로 약간의 방해는 되겠지만 큰 타격은 없을 것이었다.
하나 그렇기에 철혈성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터였다.
흔적은 없었고, 사내 말고 다른 피해는 전혀 없으니까.
“눈치 싸움에 머리싸움이라. 손발이 되어 줄 이들이 있으면 참 편할 텐데.”
똑똑똑.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걸 말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미친놈 취급할 게 분명했다.
그때 익숙한 기척과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형님!”
“알고 있어. 들어와.”
“좋은 아침입니다! 어? 안 주무셨어요?”
아침이라 그런지 기운 넘치는 얼굴로 방 안에 들어온 서조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달리 피곤한 기색이 반호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듯해서였다.
“생각할 게 있어서.”
“고민 있으세요?”
“고민이라면 고민이겠네.”
“거기서 더 강해지시게요? 너무 빨리 강해지면 따라잡기 힘든데.”
서조운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다.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서조운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초보자의 성장세는 가파를 수밖에 없기에 나름 따라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반호진이 확 강해지면 격차가 더 커졌다.
“엄한 소리 하지 말고 나가서 기본기부터 다지고 있어. 손에 굳은살도 아직 안 벗겨진 게.”
“굳은살과 경지가 꼭 비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환골탈태도 있고. 근데 형님은 환골탈태 겪어 보셨어요? 알아보니까 이왕이면 젊을 때 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환골탈태 할 때의 나이에서 노화가 멈춘다고 하던데.”
“난 아직. 근데 다 하는 건 아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못 하는 사람도 있어.”
“전 스무 살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팔팔한 몸으로 형님을 보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삼 년도 채 안 남았는데도 서조운은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그게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넘쳐나는 극양지기를 완벽하게 다스리고, 통제하면서 지금보다 더 힘을 키운다면 반호진이 보기에도 가능할 듯했다.
“그래, 열심히 해. 노력한다는데 나로서는 나쁠 게 없지.”
“형님도 건강을 챙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젊은 나이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미래를 준비해야…….”
똑똑.
서조운의 말이 도중에 끊어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였다.
“저기…….”
“예, 들어오세요.”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조운 또래로 보이는 하인이었는데 반호진의 별호 때문인지 아니면 소가주인 선우방과 친구라서 그런지 언행을 조심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반 공자님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소가주께서 안내하는 중인데 미리 말씀을 드리라고 해서요.”
“저에게요?”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우세가에 머문다는 사실을 딱히 알린 적이 없는데 자신을 찾아왔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서조운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고, 금가장에서 오셨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아.”
금가장이라는 말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누구인지 예상이 가서였다.
서조운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 황당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형님, 이 정도면 집착 아니에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긴 해.”
“목적은 포섭이겠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렇겠지.”
반호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할 것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중원상계에 끼치는 금가장의 영향력은 가지고 싶지만.’
반호진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새벽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만약 그에게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정보 조직이 있었다면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었다.
“꿈도 크네요. 금가장의 이 공자라고 하나 형님을 품으려고 하다니. 저도 엄두를 못 내는데.”
“난 어디에 소속될 생각이 없다. 내가 가문을 일으키면 모를까.”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너도 가능하고.”
“전 일단 가문부터 일으켜 세운 다음에 고민해 보려고요.”
똑똑똑.
두 사람의 대화에 하인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을 때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선우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들어간다?”
“그래.”
이미 소식을 알렸기에 선우방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잠시 후 선우방과 금호연이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하하하, 오랜만이지요?”
“그러네요. 서가장에서 만난 뒤에 처음이니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번에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른 게 아닙니다. 반 공자님께 드릴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할 말이라.”
“제안이면서 부탁이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