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아니, 벌써? -02
북해에서 나름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은 반호진은 그대로 남하했다.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곧바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 결과 반호진은 여름이 아직 끝나기 전에 하북성, 산동성을 지나 강소성의 성도 남경에 도착했다.
“여기가 남경이군요!”
“하북성과 산동성과는 또 다르지?”
“예. 저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면 바다가 나오는 거죠?”
“그렇지.”
그간의 여정을 보여 주듯 서조운의 무복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이동과 수련을 동시에 한다고 끊임없이 달렸기에 전신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그런데도 서조운은 힘들어하기보다는 강을 노니는 배를 보며 신기해했다.
“바다도 보고 싶어요.”
“시간을 내서 한번 보러 가자.”
“정말요?”
“이번 여정은 견문을 넓히는 것도 목적이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는 한 번 보고 소림사로 가야지.”
바다는 반호진도 보고 싶었다.
지난 생에서는 수련과 전쟁으로 인해 강호유람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즉 반호진 역시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이번 생에는 꼭 바다를 볼 작정이었다.
“드디어 소림사인가요?”
“그건 아니고. 아직 들를 곳이 몇 군데 더 있어.”
“몇 군데나요?”
군말 없이 반호진이 이끄는 대로 따랐던 서조운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난생처음 집을 나와서 간 곳이 북해였다.
그런데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이 아니라 중원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는 강소성이었다.
한데 여기서 더 갈 곳이 있다고 하자 제아무리 서조운이라도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련 삼아 이동하고 좋지 뭐. 언제 또 이렇게 강호유람을 하겠어?”
“그건 그렇죠.”
“그리고 너에게도 절대 손해는 아냐. 일단 지금 우리가 갈 곳만 하더라도 말이지.”
“제 인생에 손해는 없어요. 형님께서 저를 치료해 주신 후부터는요. 형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전 어디든 갑니다! 대막과 서장은 물론이고 묘강도요!”
“어떻게 알았어? 거기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
순간 서조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묘강이나 서장, 대막은 말 그대로 예를 든 것뿐이었다.
그런데 반호진이 진심으로 갈 것처럼 말하자 서조운은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저, 정말요?”
“지금 가겠다는 건 아니고. 이쯤인 것 같은데. 맞네.”
남경은 반호진도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초행길이다 보니 길을 조금 헤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잘 찾아온 듯했다.
“선우세가네요?”
“맞아. 우리의 목적지지.”
“호진아!”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활짝 열린 정문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경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은 명문세가답게 선우세가의 정문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반호진의 귀에는 친구의 목소리가 단번에 들렸다.
“오랜만이야.”
“하하하! 오랜만이지.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소림사에서 하산한 지 꽤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온 이는 바로 선우방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도착하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선우방의 모습에 서조운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나타나는 게 절묘해도 너무 절묘해서였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너처럼 개방을 통해도 되고. 근데 개방도 네가 숭산에서 내려온 건 알아도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던데?”
“주로 산에서 노숙을 했으니까. 거지들이 많다고 하지만 산에는 없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선우방이 눈을 껌뻑였다.
생각해 보니 마을에나 많지 산이나 강에서는 보기 힘든 게 거지들이었다.
“이쪽은 이번에 알게 된 동생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산서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선우방입니다.”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서조운이 깍듯하게 인사해 오자 선우방도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선우세가 앞에서 가문의 이름을 또 넣는 건 조금 그래서 그냥 이름만 밝혔다.
“형님의 친구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말씀 편히 하시죠.”
“아, 그럴까요?”
“편히 해. 해도 된다잖아. 싫어하면 이런 말도 안 해, 이 녀석.”
“맞습니다.”
방금 전에 만났기에 살짝 머뭇거리는 선우방을 향해 반호진이 말했다.
그러자 서조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형님과 좀 다르네요. 형님은 바로 놓으셨는데.”
“내가 좀 시원시원한 성격이긴 하지.”
“저돌적이긴 해. 소림사에서도 다짜고짜 찾아왔었으니까.”
옛날 일이 기억나는 듯 선우방이 실소를 흘렸다.
그날의 당혹감은 여전히 그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네? 역시 명문세가는 다르구만.”
“소림사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우린 향화객들이 많은 거고. 무림 세력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찰이니까.”
반호진이 고개를 저었다.
같은 선상에 놓기에는 너무나 다른 게 소림사와 선우세가였다.
일단 속세냐 아니냐의 차이가 가장 컸다.
“하긴, 비교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에서 차이가 나니까. 일단 들어가자. 너 온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도 보고 싶어 하셔.”
“가주님이?”
“응. 소림신룡이 찾아온 거니까.”
“어후.”
반호진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룡이라는 별호도 거슬리는데 거기에 소림이라는 두 글자까지 붙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왜 그래?”
“오글거려서. 소림신룡이라니.”
“그게 왜? 난 부러운데. 신룡이라는 별호가 후기지수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도 잘 알잖아?”
“이 몸은 후기지수가 아니거든.”
“그건 맞죠.”
황당하다는 표정을 대놓고 짓는 선우방과 달리 서조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호진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서조운은 동조했다.
단순히 후기지수의 범주 안에 넣기에는 반호진의 실력이 너무나 월등했다.
그리고 그건 곧 자신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뭐야, 얘는?”
“이따가 비무 한 번 하면 알게 될 거야. 아마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지.”
“비무?”
“응. 너에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걸?”
“넌 안 하고?”
은근슬쩍 승부욕을 드러내는 서조운을 일별하며 선우방이 반호진을 바라봤다.
친구가 온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기대되는 건 비무였다.
소림사에서 연전연패를 당했기에 선우방은 그 설욕을 갚고 싶었다.
물론 연전연승을 바라는 건 아니었고 세 번 붙으면 한 번 정도는 이기고 싶었다.
“해야지. 나도 궁금하거든. 네가 얼마나 성장했을지.”
“실망하지는 않을 거야. 정말 열심히 노력했거든.”
선우방이 눈을 빛냈다.
마지막 말이 있었으나 그건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조금 민망해서였다.
“저어, 소가주님.”
“아, 들어가자.”
너무 밖에 있어서일까.
보다 못한 무사 한 명이 우물쭈물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선우방이 퍼뜩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좀 오래 떠들긴 했지.”
“알고 있었어?”
“너만 몰랐을걸?”
“그럼 말 좀 해 주지.”
“신나 보이길래.”
눈을 흘기는 선우방의 모습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친구가 왔다고 반겨 주는데 정색하며 말 좀 그만하라고 하면 기분이 상할 게 분명했기에 반호진으로서는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선우방도 이내 알았는지 다시 웃으며 반호진과 서조운을 이끌었다.
“우선 앞으로 머물 숙소부터 안내해 줄게. 참고로 우리 장원에서 세 번째로 좋은 별채야.”
“별채는 너무 과한데. 우리는 두 명밖에 없어.”
“아담한 크기니까 충분해. 너무 작아도 답답하잖아. 그리고 내 친구에, 소림신룡이 왔는데 제대로 대접해야지. 손님 대접 제대로 못하면 나랑 아버지가 욕먹어.”
“그것도 그러네.”
반호진은 이내 수긍했다.
명문세가인 선우세가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어서였다.
반호진이야 소림사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그런 쪽에는 무감각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우세가의 별채라니. 완전 기대돼요.”
“실망하지는 않을 거야.”
“정문을 보는 순간부터 실망감은 사라졌어요.”
“의외로 넉살이 좋네. 잘생긴 애들은 보통 무게 잡을 줄밖에 모르는데.”
앞장서서 안내하던 선우방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첫인상은 누가 봐도 귀공자였는데 성격이 상당히 수더분했다.
그게 선우방은 살짝 놀라웠다.
“하하, 형님 앞에서 무게 잡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애가 야망이 있어. 언젠가는 날 넘어서겠다고 늘 말하더라고.”
“사내대장부라면 당연히 야망이 있어야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선우방의 대답에 서조운의 눈이 커졌다.
설마하니 선우방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인지 서조운은 자신이 제일 먼저 따라잡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선우방을 바라봤다.
“뭐, 꿈은 높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불가능할 거라는 듯이 말한다?”
“나는 뭐 노나?”
“후후.”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한때 소림사에서는 반호진이 게을러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헛소문이었다.
반호진과 비무를 하고, 같이 체력 단련을 하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지 알게 될 터였다.
“이곳이야?”
“응. 괜찮지?”
“느낌 있네. 크기는 한 열 명 남짓 머물러도 될 정도이고.”
선우방을 따라 별채에 도착한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변의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담한 삼 층 목조건물이었는데, 선우세가의 역사를 말해 주듯 세월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나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낡은 느낌보다는 고풍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마음에 들어?”
“좋네. 살짝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과하긴. 내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여기 머물기엔 충분해. 오히려 좀 부족하지.”
“이 정도면 충분해. 겨우 두 명이서 머무는데. 앞마당도 넓고, 밖에서 안 보여서 좋고.”
“그게 먼저 눈에 들어오지?”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역시 무인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연무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앞마당을 살펴보는 건 서조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짐부터 풀자. 얼마 없지만 그래도 방은 각자 정해야지.”
“옙!”
“놓고 와.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대.”
건물 안까지는 따라가지 않고서 선우방이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서조운이 살짝 놀랐다.
아무리 십대세가에도 들지 못한다고 하나 그래도 명문세가였다.
한데 그 가문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서조운은 새삼 반호진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림의 반호진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산서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허허허. 반갑네. 방이의 아비일세.”
짐을 푼 반호진과 서조운은 곧바로 선우방을 따라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둘 다 서두른 것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가주라는 자리가 바쁜 건 사실이지만 또 시간을 내려고 하면 못 낼 것도 없거든. 더욱이 아들의 친구 아닌가.”
선우세가의 가주라기보다는 옆집 친구의 아버지 같은 푸근한 인상에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선우청은 반호진을 처음 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아서였다.
전생에서 함께 전쟁도 치렀었기에 반호진은 선우청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