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2화 (22/468)

제 9장. 서가장에서. -02

결정이 났는데 꾸물거릴 필요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해야 후유증도 최소화할 수 있기에 반호진은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 치료는 바로 하기 힘듭니다. 백년백섬의 내단이 있기는 하나 보조할 수 있는 약재가 더 있으면 좋습니다. 아마 장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요.”

“웬만한 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핵심이 되는 극음지기의 내단이 없어서 보관만 하고 있었지만요. 따로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구하겠습니다.”

“그것 말고도 삼 공자의 체력이 어느 정도 받쳐 주어야 합니다. 정신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건강한 육신에서 강인한 정신력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서이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어서였다.

그리고 급하다고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그르칠 수 있었다.

그러니 급할수록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서조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누워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침착하려 해도 마음이 급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서이경은 발 빠르게 막내아들의 방으로 반호진을 안내했다.

이윽고 지난 생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서조운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인사해 왔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으나 체내에서 제 마음대로 날뛰는 극양지기 때문에 서조운은 결국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환자에게 예의를 요구할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으니까요.”

“하하하. 환자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아프니까 환자가 맞지요. 우선 장주님께 말씀드렸던 걸 말해 드리겠습니다.”

짧은 인사 후 반호진은 서이경에게 말했던 걸 그대로 서조운에게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서조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이 백년백섬의 내단을 쥐여 주자 그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어?”

단순히 손에 쥔 것뿐인데도 서조운을 평생 동안 괴롭혔던 극양지기가 가라앉았다.

고통은 여전했으나 강도가 확연히 누그러진 느낌에 서조운은 신기한 눈으로 내단을 내려다봤다.

“효과가 있지요?”

“네! 완전 신기하네요. 아무리 독한 약을 먹어도 가라앉지 않던 극양지기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지금의 고통이 평생 갈 겁니다.”

지난 생에서 서조운의 미래를 봤었기에 반호진은 확신하듯 말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다 된 나이에 운 좋게 열양공을 익힌 은거고수와 만나 무공을 배운 서조운은 죽음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피했으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구양절맥을 완벽하게 치료하지 못했기에 평생 동안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

은거고수가 전수해 준 열양공은 분명 상당한 수준의 무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구양절맥의 극양지기를 확실하게 다스릴 정도는 아니었다.

억누르고 반 정도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전생의 서조운은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지.’

반쪽짜리 치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생의 서조운은 북해빙궁의 무인들에게 사신으로 군림했었다.

그가 뿌려 대는 극양지기엔 북해빙궁의 빙공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서조운의 극양지기는 구천문(九天門)의 독인들을 상대할 때도 효과적이었다.

“반 소협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십 년의 시간입니다.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니 좀 더 신중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삼 년 내에 죽을 테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삼 년과 이십 년의 시간을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축융신공까지 합치면 오히려 제가 죄송할 지경이고요.”

서조운이 한결 고통이 가신 표정으로 말했다.

맑고 깊은 눈으로 반호진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저당 잡혔음에도 서조운은 오히려 얼굴 가득 고마운 기색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몸 상태가 나아지는 대로 바로 치료하겠습니다.”

“계약서는 안 씁니까?”

“저라고 서가장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온 거 아닙니다.”

“허허허.”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이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받은 느낌이 싫지 않아서였다.

더욱이 반호진은 평범한 무인도 아니고 소림사 방장이자 무림십왕 중 한 명인 담현의 무기명제자였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정말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제는 말씀 편히 하세요. 저보다 형님이시잖아요.”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서조운이 웃으며 말했다.

언뜻 보면 처연해 보이는 미소였으나 두 눈빛만큼은 달랐다.

살고자 하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일단 체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자. 치료하는 동안 몸이 버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극양지기와 극음지기가 싸울 때 너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서 버텨야 해. 그러려면 체력은 필수야. 내가 도와주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로 말을 놓는 반호진의 모습에도 서조운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화하면서 이런 성격이란 걸 파악해서였다.

그리고 서조운에게는 오히려 이게 더 편했다.

더불어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살려 주신 목숨, 중원과 형님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똑똑하기에 서조운은 알고 있었다.

오대세가, 혹은 십대세가의 수준이 아닌 이상 서가장의 역량으로 자신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약을 먹으며 생을 포기하지 않은 건 부모님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모님과 형제의 모습에 차마 죽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살아온 삶이었다.

한데 정말 기적처럼 행운이 찾아왔다.

‘약속을 지키면서 효도하겠습니다.’

반호진을 향해 마음속으로 약속한 후 서조운은 몇 년 사이 더욱 비쩍 마른 부친을 바라봤다.

오로지 그를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아버지였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완치가 되면 지금까지 하지 못한 효도들을 하나씩 해 드릴 생각이었다.

반드시 완치하겠다는 의지 덕분인지 서조운의 치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홉 개의 대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양지기와 그걸 제압하기 위한 극음지기의 싸움으로 인해 고통이 어마어마할 텐데도 서조운은 신음 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쯤은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다는 듯이 담담한 신색으로 축융신공을 운기하며 서서히 승기를 잡아 갔다.

그걸 느낀 순간 반호진은 서조운의 명문혈에 포개 놓았던 두 손을 떼었다.

“후우!”

“끄, 끝난 겁니까?”

반호진이 손을 떼며 날숨을 내뱉자 방의 한쪽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서이경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라도 묻는 게 서조운에게 방해될까 싶어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아직은 아닙니다만 위험한 단계는 지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수습 단계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아마 곧 끝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르륵.

서이경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 뻔한 막내아들이 살아났기에 서이경은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간의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감사 인사는 저번에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지요. 그리고 우는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낫지 않겠습니다.”

“그, 그렇지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이던 서이경이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러나 반호진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서조운이 치료된 건 모두 다 반호진 덕분이었기에 서이경은 자신이 죽는 그날까지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한데 기뻐하는 서이경과 달리 반호진의 눈빛은 조금 무거웠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점점 더 편안해지는 서조운의 얼굴을 보며 반호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완치는 무사히 되었으나 다른 문제가 생겨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문제는 서조운의 육신이었다.

극양지기가 일으키는 고통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 누워 있었기에 서조운의 몸은 조금도 단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단련은커녕 살과 근육도 최소한만 붙어 있었다.

그렇기에 완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동안 육체 단련은 꿈도 못 꾸었다.

‘이건 내 실수야. 이럴 거라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반호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반호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변수일 뿐이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일정이 좀 더 늘어날 뿐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왔으니까.’

중간에 예기치 못한 만남들이 있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래서 반호진은 좋게 생각했다.

차라리 이참에 계획을 다시 한번 검토하기로 말이다.

세상일이라는 게 늘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기에 일희일비해 봤자 자기 자신만 힘들었다.

“저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저의 일이지 조운이는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슬슬 일어나려는 모양이네요.”

심상치 않은 반호진의 표정에 눈치를 살피던 서이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난생처음으로 보는 말간 얼굴의 서조운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여전히 뼈에 거죽만 붙어 있는 느낌이었으나 눈빛과 행동에는 힘이 넘쳤다.

특히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생생한 기운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서이경이 다시 한번 울컥했다.

“아버지!”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어.”

“아버지야말로 고생하셨어요. 이제 앞으로는 제가 보답하며 살게요.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와 어머니만 생각하세요.”

“크흑!”

이제 겨우 열일곱밖에 안 된 주제에 다 큰 어른인 척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서이경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늘 이랬었다.

아프다고 떼를 쓰고 울어야 할 때에도 서조운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혼자 참고 오히려 그와 엄마, 형들을 걱정했다.

“이제는 제가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알아요. 근데 저는 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형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아, 맞다.”

서이경은 황급히 물러났다.

이 모든 게 다 반호진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빙그레 웃으며 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이 은혜는 평생 갚겠습니다!”

“평생까지는 필요 없고, 딱 이십 년만 갚아. 그거면 난 충분하니까.”

“아닙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고작 이십 년이라니요. 제 목숨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당장 축융신공만 하더라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공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쪽짜리 무공이지. 극양지기를 타고나지 않은 이는 입문조차 할 수 없는 무공이니까. 그래서 사문에서 큰 문제 없이 필사해 올 수 있었던 거고.”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분명 축융신공은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극양지기가 없다면 익힐 수 없었고, 억지로 익히면 마공이 되었기에 어떻게 보면 조건부 신공이었다.

즉 서조운이기에 특별한 무공이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불구덩이에 들어가라는 명령도 망설이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넌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안 죽잖아.”

“하하하.”

“일단 몸부터 키우자. 너는 체력 단련보다도 근육 먼저 키워야 해.”

“알겠습니다!”

서조운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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