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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28화 (28/468)

제 12장. 아니, 벌써? -01

서이경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신룡이라는 별호와 함께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반호진이 이렇게 말해 주자 감격한 것이었다.

동시에 자신감이 생겼다.

소림사의 고수인 반호진이 인정하자 지금껏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던 의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머지않아 서가장의 검이 강호를 진동할 겁니다. 조운이를 통해서요.”

“막내아들의 발목을 붙잡지 않으려면 진짜 죽어라 해야겠네요.”

서이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눈빛은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열의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응원하겠습니다.”

“반 공자님께서도 무탈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겨우겨우 작별 인사를 끝내고 몸을 돌리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다시 한번 깊게 포권을 했다.

그 모습에 서이경도 답례하듯 마주 포권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그래, 몸 조심히 다녀와라. 반 공자님께 폐 끼치지 말고.”

“제가 애인가요. 걱정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여전히 붉은 눈시울로 서조운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잽싸게 몸을 돌렸다.

더 있다가는 가까스로 참고 있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았기에 반호진의 몸을 이끌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웃기지 않아? 제일 시간을 끈 게 누군데?”

“에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거죠. 얼른 가죠! 갈 길이 멀다면서요!”

“일단 내 팔부터 놔라. 난 누구에게 끌려다니는 거 싫어한다.”

시끄럽게 정문을 나서는 막내아들의 모습에 서이경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열일곱 살이면 장가를 가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지만 서조운은 태어나서 얼마 전까지 늘 아파했기에 덩치가 커져도 아이 같았다.

그래서인지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괜찮겠죠?”

“당연히 괜찮겠지. 다른 분도 아니고 반 공자님이 함께하니까. 그보다 너무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구나.”

“앞으로 차차 갚아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운이도 갚을 테고요.”

첫째의 말에도 서이경은 마음이 무거웠다.

반호진에게 한없이 받기만 한 것 같아서였다.

특히 금가장, 하오문과 안면을 튼 게 정말 컸다.

만약 반호진이 아니었다면 금호연이나 난희주와는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조운이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지.”

“물론입니다.”

“비급은 보았느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공비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정운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처음 무공비급을 봤을 때의 충격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무공 역시 조운이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직접 확인하고 우리가 개량할 수 있는 건 해야 해.”

“물론입니다. 둘째와 함께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서정운의 대답에 서이경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멀어지는 반호진과 서조운에게 향해 있었다.

***

휘이이잉!

진짜 북풍한설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살이 에일 듯한 바람에 서조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피풍의를 들어 입가를 가렸다.

“북해의 바람은 적응이 안 되네.”

“그러니까요. 춥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어요. 시기적으로는 여름인데.”

“여름이 이 정도면 겨울은 어느 정도일지 감이 안 잡히네.”

서조운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피풍의로 몸을 감싼 반호진이 혀를 찼다.

한여름에도 추위가 이 정도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한서불침인 그조차도 추위를 느낄 정도면 평범한 무인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해요. 겨울이 어느 정도일지가요.”

“너야 극양지기 때문에 살 만하니까 그런 거지.”

“형님도 한서불침이시잖아요.”

“그렇다고 추위를 아예 안 느끼는 건 아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서불침이라고 해서 추위를 아예 안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추위를 덜 타는 것뿐이었다.

만약 추위를 못 느낀다면 촉각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 좋아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북해도 와 보는 거잖아요. 만약 구양절맥을 치료하지 못했다면 여기에 와 보지 못했겠죠.”

눈보라는 없지만 대신 차가운 바람이 연신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조차도 서조운은 행복했다.

북해의 바람을 느끼고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다 건강하게 살아 있었기에 가능해서였다.

그러나 서조운은 단순히 그것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이유가 있어.’

서조운이 반호진을 힐끔거렸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 온 반호진은 절대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북해에 왔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왜 하필 북해일까.’

서조운의 시선이 얼어붙은 땅으로 향했다.

허허벌판 위에는 중원과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있었다.

괜히 새외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의복도, 말도 꽤나 달랐다.

사투리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겨우 대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 만나려고 온 건 아닌 듯한데.’

만약 지인이 있었다면 반호진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서조운이 보기에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 조직의 비밀 요원처럼 동태를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잠깐만?’

순간 서조운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여러 가지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답을 도출해서였다.

그러나 서조운은 그게 순순히 믿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너무 허황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형님께서 이유 없이 이럴 리가 없어.’

서조운이 복잡한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그런데 반호진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서조운만큼이나 반호진의 머릿속도 복잡해서였다.

“흐음.”

깊은 한숨과 함께 반호진이 두 눈이 잔뜩 좁혀졌다.

이 먼 북해까지 왔건만 소득이 전혀 없어서였다.

서서히 그의 무명이 중원에 퍼지고 있다고 하나 그래 봤자 일개 후기지수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그걸 노리고 북해에 왔다.

아직 덜 알려졌을 때 북해에 가야 알아보는 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더불어 내심 한 가닥 기대를 가졌다.

중원만큼은 아니더라도 북해빙궁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괜히 북해의 패자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러나 기대는 말 그대로 기대로 끝났다.

괜히 패자가 아니라는 듯이 북해빙궁에 견줄 만한 세력이 전무했다.

군소방파들이 있기는 하나 북해빙궁에 반기를 들 만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오히려 전부 다 북해빙궁의 휘하인 듯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노렸건만.’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북해빙궁의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중원에 신경 쓸 틈이 없도록 북해에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말이다.

그럼 북해빙궁의 전력도 약화될 테니 반호진으로서는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단 한 곳도 없다니.’

반호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비벼 볼 만한 곳이 있기는커녕 북해에서 북해빙궁의 위치가 너무나 견고했다.

하나의 왕국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암살을 할 수도 없고.’

괜히 건드렸다가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이내 떠오른 생각을 털어 냈다.

북해빙궁주를 단독으로 만나기도 힘들뿐더러 설사 단둘이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십 년 전이라고 하나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운이 너무나 좋아 북해빙궁주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모든 게 걸리는구나.’

더욱이 반호진의 이번 생 목표는 평온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었다.

또다시 중원무림을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결국 정석대로 가야 하는 건가. 그럼 일정을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데.’

반호진은 북해 다음에 대막과 묘강에 들를 생각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처럼 천하사패를 직접 보고 느껴 보기 위해서였다.

천하사패와 질리도록 싸워도 보고 죽기도 했지만 현재의 천하사패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개방의 후개조차도 모르는 만큼 직접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는데 북해에 와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달리 생각하면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반호진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지금 보이는 북해를 생각하면 대막도, 묘강도, 서장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변수는 서가장에서부터 있었기에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형님.”

그때 서조운이 그를 불렀다.

상념에 빠져 있던 반호진을 꺼내 주었던 것이다.

“왜?”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한데?”

“정말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반호진은 미래를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었다.

말한다고 해도 서조운이 믿는 건 다른 문제였고.

또한 아직 서조운은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마. 북해에 그냥 한 번 와 보고 싶어서 온 거니까. 나중에는 오고 싶어도 못 올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가능성은 있다는 말씀이시죠?”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지. 북해빙궁이 중원무림을 침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아마 정확한 횟수를 알고 있는 이는 없을걸.”

“흐음.”

서조운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애매모호하게 말하니 더더욱 심증이 깊어져 갔던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서조운의 추측대로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정확하게는 너무 막연한 가정일 뿐이었다.

“어쨌거나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게 새외무림 세력의 침공이니까. 중원의 평화가 너무 길기도 했고. 그리고 걱정하면 정말 끝도 없어. 당장 마교만 하더라도 중원무림의 숙적이니까.”

“그렇죠.”

“그러니 미리미리 대비해야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론이네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누구도 너에게 중원을 지켜 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말에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 모습에 반호진이 코웃음을 흘렸다.

“네 재능은 분명 대단해. 나조차도 놀랄 정도니까. 하지만 그건 네 또래 중에서나 그렇지 중원 전체에서 보면 넌 아직 햇병아리야. 재능을 만개했다면 모를까 지금 너보다 강한 무인은 중원에 수두룩해.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늘 겸허한 자세로 수련해.”

“저도 알고 있어요.”

“점점 까먹는 것 같아서.”

“아니거든요!”

서조운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이내 퍼뜩 놀랐다.

반호진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조운은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알면 다행이고.”

“형님과 같이 다니는데 제가 어찌 자만하겠어요. 그럴 일은 없어요.”

“날 뛰어넘으면 그러겠다는 말이네?”

“어, 그땐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미안한데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반호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재능이 뛰어난 것과 만개하는 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천재라고 해서 벽이 찾아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만약 재능의 크기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면 세상은 천재들의 것이 되었을 터였다.

“미래는 모르는 거죠.”

“맞아. 근데 나는 나에 대해서는 잘 알아. 또 앞으로 네가 마주할 벽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틀렸다는 걸 나중에 제가 꼭 증명해 보일게요.”

“그래그래.”

다짐하듯 대답하는 서조운을 일별하며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북해의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다시 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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