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1화 (31/468)

제 12장. 아니, 벌써? -04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사실 선우방과 친구가 된 순간부터 미래는 바뀌었다.

지난 생에서는 처음 마주친 게 전장에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빨리 만난 만큼 미래가 달라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내가 바라던 것이기도 하고.”

선우방은 앞으로 있을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이 일부러 그를 찾아가 인연을 맺은 것이었고.

대기만성의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꼭 나중에 재능을 만개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서조운의 미래를 바꾼 뒤 선우세가를 찾은 것이었고.

한데 선우방의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거기다 서조운이라는 존재도 있으니 자극도 확실할 터였다.

“가장 좋은 건 천하사패가 야욕을 부리지 않는 건데.”

“응? 무슨 소리야? 천하 뭐?”

“아, 그런 게 있다. 그나저나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반호진의 곁으로 선우방과 서조운이 다가왔다.

쌩쌩한 선우방과 달리 서조운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두 사람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열심히 해야지. 언제까지 친구의 등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일단 천룡부터 제치고 와.”

“조운이가 네 말투를 배운 것 같은데.”

“그럴 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어때? 세상이 만만치 않지?”

툴툴거리는 선우방을 일별한 반호진이 히죽 웃으며 서조운을 쳐다봤다.

자신 말고는 누구한테도 쉽게 지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더구나 재능만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하는 곳이 무림이었다.

“더 열심히 하려고요. 잠시 자만했던 것 같아요.”

“빠른 판단은 좋았어. 물론 그것만으로 격차를 줄이기에는 너무 컸지만.”

“지금은 졌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거예요.”

“나도 따라잡힐 생각은 없다. 그리고 기본기라는 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

서조운의 말에 선우방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재능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라잡힐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기본기만큼이나 서조운은 경험이 일천했기에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경쟁은 좋은 거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셋 다 경쟁 중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반호진은 선우방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반호진은 누구에게도 따라잡힐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네.’

반호진은 단순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선우세가를 찾은 게 아니었다.

다 노리는 게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판 어때?”

“대련?”

“응. 참고로 난 괜찮아. 체력적으로 문제없어.”

“흐음.”

반호진의 시선이 서조운에게로 향했다.

역시나 살짝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선우방의 실력을 직접 겪어 봐서 그런지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설마 피하지는 않겠지?”

“날 뭐로 보고. 바로 하자고.”

“좋아.”

반호진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험이라는 게 꼭 직접 부딪쳐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간적접인 경험도 분명히 도움이 되기에 반호진은 선우방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저는 열심히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잘 보도록 해. 너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까.”

“예!”

언뜻 들으면 거만해 보일 법한 말이었으나 서조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이가 말하는 건 거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반호진은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현재 후기지수들 정점에 올라 있는 게 반호진이었다.

‘말투만 저러지 하루에 하는 수련량은 진짜 미친 수준이니까.’

서조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반호진과 체력 훈련을 하고 서조운은 정말 피토 나온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느꼈다.

절대 혹사시키지 않겠다는 말과 달리 반호진의 훈련은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날 서조운은 정말 피가 나올 정도로 토하고 쓰러졌었다.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해.’

서조운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굳건한 벽처럼 흔들림이 없던 선우방이 지금은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딱히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선우방은 검이 부딪칠 때마다 밀렸다.

한눈에 봐도 우열을 알 수 있는 둘의 모습에 서조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아직 멀었어.’

서조운은 새삼 느꼈다.

자신이 재능만 믿고 설쳤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시에 반호진이 왜 선우방과 대련하라고 했는지도 알았다.

그가 얼마나 풋내기이고 애송이인지 몸으로 느껴 보도록 한 것이었다.

‘기다려 주세요. 금방 근처까지 갈 테니까요.’

서조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해 주지 않아 자세한 건 몰랐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반호진이 무언가 그리는 그림이 있고, 거기에 자신과 선우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다짐했다.

***

선우세가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에 반호진은 장원에서 나왔다.

강소성의 성도인 남경까지 왔는데 그래도 구경은 한 번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번 삶은 지난 생과 달리 많은 걸 누리고 재미있게 살아 보고 싶었기에 반호진은 아침을 먹자마자 저잣거리로 나왔다.

“확실히 규모가 다르네요.”

“성도다운 느낌이 있지?”

“다 커요.”

“에이, 그건 다른 성의 성도도 마찬가지지. 중요한 건 분위기지. 지역적 특색이 각각 다르니까.”

생각지도 못한 외출이어서일까.

서조운이 들뜬 기색으로 시전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선우방이 안내 겸 설명을 해 주는 중이었다.

“강소성에 온 김에 소주도 한 번 가 봐야 하는데.”

“저 들어 봤어요!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조운이 소리쳤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소주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서였다.

“책에서 본 모양이네.”

“맞아요. 그래서 안 그래도 은근슬쩍 형님께 여쭈어볼 생각이었어요. 강소성까지 왔는데 소주를 안 들르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데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가 봐야죠.”

“좋은 곳이지. 환락의 도시이기도 하고.”

남경 출신이었기에 선우방 역시 소주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강소성을 찾아온 후기지수들은 무조건 가는 곳이 소주이기도 했고.

“그래서 가 보고 싶은 거구만?”

“궁금하긴 한데, 아직은 생각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오 년이 저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거든요. 아직 갚아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도 하고.”

“여자라.”

“혼담, 꽤 들어오지 않아?”

선우방이 은근슬쩍 물었다.

신룡이라 불리며 혜성처럼 등장한 게 반호진이었다.

거기다 소림사 방장인 담현 대사의 무기명제자로 배경 역시 대단했다.

그렇기에 많은 곳에서 군침을 흘릴 게 분명했다.

“전혀.”

“……어? 정말?”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렸다.

당장 소림사에 머물 때만 하더라도 모용희수와 제갈혜정이 그를 이용해 반호진을 만났었다.

즉 명문세가의 여식들조차 반호진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었다.

한데 혼담이 전혀 없었다고 하자 선우방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는 나한테 연락이 올 수가 없었지. 수련을 핑계 삼아 혼자 지내기도 하고. 게다가 얼마 안 가 하산했으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법무 대사님께 연락이 갔을 수도 있고.”

“대사형은 별말 없으시던데?”

“네가 관심 없어 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

“뭐, 그럴 수도 있고.”

대사형이지만 나이 차가 제법 있다 보니 삼촌 같은 느낌이 있었다.

법무 역시 사제라기보다는 조카나 아들을 보는 듯이 그를 봤고.

그러니 선우방의 말도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혼담이라니. 하긴 형님의 나이가 어느새 결혼을 생각하실 나이가 되긴 했죠.”

“이제 약관이거든.”

서조운이 중얼거리는 말에 반호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죽었던 지난 생에서도 서른이 될 때까지 혼인은커녕 여자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던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스무 살이란 나이는 딱히 많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인할 생각은 있지?”

“물론이지.”

“근데 웃기네. 내가 널 걱정할 때가 아닌데. 백봉이나 다른 삼봉을 만날 수도 있는 너한테 걱정이라니.”

선우방이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친구 걱정을 하고 있어서였다.

심지어 반호진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다.

“예에?! 백봉요? 혹시 백련화 모용 소저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아.”

“우와!”

서조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을 떠나면서 서조운이 남몰래 세운 목표 중 하나가 무림삼봉과 만나는 것이었다.

운 좋게 하오문의 소문주 난희주를 만난 후 서조운은 개안을 했다.

그래서 꼭 한 번 삼봉을 만나 보고 싶었다.

“단순히 만난 게 아냐. 백봉이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지. 거기에 제갈세가의 금지옥엽까지도.”

“허업!”

서조운이 경기라도 일으킬 것처럼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근데 이 녀석은 별로 관심을 안 보이더라고. 나는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는데.”

“저, 저도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이 녀석과 함께 다니다 보면 기회가 있지 않을까?”

“흐흐흐흐!”

서조운이 헤벌쭉 웃었다.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지만 반호진이나 선우방에게는 훤히 보였다.

지금 서조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저잣거리에 왔는데 뭐 좀 먹어야지?”

“저는 군것질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정확하게는 자신의 방에서 보냈기에 서조운은 냉큼 대답했다.

남경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라면 뭐든지 다 먹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서조운은 생소하다 싶은 길거리 음식들은 전부 다 먹어 보기 시작했다.

“응?”

길거리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는 서조운과 달리 반호진은 느긋하게 구경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찰에서 지내서 그런지 먹는 것에는 딱히 욕심이 없었다.

한데 그때 으슥한 골목의 담벼락이 반호진의 시선을 끌었다.

정확하게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낙서한 듯한 벽면이.

“……저건?”

무엇을 본 것인지 반호진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절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게 벽면에 남아 있어서였다.

“어째서?”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일행을 뒤따라가던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방향을 틀었다.

으슥하기는 해도 시전과 인접해 있기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반호진은 그런 이들을 가로지르며 담벼락 앞에 섰다.

“왜 그래?”

“아, 아냐. 낙서가 신기해서.”

“그림처럼 그리는 애들이 있긴 있어. 의외로 실력 좋은 아이들이 있다랄까. 근데 이런 낙서들은 어딜 가도 있잖아?”

멍하니 벽면을 응시하는 반호진의 뒤로 선우방이 다가왔다.

따라 오는 서조운의 양손에는 닭꼬치구이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구이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의 귀에는 선우방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철혈성(鐵血城)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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