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02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반호진은 사무궁이 펼친 회심의 일격을 왼손으로 가볍게 받아 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 뿐만 아니라 진짜 뾰족한 강기가 무릎에 돋아나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수강을 일으켜 손쉽게 막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붙잡은 상태에서 검을 크게 휘저었다.
서걱. 슥.
미약한 파육음과 함께 사무궁의 두 다리가 절단됐다.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잘려 나가자 사무궁이 입을 쩍 벌렸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한 것이었다.
“허어!”
“……!”
그 광경에 뒤에서 지켜보던 금호연은 물론이고 호위무사들이 대경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낭인들의 정점으로 군림하던 사무궁이 새파랗게 어린 후기지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호위무사들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헛것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끄으으으……!”
그런 그들을 현실로 데려와 준 건 바로 사무궁이었다.
오른팔과 두 다리를 잃고, 왼팔도 팔꿈치까지 갈라진 사무궁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살아 있으나 결코 산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무궁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푸욱!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반호진은 망설임 없이 사무궁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마무리를 확실하게 지은 것이었다.
“네, 네놈을 절대…….”
“응. 그럴 일 없어.”
죽어 가는 사무궁이 원독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죽일 듯이 노려봤으나 반호진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죽음을 겪어 본 그에게 사무궁의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저, 저기…….”
벌레를 죽이듯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궁을 처리한 반호진은 검을 털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어 털어 내듯이 말이다.
그때 금호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호진이 몸을 돌리자 금호연은 진심을 담아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무림의 방식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금가장의 이 공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가, 감사합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금호연의 뒤로 호위무사들이 차례대로 소리치며 반호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나같이 죽다 살아난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과례는 비례라고 했으니 인사는 이 정도만 받겠습니다. 사무궁과는 악연이 있기도 했고요.”
정확하게는 전생의 악연이었으나 중요한 건 반호진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무궁은 죽어 마땅한 놈이었고.
“아, 저는 금가장의 금호연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대협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까요?”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보다 어려 보였으나 금호연은 존경심을 가득 담아 예의를 갖추었다.
구명지은을 입기도 했지만 강호에서는 무력이 곧 신분이자 서열이었다.
그렇기에 금호연은 자신을 낮추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소림사의 반호진이라고 합니다.”
“역시 소림사로군요. 반 대협 같은 분이 계시다니. 혹시 속가제자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금호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 기색을 창졸간에 숨겼다.
“대단하시네요. 속가제자이신데도 철왕을 쓰러뜨릴 정도라니.”
“운이 좋았습니다.”
반호진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사무궁의 무공을 모르고 있었다면, 사무궁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쓰러뜨리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경지는 높지만 내공이 부족하기에 아직 진실한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 게 현재의 반호진이었다.
‘겸손하기까지!’
그런데 그 모습이 금호연에게는 더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철왕씩이나 되는 무인을 쓰러뜨렸음에도 전혀 기고만장하지 않는다는 게 금호연은 신기했다.
보통 저 정도 나이대에는 거들먹거리거나 거만을 떨기 마련인데 반호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별거 아니라는 태도였다.
꿀꺽!
그 모습에 금호연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저는 물론이고 호위무사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그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식사라도 한 끼 제대로 대접하고 싶은데 근처 마을까지만이라도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이대로 반 대협을 보내면 저는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금호연이 깍듯한 자세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보답할 기회를 달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계산된 것임을 말이다.
‘그래. 이래야 금가장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자라고 할 수 있지.’
분명 금호연은 진심이었다.
다만 보답할 기회도 얻으면서 자신의 안전도 같이 챙기려는 것뿐이었다.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잔머리는 반호진에게 애교였다.
‘후계 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빚을 지워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금호연만큼이나 반호진의 머리도 빠르게 회전했다.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백도무림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걸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낀 게 반호진이었다.
하지만 중원이, 전 강호가 힘을 합친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염려가 되니 근처 마을까지만 함께하겠습니다. 일을 저질렀으니 책임을 지는 게 맞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금호연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나이답지 않게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반호진이 말한 의미를 그는 단번에 이해했다.
근데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 공자님, 철왕의 수급을 챙기겠습니다.”
“그렇게 해.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또 따로 쓸 일도 있고.”
“예.”
대화가 어느 정도 정리된 듯하자 호위대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두 눈에는 흠모의 빛을 가득 담아 반호진을 힐끔거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금호연은 그걸 봤음에도 나무라지 않았다.
반호진의 무위가 그만큼 엄청나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주변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이미 근처 마을까지 함께 가기로 했기에 반호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움직일 수는 없어도 기감은 얼마든지 펼칠 수 있기에 주위를 탐색했다.
스스슥!
그사이 호위무사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웃고 떠들었던 동료가 지금은 차갑게 식은 시체가 되어 있자 몇몇 호위무사들이 훌쩍였다.
죽음에 가깝다고 해서 익숙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며 넋을 기렸다.
호위대원들의 시선을 수습한 금호연은 곧바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반호진에게 말한 대로 제대로 된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가장 큰 객잔의 방을 잡고 최고급 저녁 식사를 주문한 금호연은 쉬지 않고 곧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삼 공자의 동태는?”
“아직 철왕의 죽음에 대해서 모르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하루 정도는 시간이 있을 거다.”
동생이지만 금호연은 이름 대신 삼 공자라고 칭했다.
애초에 그는 삼 공자를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같을지 몰라도 이복동생이기에 피의 반은 남이었다.
그리고 이번 공격으로 금호연은 삼 공자를 완벽한 적으로 인식했다.
“철왕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아마 충격이 클 겁니다.”
“그렇겠지. 나조차도 철왕이 배신한 순간 죽음을 떠올렸으니까.”
호위대주의 말에 금호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금호연은 아찔했다.
만약 반호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철왕 사무궁의 손에 죽고 금가장의 후계자는 일 공자와 삼 공자 중 한 명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설마하니 나부터 노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 삼파전이지 현재 후계자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건 누가 뭐래도 일 공자였다.
그 뒤를 그와 삼 공자가 열심히 추격하는 추세였고.
즉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는 일 공자부터 약화시키는 게 먼저였는데 삼 공자는 의외로 그를 노렸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금호연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사실 그는 삼 공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지닌 세력이 가장 약했을뿐더러 판도를 뒤집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장 앞서 있는 일 공자부터 끌어내려야 한다는 걸 삼 공자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삼 공자는 일 공자가 아닌 그를 노렸다.
‘나를 잡아먹고 일 공자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겠지. 내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해서. 하지만 생각이 짧아.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나의 지지 기반이 자기 쪽으로만 붙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금호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이 짧아도 이렇게 짧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나 그렇기에 그를 노린 것일 수도 있었다.
판을 크게 보지 못해서.
“철왕의 죽음을 우리가 먼저 알려. 아마 셋째는 당연히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할 거야. 그런데 내가 건재하면 분명 흔들릴 거야. 아마 철왕을 포섭하는 데 자금도 많이 썼을 테고. 그러니 우리는 이 틈을 놓치지 말고 판을 더욱 크게 흔들어야 해. 셋째가 흔들리도록. 더불어 셋째를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도. 우리는 그 틈을 파고들어 사람들을 빼앗아 온다. 어차피 상인은 더 큰 이익을 주는 쪽으로 오게 되어 있어. 철왕을 잡았다는 걸 알게 되면 티는 안 내도 많은 이들이 흔들릴 거다.”
“삼 공자의 세력을 흡수하실 생각이시군요.”
“먼저 때렸으니 이건 정당방위야. 그리고 때릴 생각을 했으면 맞을 각오도 당연히 해야지.”
“맞습니다.”
호위대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 보면 무인들의 싸움만큼이나 치열하고 처절한 게 상인들의 전쟁이었다.
그걸 이 바닥에 오면서 호위대주는 절절하게 느꼈다.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도.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갚아 주자고. 원금만 갚는 건 정이 없잖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위대주가 씨익 웃었다.
이번 전쟁은 금호연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만약 반호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금호연과 마찬가지로 야산에서 생을 마감했을 게 분명했기에 호위대주 역시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이었다.
“그것보다 반 대협에 대한 건 알아봤어?”
“예. 소림사의 제자가 맞습니다. 속가제자이고 사사한 사람이 방장입니다.”
“허어. 아니지. 저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을 가지려면 사부가 당연히 방장 정도는 되어야지.”
놀라던 금호연이 이내 납득했다.
방장에게 사사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호위대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이는 올해 스무 살이라고 합니다. 익히고 있는 무공은 놀랍게도 달마삼검으로 입문할 당시에도 천재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불문에 인연이 없는데 오직 재능 하나만 보고 담현 대사께서 직접 데려왔다고 합니다.”
“스무 살에 달마삼검?”
금호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마삼검이라 함은 농담 조금 보태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무공이었다.
더욱이 진산제자도 아닌 속가제자에 달마삼검과 같은 무공을 전수했다는 건 반호진의 재능이 하늘에 닿았다는 걸 뜻했다.
그렇다 보니 금호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아보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는데 남궁세가의 소가주와의 대결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