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운명을 바꾸는 자. -03
짙은 안개로 인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혹은 산토끼일 수도 있었고.
그러나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잘못 본 것일지라도 비슷한 게 보인 이상 무조건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스스슥!
반호진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희끄무레한 게 순간 펄쩍 뛰었다.
다른 두꺼비보다 두 배는 족히 큰 두꺼비가 계곡물로 들어가려는 듯이 폴짝폴짝 뛰자 반호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가 그토록 찾았던 백년백섬(百年白蟾)이 모습을 드러내서였다.
“찾았다!”
여느 두꺼비와는 확연히 다른 색깔과 덩치에 반호진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거의 산삼을 발견한 심정으로 말이다.
이름은 백년백섬이지만 반호진이 들은 바에 의하면 오백 년은 족히 묵었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금광신보를 극성으로 펼치며 하얀 두꺼비에게 달려갔다.
스슥!
하지만 백년백섬의 속도도 만만치 않았다.
괜히 오래 묵은 영물이 아니라는 듯이 반호진이 달려오는 것을 느끼자 더욱 빠르게 도주했다.
마치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오직 계곡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딜!”
반호진만큼이나 백년백섬 역시 간절하게 도망쳤다.
인간에게 잡히는 순간 미래는 보지 않아도 뻔했기에 백년백섬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도주에 성공할 수 있었기에 백년백섬은 전력질주했다.
그러나 간절한 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첨벙!
금광신보를 극성으로 펼쳤음에도 백년백섬이 결국 먼저 물에 닿았다.
거리가 더 가까운 것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백년백섬의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곳의 지형이 익숙하기도 했고.
자신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라서 그런지 백년백섬은 물에 닿기 무섭게 빠르게 잠수했다.
“흐읍!”
순식간에 물속으로 들어가는 백년백섬이었으나 반호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놓치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를 한 번 봤기에 백년백섬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질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무조건 이번에 끝장을 봐야 했기에 반호진은 벼락같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푸슉!
한줄기 섬광처럼 뿌려진 단검은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 수면을 꿰뚫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진기를 실었기에 무리 없이 수면을 관통해서 백년백섬을 향해 쇄도했다.
풍덩!
그리고 반호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단검을 던진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진기를 실었다고 하나 물속이니만큼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물속은 백년백섬에게 유리한 환경이었기에 반호진은 단검이 수면을 꿰뚫은 것과 거의 동시에 계곡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역시.’
따로 수공을 익힌 건 아니지만 어렸을 적에 강가에서 물놀이를 제법 즐겼기에 물속에서 눈을 뜨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과 달리 계곡이 깊었는데 단검에 등이 살짝 긁힌 백년백섬이 바닥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는 걸 본 반호진은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물속에서 자세를 잡았다.
단검처럼 던지려는 게 아니라 휘두를 것처럼 자세를 잡고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쑤아아앗!
강기를 머금은 일검이 계곡물을 갈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느릿한 일검에 계곡물이 갈라지며 바닥이 훤히 드러났던 것이다.
동시에 열심히 헤엄을 치던 백년백섬이 순간 균형을 잃고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푹!
난생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백년백섬이 어리둥절해하는 그 순간을 반호진은 놓치지 않았다.
한줄기 지강을 날려 백년백섬의 머리를 꿰뚫었다.
지풍은 막아 내거나 튕겨 낼 여지가 있었기에 반호진은 가뜩이나 없는 내공을 모조리 끌어모아서 지강을 날리고는 그대로 계곡의 바닥을 박찼다.
계곡물을 갈랐다고 하나 이건 말 그대로 한순간일 뿐이었기에 피를 흘리는 백년백섬을 잽싸게 낚아채고는 그대로 어기충소의 수법으로 솟구쳤다.
푸르르르.
간발의 차이로 물에 빠지는 걸 면한 반호진은 그대로 수면 위에 착지했다.
절정에 달한 등평도수로 편하게 뭍으로 걸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몸은 홀딱 젖은 후였다.
“후후후.”
물에 빠진 생쥐마냥 온몸이 젖었음에도 반호진은 웃었다.
이곳에서 얻고자 했던 백년백섬을 얻어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웃으며 내공을 이용해 옷과 몸의 수분을 증발시키고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일단은 안전한 장소로 가서 해체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가장 필요한 건 백년백섬의 내단이지만 그 외에 부산물도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사천당가를 비롯해서 의가(醫家)나 의방이 사려고 할 수도 있기에 챙길 수 있는 건 알뜰히 챙길 생각이었다.
쉬이익!
목적을 달성한 반호진은 곧바로 계곡을 떠났다.
내단이라는 게 신선도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된 것보다는 갓 잡은 게 더 좋을 건 분명했다.
그리고 이 내단이 필요한 이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일 것이기에 가급적이면 서두르는 게 좋았다.
***
산서성 태곡현(太谷縣)에는 서가장이라는 아주 오래된 무가(武家)가 있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세 역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 고수가 나오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태곡현과 인근 마을의 사람들만 아는 무가가 되었다.
그곳에 반호진이 도착했다.
“호오.”
고풍스럽다거나 예스럽다기보다는 낡고 허름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 정문 앞에 선 반호진이 눈을 빛냈다.
정문 위에 걸려 있는 현판의 세 글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아서였다.
붓으로 쓴 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음각되어 있었는데 반호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서가장이라 쓴 세 글자를 검으로 새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단하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 글자에 담긴 애정과 의지는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반호진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초대 서가장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였는지를 말이다.
적어도 검에 한해서는 지금 천하십대고수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듯했다.
“다만 후대는 그걸 모르는 듯하지만.”
과거의 영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추억과 아픔만이 남아 있었다.
그걸 반호진은 생생히 느끼며 정문을 두드렸다.
예전이었다면 문지기나 위사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 반호진의 계획대로 된다면 서가장은 다시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것도 가능했다.
“누구십니까?”
끼이익.
문 너머에서 들리는 늙수그레한 음성에 반호진은 다시 한번 서가장의 현재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무가임에도 고수의 기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런 기색을 감추고서 정문 밖으로 나오는 노인에게 정중히 합장을 했다.
“소림사의 속가제자인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장주님과 삼 공자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저희 장주님을 말씀이십니까?”
소림사라는 말에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예. 약속을 하지는 못했으나 장주님과 삼 공자에게 도움이 될 제안을 하나 하러 왔습니다. 약속하건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머리를 밀지도, 그렇다고 승복이나 가사를 입은 것도 아니지만 합장과 함께 반호진이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기에 노인은 일단 안으로 들였다.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기보다는 사기를 쳐서 가져갈 게 없었기에 들인 것이었다.
혼자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고.
“감사합니다.”
“바로 만나기는 힘들 겁니다. 그러니 객당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다 무너져 가는 무가라고 하나 수장은 수장이었다.
힘겹게나마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는 건 가문을 유지할 정도의 힘과 권세가 있다는 걸 뜻했기에 반호진은 얌전히 노인을 따라 이동했다.
잠시 후 낡은 목조건물에 도착한 반호진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일단 기다려 볼까.”
하인이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며 반호진은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신분을 밝혔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었기에 나름 확인 절차를 거치겠지만 그게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을 터였다.
현재 나름 강호에 명성이 퍼지기도 했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림이란 이름이겠지.’
강호에 서서히 무명이 알려지고 있다고 하나 그게 서가장까지 퍼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반호진은 사문의 명성을 믿었다.
소림사의 이름이라면 연고가 없어도 한 번쯤은 만나려고 할 게 분명했으니까.
후르릅.
일단 서가장주가 장원에 있다는 사실에 반호진은 안도했다.
지금쯤 한창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인데 다행히 시기를 잘 맞춘 듯했다.
그래서 반호진은 조급해하지 않고 차를 홀짝였다.
똑똑똑.
“반 소협. 장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지요.”
“예, 그럼.”
문 너머에서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반호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무림인들 중에 소림사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하나 이렇게 빨리 그를 찾아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일찍 만나서 나쁠 건 없기에 반호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서가장주를 향해 합장을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림사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서이경입니다.”
노인이 열어 주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는 서이경과 인사를 나누던 반호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이경은 불혹 안팎으로 보였는데 안색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아니면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지 얼굴에 혈색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이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반호진에게 자리를 권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하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영광입니다. 소림사의 신룡께서 본 장을 찾아 주실 줄이야. 처음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신룡요?”
“아, 아직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천룡과의 비무 이후 반 소협을 세간에서 신룡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룡이 아니라 오룡(五龍)이라 불러야 한다고 하면서요.”
서이경의 설명에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신이라 불렸던 자신이 신룡이 되었다고 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불편한 기색이 전해졌는지 서이경이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언짢아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신룡이라는 별호도 처음 듣고요.”
“그렇습니까?”
“예. 경비를 아끼려고 주로 노숙을 하다 보니 마을에 잘 들르지 않았습니다. 따로 아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고요.”
“허어.”
서이경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소림사의 제자라고 하나 반호진은 무승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출신이 무가(武家)가 아닌 평범한 가문이라고 하나 그래도 소림사 방장의 무기명제자였다.
그런데 경비를 아끼려고 노숙을 주로 했다고 하자 서이경은 믿기지가 않았다.
‘신룡이라.’
한편 반호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작 후기지수들과 한 묶음으로 묶였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나이대는 후기지수일지 몰라도 실력은 후기지수의 범주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는 게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밝히는 것도 웃겼다.
‘아, 철왕을 잡은 게 안 알려져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