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나한테는 안 통해. -01
지금은 몰락한 무가였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터였다.
그리고 그래서 더 좋았다.
잠재적인 가치가 그만큼 더 높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직 그의 사람은 아니지만 일 공자보다 먼저 선점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이득이었다.
“거기다 반 대협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금호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반호진의 행동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물론 틀릴 수도 있지만 금호연에게 중요한 건 가능성이었다.
“거두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가장 가까운 친구라도 되어야 해.”
금호연은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노력은 하되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의 그릇으로도 담을 수 없다면 옆에라도 두어야 했다.
“일단 소림사에만 머물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원하는 게 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거래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상인이었기에 거래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휘이이잉.
활짝 열린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가부좌를 틀고서 명상을 하는 반호진을 도와주려는 듯이 포근히 감싸 안았던 것이다.
“후우.”
반 시진의 짧은 명상을 끝내고 반호진은 긴 날숨과 함께 눈을 떴다.
금광신보를 비롯한 무공들이 몸에 완벽히 각인되자 반호진은 육체 단련보다는 명상에 집중했다.
육체적인 능력이 극한에 다다랐기에 굳이 더 이상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대신 명상을 통해 내공을 축적함과 동시에 무론을 곱씹고 곱씹었다.
“오늘은 이쯤 할까.”
정해 놓은 시간만 딱 명상 수련을 한 반호진은 자세를 풀었다.
지난 생과 다르게 반호진은 무공 수련에만 매진하지 않았다.
다짐한 대로 똑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여유를 가져서 정신적으로 안정되어서 그런지 수련에만 매진했을 때보다 성취가 더 빠른 듯한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나쁠 게 없지.”
천하사패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지만 반호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이번 삶도 중요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수련을 하되 휴식 시간도 확실하게 챙겼다.
또 마냥 노는 게 아니기도 했고.
“나 혼자서는 무리지만 함께라면 얘기가 다르지.”
천하사패의 수장들은 정말 강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중원무림의 안일함이었다.
당장 반호진만 하더라도 초월경에 오른 후 자만하며 수련에 집중하지 않았었다.
이 나이에 이 정도 경지라면 대단한 거라고 자화자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죽음으로 되돌아왔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해.”
설렁설렁 수련하는 듯해도 할 때는 제대로 했다.
바짝 집중해서 했기에 수련의 질로 따지자면 지난 생보다 훨씬 높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목표도 확실했고, 자극제도 있었다.
“공력이 승패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인 건 아니지만, 많아서 나쁠 건 없지.”
이미 지난 생의 경지는 모두 회복했다.
서가장에 머무는 시간이 반호진에게도 유익했던 것이다.
다만 내공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구해서 먹어 볼까. 그나저나 어디일까나.”
반호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나름 자연스럽게 마을의 풍경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태곡현은 특산품이 있지도, 상인들이나 표국들이 찾는 마을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외지인은 딱 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뭐, 어느 쪽이든 반응을 보이겠지. 나보다는 저쪽이 궁금할 테니.”
서가장의 동향을 살펴보는 시선을 일별하며 반호진은 관심을 껐다.
살의나 적개심이 없는 걸로 보아 최소한 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먼저 움직일 것이기에 반호진은 가부좌를 틀고 태평하게 늘어지며 기억에 남아 있는 영물이나 영초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
‘금가장의 이 공자와도 인연이 있을 줄이야.’
서가장의 정문을 향해 다가가던 면사여인의 눈동자에 놀람과 의문이 짙게 떠올랐다.
설마하니 금호연과도 인연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심지어 금호연이 먼저 서가장을, 정확하게는 반호진을 찾았다.
그것이 말해 주는 바는 명백했다.
‘절대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금호연은 금가장의 이 공자였다.
그리고 현재 일 공자와 함께 후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였다.
그런 이들은 보통 사람을 부르면 불렀지 먼저 찾아가지는 않았다.
한데도 금호연이 다른 일정을 미루거나 포기하면서 반호진을 찾았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뜻했다.
‘근데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지?’
사뿐사뿐 걸어가던 면사여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알기로 반호진과 금호연은 접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금호연은 마치 안면이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서가장을 찾았다고 했다.
‘혹시?’
그때 면사여인의 뇌리에 금호연의 최근 동향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금가장의 삼 공자가 포섭한 철왕의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내 면사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반호진이 천룡이라 불리는 남궁광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고 하나 철왕은 급이 달랐다.
후기지수와 비교하기에는 철왕이 살아온 세월과 증명한 무력이 너무나 크고 깊었다.
비록 무림십왕과 달리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나 그럼에도 낭왕들을 무시하는 무인들은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반호진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나 철왕 사무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반호진의 나이가 너무 젊었다.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불가능한 건 존재했다.
똑똑똑.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반호진 공자님을 만나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예?”
반호진을 안내했던 노복이 놀란 표정으로 정문을 열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반호진을 찾아오자 노복은 당황스러웠다.
반호진이 서가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도 찾아와서였다.
그러나 놀란 표정과 달리 노복은 날카로운 눈으로 면사여인과 일행을 빠르게 살펴봤다.
“하오문의 난희주라고 해요. 반호진 공자님을 찾아왔는데,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꼭 뵙고 싶어서요.”
“일단 전갈은 보내 보겠습니다.”
금가장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오문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명문세가에 비해 무력은 약할지 모르나 방대한 정보력은 개방에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노복은 해연히 놀라며 말을 조심했다.
비천한 이들이 모여 만든 게 하오문이지만 현재의 서가장은 그런 하오문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노복은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밝힌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밝히지 않으면? 만날 수 있을까?”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몰래 찾아가는 방법도 있고요.”
“그러다가 목이 베이면? 천룡보다 강한 검객의 일검을 막을 자신은 있어?”
“어…….”
심복이자 호위무사이며 친구인 여인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자객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분을 속이면 만날 수가 없어. 일면식도 없는 이가 무작정 찾아왔는데 만나 주겠어? 나 같아도 만나 주지 않아. 그리고 신분을 숨겼다는 걸 알면 반감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러니 처음부터 솔직하게 밝히는 게 나아. 또 하오문에서 찾아왔다면 궁금해서라도 만나 주지 않겠어?”
“확실히 그럴 것 같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별수 없고. 애초에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또 만났는데 생각보다 별로일 수도 있고요.”
“그럴 수도 있지.”
난희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건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 까탈스럽기는 해도 난폭하지는 않다고 알려진 반호진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기에 난희주는 그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끼이익.
대화를 하며 잠시 기다리는데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갔던 노복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반 공자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들어오시죠.”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안내만 할 뿐입니다. 감사 인사는 반 공자님께 하시지요.”
노복이 공손하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난희주를 비롯해서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따랐다.
“하오문의 사람이 왜 형님을 찾아왔을까요?”
“글쎄.”
“짐작 가는 게 없으세요?”
“없지. 나도 강호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무공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고자 반호진의 방을 찾았던 서조운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늘 서가장에만 박혀 있던 그에게 하오문은 전설처럼 회자되는 곳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하오문도들을 만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서조운은 아니었다.
얘기로만 전해 들었던 곳이기에 서조운은 눈을 반짝였다.
“역시 형님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금가장에 이어 하오문이라니.”
“금가장은 인연이 있었고. 금가장도 이번에 우연찮게 안면을 튼 거지만.”
“중요한 건 금가장의 이 공자가 여기까지 형님을 찾아왔다는 것이지요. 그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커요.”
“나도 알아.”
“근데 조금 그래요. 너무 욕심이 보인다고 할까요.”
서조운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솔직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서조운이 보기에는 욕심이 과했다.
금호연의 입장에서야 인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중요한 건 그릇이었다.
그의 그릇으로는 반호진은커녕 자신도 담을 수 없었다.
‘애초에 금가장은 상가이기도 하고.’
자세한 사정은 몰랐으나 서조운도 눈치가 있었다.
반호진이 금호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걸 알았기에 더더욱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을 생각부터 해야 하는데 금호연은 반호진을 날름 삼킬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인이 욕심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래도 너무 속보이잖아요. 저한테도 은근슬쩍 제안하더라고요. 본가를 지원해 주겠다는 식으로요. 딱 봐도 본가가 힘들 때 도와줘서 빚을 지워 놓겠다는 속셈이잖아요.”
“너무 미워하지 마. 그렇다고 너에게 피해를 끼친 건 없잖아?”
“어, 그렇긴 하네요.”
서조운이 눈을 껌뻑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나 서가장에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단지 좀 귀찮고 짜증 나게만 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 정도면 선은 정말 잘 지키는 편이고. 세상에는 자기 주제도 모르는 이들이 정말 많거든. 금 공자 정도면 정말 양호한 거야. 그러니까 얼굴을 보는 거고.”
“그런가요?”
“응. 딱 하루만 머물고 갔잖아. 바쁜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계산된 행동이야.”
“무섭네요.”
서조운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행동할 줄은 몰라서였다.
더불어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책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이 있다는 걸 서조운은 이번에 느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 금가장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형제와 골육상쟁을 벌이고 있는 이가 금 공자야. 지면 모든 걸 잃어버리는 싸움을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살 수는 없지. 더구나 삼 공자에게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살벌하네요.”
“서가장이 조금 특별한 경우지. 근데 너 잠은 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