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아니, 벌써? -03
바뀌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았다.
그걸 반호진은 너무나 많이 겪어 봤다.
정말 큰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았기에 반호진은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선우청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무력은 부족하지만 인망이 있어. 또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지.’
무림세가의 수장으로서 선우청의 무위는 사실 많이 부족했다.
괜히 선우세가가 무림십대세가에도 들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청에게는 십대세가의 가주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신의였다.
다른 이들은 등 뒤를 맡길 수 없어도 선우청과 선우세가는 달랐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다른 후기지수들과는 달리 먼저 선우방을 찾았고, 친구를 맺었다.
“사실 처음에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네. 내 자식이지만 참 숫기 없는 녀석이라.”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나간 게 몇 년인데 친구라고 할 만한 이가 한 명도 없지 않느냐.”
“끄응!”
선우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보니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였다.
“친구 같지 않은 친구들이 많은 것보다 진짜 친구 한 명이 더 낫습니다. 친구 같지 않은 친구는 그냥 아는 사람들일 뿐이죠.”
“허어. 잘 아는구만?”
“저도 인간관계가 협소한 편이라.”
“그건 방이와 닮았군.”
“근데 사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반호진의 모습에 선우청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정말 아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가 반호진인 것 같았다.
“그렇지. 인맥도 중요하지만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본신의 실력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요. 단지 잡아먹히는 자와 잡아먹는 자로 나누어질 뿐이죠.”
“이것 참. 아들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이 전혀 아닌데?”
“제가 절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당장 사형만 하더라도 저보다 연배가 한참 위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선우청이 피식 웃었다.
소림사를 일개 절처럼 말하는 게 웃겨서였다.
근데 그건 선우방과 서조운도 마찬가지인 듯 둘 다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오대세가가 십 년 후에도 오대세가의 자리에 있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강호이기도 하지요.”
“맞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 근데 특이하구먼. 소림사의 제자인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저는 속가제자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속세의 일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요. 또 먼 미래에 저만의 가문을 세울 수도 있고.”
“역시 젊구먼. 청춘이야.”
선우청이 짐짓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기로운 모습을 보니 그 역시 의욕 넘쳤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동시에 반호진과 아들이 꽤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보람차게 잘 보낼 생각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무경이 너무 뛰어난 거 아닌가?”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긴 하지. 아무쪼록 방이를 잘 부탁하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편하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길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선우청은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은 이렇게 끝내지만 식사를 같이해도 되었기에 선우청은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반호진과 서조운을 배웅해 주었다.
“되게 자상하시네요. 저희 아버지와는 달리.”
“위엄이 없다는 말이지?”
“아뇨. 위엄이라고 해서 꼭 무겁고, 매서워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위엄에도 종류가 많죠.”
“그런가?”
서조운의 말에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들이지만 아무리 아버지 편을 들어주려 해도 위엄이나 근엄과 같은 단어는 선우청과 어울리지 않았다.
“수장이라고 해서 꼭 위엄이 있을 필요는 없지. 중요한 건 수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잘하는 거지. 그런 점에서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분 같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여기까지 오면서 나쁜 얘기가 전혀 안 들렸으니까.”
“어?”
단언하듯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선우방이 순간 입을 쩍 벌렸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니어서였다.
예리하게 근거를 제시하는 말에 선우방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저도 들었어요. 하인들이고 하녀들이고 뒷담화하는 사람이 없던데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황제도 까는 게 사람이잖아요. 근데 다들 좋은 소리만 하더라고요. 가솔들의 얼굴도 밝고.”
“생긴 거답지 않게 의외로 눈썰미가 있다니까.”
“저도 명문가 출신이에요.”
서조운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지금은 가세가 많이 기울었지만 서가장 역시 한때는 산서성을 넘어 무림을 호령하던 명문세가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리될 터였고.
서조운이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명문가이긴 하지.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니까. 그리고 다시 차고.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지.”
“맞아요.”
서조운이 눈을 반짝였다.
영웅에게 역경과 고난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서사였다.
그는 지금이 서가장에 있어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가문을 일으킬 자신도 있었고.
“그러니 일단은 기반부터 열심히 다지도록 해.”
“예!”
구양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가문 전체가 십칠 년 동안 그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런 정성과 보살핌을 받았는데 보답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서조운은 받은 것 이상으로 반드시 가문에 보답할 생각이었다.
***
따다다당!
이른 아침부터 반호진이 머무는 별채 앞마당에서 경쾌한 금속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반호진의 주도하에 선우방과 서조운의 대련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익!”
그런데 처음 자신감 넘치던 서조운은 비무가 시작된 지 일각이 채 되기도 전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비무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서조운은 자신이 이기기는 힘들더라도 크게 밀리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무공에 정식으로 입문한 시간은 짧지만 그에게는 십칠 년 동안 몸에 쌓인 극양지기와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선우방이 선우세가라는 명문세가 출신이라고 하나 반호진처럼 무명을 날리는 후기지수가 아니기에 내심 만만하게 봤었다.
툭.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선우방은 결코 만만한 무인이 아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의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며 오히려 반격까지 했다.
그것도 겨우겨우 해낸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검면으로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말이다.
으드득!
실전이었으면 팔이 잘려 나갔거나 상반신의 반이 갈라졌을 게 분명했다.
그걸 서조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심지어 공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서조운은 눈곱만큼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반호진이 천하일절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말한 가전무공을 펼쳤음에도 선우방은 철벽처럼 완벽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 냈다.
“후후!”
누가 봐도 얼굴에 경악과 충격이 서려 있는 서조운의 표정에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얼굴만 봐도 서조운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서조운은 여전히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선우방에게도 보이고 있고, 그게 얼마나 선우방을 무시하는 행동인지를 말이다.
툭.
그럼에도 선우방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재능만 믿고 날뛸 시기라는 걸 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조운의 빈틈을 가르쳐 주기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본가로 돌아온 뒤 열심히 수련했는지 소림사에서 봤을 때보다 선우방의 검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세밀해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 단계 발전한 것이었다.
“흐읍!”
하지만 서조운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선우방이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었다.
다만 서조운에게는 모든 수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 중요했다.
그리고 점점 더 선우방이 벽처럼 느껴졌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말이다.
더불어 새삼 반호진의 말이 떠올랐다.
재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개화시키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스스슥!
그 말이 떠오른 순간 서조운은 공격 방식을 바꾸었다.
지금까지의 방법이 다 막혔다면 앞으로도 통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려면 다른 방법으로 나가야 했다.
츠츠츠츠!
서조운의 검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석과도 같은 검초를 뿌리던 서조운이 변칙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변화막측한 검에 몸놀림도 달라졌다.
어설퍼도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여 주겠다는 듯이 서조운은 쉴 새 없이 위치를 이동하며 선우방을 공략했다.
터엉! 텅! 터더더덩!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서조운의 파상공세에도 선우방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탄탄한 기본기로 별다른 초식 없이 단순하고 간결하게 서조운의 공격을 막았다.
아무리 현란한 검도, 눈을 현혹하는 검세도 결국 진체는 하나뿐이었다.
그걸 선우방은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정면으로 서조운의 파상공세를 분쇄했다.
“소용없지.”
서조운은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으나 반호진이 보기에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서조운과 달리 선우방은 십칠 년 가까이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었다.
더욱이 검을 잡은 건 십오 년이 넘었다.
서조운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아이용 철검을 휘두른 게 선우방이었다.
“……졌습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한들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온 선우방의 무공을 단기간에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서조운은 이번 비무로 처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했는지 말이다.
“고생했다.”
“정말 완벽히 졌네요.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예요.”
“그래도 대단했어. 무공을 정식으로 익힌 시간에 비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그럼 뭐 해요. 완전 개박살이 났는데.”
“너한테 지면 난 뭐가 되겠어?”
선우방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많이 놀란 상태였다.
구양절맥을 앓다가 얼마 전에 치료가 되었다는 건 그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그러네요?”
“거의 네가 살아온 시간만큼 무공을 수련했는데 쉽게 따라잡히면 안 되지. 아무리 타고난 재능의 크기가 다르다고 해도.”
“근데 저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해요.”
“이루고 싶은 목표?”
말투는 도발적이었으나 선우방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서조운이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말은 이렇게 해도 성격은 착했다.
평소에는 깍듯하기도 했고.
“네. 서가장을 다시 명문세가로 일으켜 세울 거예요. 장주는 큰형이 되겠지만 꼭 수장이 가장 강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수장이 제일 강한 거지만.”
“저는 욕심 없어요. 이미 충분히 행복하기도 하고요.”
“무공에 대한 욕심은 어마어마하던데.”
“에이, 이건 무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죠. 상향심과 승부욕은 무인이 아니라 남자에게 있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서조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눈빛은 진지했다.
선우방은 그게 재미있었다.
“흐음.”
한편 반호진은 서조운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우방을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기상천외한 서조운의 파상공세를 막아 내던 선우방의 모습이 반호진의 뇌리에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이 미래도 바뀌어 간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