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또 만났네요. -02
연무장 입구에서 여러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갈랐다.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가 반갑게 인사해 오자 서조운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찾아온 방문객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님을 데려오는 서이경의 표정은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반 대협을 만나서 너무 기쁜 나머지 제 소개를 잊었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금가장의 금호연이라고 합니다.”
“그, 금가장요?”
화려한 복장을 보고 범상치 않은 신분일 거라 짐작하기는 했지만 중원상계를 쥐락펴락하는 금가장의 사람일 줄은 몰랐기에 서조운은 정말 깜짝 놀랐다.
게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반호진과 아는 사이로 보였다.
“그렇습니다. 근데 소개는 안 해 주실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서가장의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저보다는 오히려 반 대협이 그런 말을 들으실 만하죠.”
“형님이 대단하신 건 저도 잘 알고 있죠.”
“형님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금호연이 순간 깜짝 놀랐다.
반호진과 형, 동생 하는 사이일 줄은 몰라서였다.
동시에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반호진 정도 되는 인물이 어째서 다 망한 무가인 서가장에 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예. 제 목숨을 구해 주셔서 형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궁금해지는데요.”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았습니다.”
반호진이 말을 끊었다.
굳이 서조운에 대해 금호연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어서였다.
나쁜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그 낌새를 서조운도 알아차렸다.
“그, 그러시군요.”
“근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일 때문에 근처를 지나가는데 반 대협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시다는 보고를 받아서, 인사를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아는데 인사도 없이 지나가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니고 구명지은을 입었지 않습니까. 또 혹시나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금가상단을 통해 들으셨군요.”
“예.”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태곡현에 자리 잡은 금가상단의 분타에 백년백섬의 부산물을 팔 때 금호연에게 받은 신분패를 이용했었다.
흥정을 잘 못하기에 무작정 팔면 제값을 못 받을 것 같아 신분패를 사용했는데, 그게 금호연에게 보고가 된 모양이었다.
“저에게 주신 신분패 덕분에 거래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오히려 저는 이렇게라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금호연이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반호진이 신분패를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헤어질 때 받은 느낌이 그래서였다.
한데 반호진은 의외로 예상보다 빨리 신분패를 사용했다.
‘분명 서가장과 연관이 있어.’
금호연이 반호진의 옆에서 땀을 닦고 있는 서조운을 힐끔거렸다.
모든 상황들이 서가장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어서였다.
거기다 보아하니 반호진이 무공까지 직접 봐주는 듯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날씨도 더우니 햇볕도 피할 겸 말이지요.”
대화가 길어지는 듯하자 서이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새삼 놀랍다는 표정으로 반호진과 금호연을 번갈아 바라봤다.
반호진이 금호연과 인연이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지요.”
“저도 좋습니다.”
반호진의 대답에 금호연도 흔쾌히 수락했다.
안 그래도 목 뒤에 꽂히는 뙤약볕이 뜨거웠던 참이었다.
그리고 반호진과 서가장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내려면 심도 깊은 대화가 필수였기에 금호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나이는 한참이나 어리지만 금호연은 금가장의 이 공자였다.
그것도 일 공자와 함께 후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서이경는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굽실거리지는 않았다.
비록 지금의 서가장은 몰락한 무가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이십 년 후의 서가장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까.’
서이경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막내인 서조운이라면 과거의 성세를 되찾는 걸 너머 그 이상을 이룰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금호연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별채에 들어온 금호연은 자리에 앉으며 호위대의 부대주를 호출했다.
그가 반호진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부대주에게 따로 시킨 게 있어서였다.
“알아봤어?”
“예.”
“순순히 말해 주지는 않았을 텐데?”
“의외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순박해서 그런지 친근하게 대하니 술술 말해 주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기름칠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건 당연한 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어.”
뇌물이라면 모를까 기름칠 정도는 금호연에게는 별거 아니었다.
그리고 궁한 자가 몸을 낮추는 것처럼 약간의 기름칠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몇 푼 아끼려다 시간도 날리고 돈도 날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기름칠을 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시골이라 그런지 다행히 많이 쓰지는 않았습니다.”
“말조심해. 반 대협께서 이곳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못 봤어?”
“죄, 죄송합니다.”
무미건조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금호연의 음성에 부대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개인적은 무력은 부대가 월등히 뛰어날지 모르나 중요한 건 금호연이 그의 고용주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손가락질 한 번에 그의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기에 부대주는 바짝 긴장했다.
“내가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시정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커. 우리는 손님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예.”
금호연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공은 쓸 만하나 그 외는 모든 게 부족했다.
아니, 반호진을 생각하면 무공도 그리 뛰어나다고 보기 힘들었다.
반호진은 약관의 나이에 낭인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낭왕을 때려잡았다.
‘정말 아름다웠지.’
절망의 한복판에서 봤음에도 금호연은 반호진의 일검에서 극에 이른 아름다움을 보았다.
분명 살검이건만 역설적이게도 금호연이 느낀 건 극한의 아름다움이었다.
검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동시에 검에 문외한이지만 반호진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느꼈다.
“…….”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부대주가 눈치껏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금호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보고해.”
“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반 대협과 함께 있던 삼 공자는 얼마 전까지 구양절맥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구양절맥?”
금호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양절맥을 앓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해 보여서였다.
“예. 그런데 그걸 반 대협께서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흐음.”
이어지는 부대주의 말에 금호연이 턱을 짚었다.
그런 그의 미간은 잔뜩 좁혀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백년백섬의 부산물이 동시에 떠올라서였다.
철왕 사무궁을 쓰러뜨리고 식사 대접을 할 때 반호진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근처에 왔다고 했었다.
‘그게 백년백섬이었군. 그렇다는 말은 처음부터 서조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뜻인데.’
구양절맥에 대해서는 금호연도 알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게 바로 구양절맥이었다.
치료가 쉬웠다면 절맥이라는 이름이 붙을 리 없었다.
하지만 치료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졌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부적인 재능의 인재가 되었다.
심지어 문무 양쪽에 다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금호연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지. 나도 똑같이 하면 될 일이다.’
금호연은 생각을 전환했다.
반호진이 했다면 그 역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절맥을 타고난 이가 많지는 않겠지만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찾아낸 다음 치료를 해 주면 자연스레 인재를 거둘 수 있을 터였다.
‘가능성은 충분해.’
철왕의 배신으로 죽음의 코앞까지 갔던 금호연은 절실하게 느꼈다.
자신에게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당장 지금도 그렇지만 금가장의 주인이 되어서도 인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인재가 아니라 아주 뛰어난 인재가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두고 싶지만…….’
현재 금호연이 가장 포섭하고 싶은 이는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무인이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의 실력도 엄청났다.
다만 문제는 아직 그의 그릇으로는 반호진을 담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반호진에게는 이제 천재 중의 천재라 할 수 있는 서조운이 있었다.
‘반 대협과 서 공자를 동시에 얻을 수만 있다면 일 공자를 제치는 건 아무것도 아닐 텐데.’
금호연이 입맛을 다셨다.
상상만 해도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후우.”
그러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유비는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었다.
천하의 유비도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건 없었다.
반호진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서조운이라는 인재에 대해 알게 된 걸 생각하면 여기까지 온 게 결코 시간낭비만은 아니었다.
‘일단은 친해져야 해. 그래야 뭐라도 할 수 있어.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해.’
삼 공자를 처리했지만 아직 금호연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소장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이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에 금호연으로서는 반호진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삼 공자의 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게 철왕의 죽음이었다.
철왕보다 강한 고수가 은밀하게 금호연을 지켜 준다고 생각했기에 다들 넙죽 엎드린 것인데, 그런 존재가 실제로는 없다는 게 밝혀지면 숙였던 이들이 딴마음을 먹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고수들을 영입하고 있지만 실력은 다 고만고만해. 거기다 믿을 수도 없지.’
순수하게 선의로 도와준 반호진과 달리 이번에 영입한 이들은 오로지 금호연의 돈만 보고 휘하에 들어왔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있다면 언제라도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중에 믿을 수 있는 이들도 분명 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알아내는 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주시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삼 공자가 힘들다면 이 공자와 일 공자를 통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두 사람뿐만 아니라 서가장주에게도 신경 써. 앞으로는 위상이 달라질 테니까.”
하늘이 내린 재능에 반호진과 같은 무림고수가 무공을 봐주고 있었다.
그러니 서조운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할 터였다.
심지어 내공도 엄청날 것이기에 얼마 안 가 서조운의 무명이 강호에 퍼질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해. 애매한 것들보다 이곳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예!”
서조운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여기까지 온 게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서조운을 이용해 반호진까지 끌어당길 수 있다면 금호연에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엇이든지 다 해야 했다.
“그래도 오길 잘했어. 아마 오지 않았다면 서조운에 대해서 알지 못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