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01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반호진이 지금은 머리가 멍해졌다.
그 정도로 철혈성의 표식은 충격적이었다.
전쟁 당시에는 천하사패가 사용하는 표식들이 대부분 밝혀졌기에 지금처럼 대놓고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는 이가 없을 것이기에 마음 놓고 드러낸 듯했다.
‘천하사패 전부. 혹은 철혈성만 중원의 동향을 살피는 것일 수도 있어. 그게 아니라면 두 곳 내지 세 곳.’
반호진은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고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근처에 철혈성의 요원이 있을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단번에 이동하지 않고 다른 낙서들을 구경하는 유람객처럼 행동했다.
“낙서는 태곡현에도 좀 있었어요.”
“그치? 소림사 아래에 있는 마을에도 있던데.”
“소림사라. 저도 곧 가게 될 곳이죠.”
심각한 반호진의 머릿속과 달리 서조운은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으로 우물거렸다.
구양절맥을 앓는 동안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해서 그런지 서조운은 은근히 식탐이 있었다.
‘철혈성이 벌써부터 움직일 줄이야. 아니, 전생에서 내가 몰랐던 건가?’
지난 생에서 반호진은 소림사를 떠난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러니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확인해 보면 알겠지.’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는 않았다.
반호진은 새삼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형님도 이거 드셔 보실래요? 오리꼬치인데 양념이 기가 막혀요. 익숙하면서도 자꾸 손이 가는 맛이라고 할까요? 단맛과 짠맛의 조화가 죽입니다.”
“너 많이 먹어.”
“여기가 아니면 못 먹을 맛인데요.”
서조운이 조심스레 다시 권했다.
그 정도로 맛있어서였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래?”
“형도 한 번 드셔 보세요.”
“그래. 한 번 먹어 보자.”
서조운이 보기와 달리 의외로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알기에 선우방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오리꼬치 하나를 받아서는 한 조각을 뜯어먹었다.
그런데 턱 근육이 꿀렁거리기 무섭게 선우방의 동공이 흔들렸다.
딱 한 번 씹었음에도 어째서 서조운이 그렇게 권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맛있네.”
“이건 싫어할 사람이 없는 맛이에요.”
“인정. 하나 먹어 봐. 절대 후회 안 해.”
한 입에 넘어간 선우방이 서조운과 마찬가지로 권했다.
그 말에 반호진은 결국 오리꼬치를 받았다.
하지만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머릿속이 철혈성의 표식으로 가득해서였다.
“역시 숨은 고수들이 있다니까요.”
“인정.”
“형은 왜 몰랐어요?”
“나라고 늘 군것질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근데 어제도 묻고 싶었는데 나는 왜 형이고 호진이는 형님이야?”
자연스럽게 서조운과 나란히 걸으며 선우방이 물었다.
친구 사이고 나이도 동갑인데 호칭이 다른 게 궁금해서였다.
“형은 형이지만 형님은 제게 특별하거든요. 구명지은을 입었는데 당연히 형님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제게 있어 형님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호진 형님뿐입니다.”
“아, 그런 의미였어?”
“옙!”
“부럽네.”
선우방이 진심으로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만약 그가 죽을병에 걸렸고, 그걸 누군가가 살려 주었다면 서조운처럼 행동했을 게 분명했다.
“대신 형은 형님과 친구 사이잖아요. 제가 알기로 친구는 형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긴 하지. 사룡도 다 깐 게 호진이니까.”
아직도 선우방은 이해가 안 갔다.
분명 오대세가를 비롯해서 십대세가에 속해 있는 후기지수들과 여인들이 반호진에게 만나자고 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선우방이 알기로 반호진은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자신을 이용해서 자리를 만든 모용희수와 제갈혜정을 제외하면.
“역시 우리 형님!”
“근데 고민거리가 있는 거 같은데?”
“저도 느꼈어요.”
나란히 걸어가던 두 사람이 소곤거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호진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한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반호진은 두 사람이 쳐다보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반호진은 방을 나섰다.
소리 없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 달랐다.
마치 살수처럼 검은색 야행복에 얼굴에는 복면을 하고 머리카락도 두건으로 확실하게 가렸다.
스스슥!
은밀하게 선우세가를 벗어난 반호진은 아침에 들렀던 저잣거리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철혈성의 표식을 봤던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아침처럼 코앞에 가지는 않았다.
대신 표식이 남겨져 있던 담벼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근처 건물의 지붕에 내려섰다.
휘이이잉.
따로 잠행술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반호진은 상당히 능숙하게 기척을 감췄다.
지난 생에서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반호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왔군.’
밤바람이 서늘하게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담벼락을 주시하던 반호진이 눈을 빛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미약한 인기척이 느껴져서였다.
캄캄한 어둠이 사위를 뒤덮고 있음에도 골목에서 나타난 인영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이동했다.
정확히 표식이 있던 담벼락을 향해서 말이다.
스윽.
그러더니 정작 담벼락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봤다.
찰나지만 표식을 훑는 장한의 눈을.
‘크게 기대는 하지 말고.’
반호진은 장한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천하사패의 정보 조직이 점조직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오늘은 그저 꼬리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었다.
‘중간관리책을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게 오늘일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만큼 엄연히 중간관리책이 있었다.
물론 중간관리책이라고 해서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중요한 건 말단보다는 아는 게 조금이라도 많다는 점이었다.
또 중간관리책을 파다 보면 그 윗줄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스슥!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장한을 따르던 반호진이 순간 눈을 빛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마지막까지 사방을 확인하던 장한이 불빛 하나 없는 작은 민가로 들어가서였다.
저잣거리에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중요한 건 텅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접선인가?’
거리가 상당했으나 반호진의 기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더욱이 집 안에 있는 이는 무인이었다.
그것도 절정의 경지를 눈앞에 둔 초일류 수준의.
‘운이 좋은데.’
민가의 지붕에 올라가며 반호진은 속으로 웃었다.
마음을 비우고 낚싯대를 던졌는데 대어가 걸린 느낌이었다.
“철두철미해.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하하하, 생활이 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그래. 보고해 봐.”
“딱히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성도라고 하나 강소성에 온 이들은 대부분 소주로 가지 않습니까. 근처의 태호로 넘어가거나. 그렇다 보니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아, 소림신룡이 오전에 저잣거리에 나타났습니다. 선우세가의 소가주와 함께.”
“소림신룡이라.”
창문을 전부 닫았으나 반호진의 귀에는 둘의 대화가 전부 다 들렸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반호진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선우세가의 소가주와 친구라고 합니다.”
“격이 너무 안 맞는데.”
“소가주가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는 딱히 보고할 사항이 없단 말이지?”
“예.”
반호진을 이곳으로 이끌었던 장한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대화는 거기서 딱 끝났다.
생각에 잠긴 것인지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동시에 반호진의 머리도 팽팽 돌아갔다.
‘지금 잡아?’
반호진이 따라온 장한은 말단이 확실했다.
같은 조직원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말단 중의 말단.
반면에 민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조직원을 관리하는 직급으로 보였다.
게다가 초일류의 경지에 든 무인이라면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대문파나 명문세가에나 초일류의 수준에 오른 무인들이 많은 거지 군소방파는 사정이 달랐다.
더욱이 그냥 초일류의 경지가 아니고 절정을 목전에 둔 무인이었다.
“이만 가 봐. 따로 부를 일이 있으면 표식을 남길 테니.”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반호진이 고민하는 사이 여기까지 안내해 주었던 장한이 방을 나섰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제는 굳이 장한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어서였다.
대신 반호진은 장한이 나간 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민가를 나서는 사내의 뒤를 은밀히 쫓아갔다.
휘이익!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장한과 달리 사내는 민가를 나서자마자 곧바로 경신술을 펼쳤다.
제대로 잠행술을 익힌 모양인지 일체의 소리도 없이 빠르게 야공을 갈랐다.
하지만 반호진을 따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빈민촌에 만든 안가(安家)라. 머리 좀 썼는데?’
사내를 추격하던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빈민촌이라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숨기에 적당했다.
물론 빈민층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죽는 이들이 많았지만.
‘어떡한다.’
익숙하게 움집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사내를 일별하며 반호진이 근처의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 주는 인력이 있으면 참 편할 텐데.’
사내가 들어간 움집을 보며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워서였다.
개방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규모가 있는 정보 조직이 있었다면 길게 보면서 꼬리가 아닌 몸통을 추적하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게 불가능했다.
스윽.
그렇다면 반호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당분간 남경에 머물 생각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사내를 지켜보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낭비이기도 했고.
톡.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순간 반호진이 움직였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움집 안으로 은밀하게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서책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던 사내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 사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혈과 아혈을 점혈당했다.
흠칫!
몸이 굳는 것과 동시에 사내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무인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알을 굴리는 것밖에 없었다.
부우웅.
손쉽게 사내를 점혈한 반호진은 이내 허공섭물로 움집을 헤집었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 허공섭물을 사용한 것이었다.
“읍읍!”
그 광경에 사내가 경악했다.
허공섭물을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무경이 절정 이상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개가 아니라 지금처럼 여러 개를 동시에 들어 올리고 소리 없이 제자리에 놓으려면 웬만한 경지로는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사내는 죽음을 직감하며 몸을 떨었다.
휘이익!
움집은 작았기에 물건들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지금 작성하는 서책 말고는 딱히 중요해 보이는 물건이 없었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사내를 어깨에 들쳐 메고서는 멀리 떨어진 야산으로 이동했다.
쿵!
“우욱!”
“엄살은.”
빈민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야산에 도착한 반호진이 거칠게 사내를 내던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꼬리뼈부터 떨어졌는지 사내가 두 눈을 부릅뜨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반호진은 사내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익숙하게 입 안을 살폈다.
혹시나 이빨 사이에 독단이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부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