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1화 (21/468)

제 9장. 서가장에서. -01

반호진이 눈을 껌뻑였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니 아직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금호연이나 금가장의 삼 공자 측에서 비밀로 하고 있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 못 했네. 철왕을 잡은 게 알려져서 좋을지 나쁠지에 대해서.’

반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명성적인 부분에서는 알려지는 게 좋았다.

그의 개인적인 무명뿐만 아니라 소림사의 위상 역시 높아지니까.

다만 문제는 유명해질수록 반호진을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뭐, 그런 놈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긴 하지만.’

뛰어나고 잘난 이일수록 적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했다.

때문에 단순히 질시하는 거에 대해서는 반호진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나저나 왜 알려지지 않았지? 느낌상 바로 움직일 것 같았는데.’

반호진이 본 금호연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남자였다.

겉보기에는 유들유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칼이 있었다.

그런 성격은 무조건 당한 만큼 갚아 줘야 성미가 풀렸기에 분명 그냥 참고 지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데 철왕의 죽음에 대해서 서이경이 모르는 듯하자 반호진은 의문이 들었다.

“흠흠.”

“아, 죄송합니다. 남궁 공자의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떠오르는 게 있어서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하자 서이경이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신룡이라 불리는 이가 일면식도 없는 그를 이유도 없이 찾아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정확하게는 셋째 아드님을 찾아왔습니다.”

“셋째를요?”

서이경의 눈동자에 의문이 짙어졌다.

그가 알기로 셋째 아들은 장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서였다.

즉 셋째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서이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 공자가 구양절맥(九陽絶脈)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을 어떻게!”

서이경이 대경했다.

셋째 아들의 몸이 허약하다는 건 인근에 알려졌어도 구양절맥이라는 사실은 극비였다.

그런데 반호진이 알고 있자 서이경은 눈을 부릅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장주님의 지인분들께 들은 게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 의심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서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 피어난 의심은 완전히 걷어 내기 힘들다는 말처럼 반호진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서이경은 의심을 완전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사람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호진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제가 장주님을 찾아온 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탁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에 서이경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거기에 경계심 역시 짙어졌다.

구양절맥은 단명하지만 그 대신에 범인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재능들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혹시나 그걸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사기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뇌리에 떠올랐다.

신룡의 유명세를 이용해 자신이 반호진인 것처럼 행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스윽.

오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서이경의 머릿속에 휘몰아칠 때 반호진은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딱 봐도 단단히 밀봉한 것 같은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저는 삼 공자를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삼 공자의 나이가 열일곱이지요? 보통 절맥을 타고난 이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지요. 치료 시기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고통도 깊어지지만 후유증 역시 크게 남는다는 사실을요. 즉 치료가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제 아들을, 살릴 수 있다고요? 반 소협께서는 치, 치료가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예.”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 직접 보여 주는 게 훨씬 나았다.

괜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단단하게 밀봉해 두었던 백년백섬의 내단을 꺼내 보였다.

슈하아앗!

기름칠한 가죽 주머니를 열기 무섭게 뼈가 시리는 엄청난 한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인데도 탁자 위에 서리가 내렸다.

내단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탁자는 물론이고 실내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꿀꺽!

그걸 본 순간 서이경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까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극음지기를 머금은 내단임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어서였다.

천금이 있어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는 게 바로 내단과 영초였다.

하지만 힘겹게 구한다고 하더라도 극양지기를 품고 있으면 소용이 없었다.

구양절맥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건 상극의 기운인 극음지기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구할 수가 없는데 그토록 찾아다니던 극음지기를 품은 내단이 탁자에 있자 서이경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년백섬의 내단입니다. 근데 보시다시피 백 년 이상 묵은 녀석입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백 년 가까이 묵은 녀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이 귀한 걸 어떻게?”

“어떻게 보면 하늘이 아직 삼 공자를 데려가지 않겠다는 뜻일지도 모르지요.”

“제게, 부탁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요?”

잠시 넋을 잃었던 서이경이 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흥분해서는 될 일도 안 되었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서 한결 차분해진 눈빛과 표정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중간중간 내단을 힐끔거렸다.

“삼 공자의 재능을 중원을 위해 사용했으면 합니다.”

“……예?”

서이경이 조금 늦게 반문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정확하게는 너무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서이경은 미간을 좁혔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삼 공자가 구양절맥을 치료한다면 그의 능력을 중원무림을 위해 사용해 주었으면 하는 게 제 부탁입니다.”

“잠시만요. 반 소협이나 소림사를 위해서가 아니라요?”

“예. 이건 엄연히 제가 구한 겁니다. 저는 소림사의 속가제자이지만 이번 일과는 별개입니다.”

“제가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렇습니다만. 반 소협께서 제 아들을 거두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들리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한동안은 저와 함께 있었으면 합니다. 나이가 열일곱 살인 만큼 백년백섬만으로는 완벽하게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완치를 위해 제가 한 가지를 더 준비했습니다.”

툭.

반호진이 이번에는 봇짐을 열었다.

그러고는 장경각에서 필사해 온 무공비급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이, 이건……!”

한눈에 봐도 필사본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새 책이었으나 서이경에게 중요한 건 무공서의 제목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서이경은 백년백섬의 내단을 봤을 때보다 더욱 크게 놀랐다.

“신공이지만 마공이라 불리기도 하는 무공인 축융신공(祝融神功)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원본은 소림사 장경각에 있고 이건 사본입니다. 백년백섬으로 완전히 억누르지 못하는 극양지기는 축융신공으로 다스릴 생각입니다. 열양공 중에서는 최상위급이라 할 수 있는 게 축융신공이니 극양지기를 다스리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대, 대단하십니다.”

그야말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준비에 서이경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의 서이경에게는 놀랄 시간도 없었다.

그의 셋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홉 개의 대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극양지기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백년백섬의 내단과 축융신공.’

서이경의 시선이 탁자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물건에 차례대로 닿았다.

하나하나가 돈만으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두 개를 본 순간부터 서이경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탁자 위에 놓인 저 두 개를 얻지 못한다면 그의 막내아들은 앞으로 삼 년을 채 살지 못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이지.’

백년백섬까지는 설마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축융신공을 보는 순간 서이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소림사의 장경각이 아니고서는 축융신공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중원의 평화를 위해 마공과 사공의 무공비급을 따로 보관하는 게 소림사였던 만큼 신뢰도는 확실했다.

“아, 한 가지를 빼먹었습니다. 기한이 있습니다. 평생을 중원 평화를 위해 힘써 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부탁이죠. 딱 이십 년. 백년백섬을 먹은 순간부터 딱 이십 년만 약속을 지키면 됩니다.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살아도 됩니다.”

“이십 년 후라. 어제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도 못 한 세월이네요.”

서이경이 미약하게 웃었다.

삼 년 후를 장담하지 못하던 그에게 이십 년은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백년백섬과 축융신공이라면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조건이 너무 싼 느낌이었다.

“이 두 개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일 갑자 이상도 살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바라시는 건 그거 한 가지뿐입니까?”

“예. 다른 건 없습니다. 아, 굳이 한 가지 꼽자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 정도 되겠네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서이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었으나 그렇다고 자존심과 자긍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몰락했기에 더더욱 그것에 목을 매는 편이었다.

남은 건 자존심과 자긍심 밖에 없었으니까.

“오히려 조건이 너무 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말을 잇는 서이경의 눈을 마주 보며 반호진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천재 중의 천재라 할 수 있는 삼 공자의 미래를 싼 가격으로 후려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라는 게 살아 있을 때나 의미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삼 공자가 지닌 능력을 생각하면 싸게 부려 먹는 게 맞았다.

하나 그렇기에 반호진의 대계에는 삼 공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막내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겠지만, 저는 좋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니까요. 삼 년도 채 살지 못할 아들이 이십 년 넘게 살 수 있다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오히려 저와 막내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호진을 향해 깊게 읍을 했다.

조건을 걸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의 셋째 아들을 살려 주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서이경은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하하. 감사 인사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 어쨌거나 삼 공자를 제가 살리는 건 맞으니까요. 그런데 거동이 힘든 상태입니까?”

“하루에 한 시진 정도는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단 뜻이군요. 고통이 심해지는 주기도 짧아지는 중일 테고요.”

“그렇습니다. 일단 지금 만나 보시겠습니까?”

“예.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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