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세상으로. -02
동정벽라춘이 비싸다지만 못 마셔 보지는 않았다.
전쟁 중이라고 해서 사치품을 구할 수 없는 건 아니었기에 지난 생에서 동정벽라춘은 물론이고 서호용정차와 군산은침도 마셔 봤었다.
개인적으로 반호진의 입맛에는 군산은침이 제일 맞았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사부님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반호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술술 풀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으나 그래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는 중이었다.
일정 단계가 되면 반호진이 뿌린 씨앗들이 발아해서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담현에 관한 것만 지지부진했다.
“내 실력을 드러내면 오히려 더 내려놓을 게 분명할 거란 말이지.”
무욕(無欲)이라는 말처럼 담현은 무공에 대해서 큰 욕심이 없었다.
중원수호라는 네 글자를 가슴에 담고는 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만큼 지금 그의 무경을 드러낸다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소림사의 운영에만 집중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평화도 중요하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부님께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다시는 담현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호진이 엄청나게 강해지거나 담현이 지난 생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했다.
가장 좋은 건 두 개를 다 이루는 것이고.
그러나 문제는 담현에게 향상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깨달음을 얻는 데 무욕이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욕심이 있어야 할 때야.”
평화로운 시기라면 굳이 반호진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천하사패가 중원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미래를 알기에 반호진으로서는 느긋하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언뜻 보기에 길지만 전쟁을 생각하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고수가 되는 건 소설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반호진은 태평하게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법무가 지난 생과 달리 빠르게 강해지고 있고, 이대제자들의 성장세도 가파르다는 것이었다.
“무공들이 어느 정도 숙달이 되면 강호에도 나가 봐야 하는데.”
개방이 새외무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면 다른 무림세가나 명문대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렇다면 반호진이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알아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지만 적어도 직접 다녀온다면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을 것이었다.
또 확인해 볼 것도 있었고.
“근데 나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원래 내 계획은 좀 즐기면서 사는 건데.”
고민을 하던 반호진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혼자만 걱정 속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듣는 순간 그를 미친놈 취급할 테니까.
“이왕 보내 줄 거면 다른 녀석도 보내 주지. 내 몫까지 다 할 수 있는 녀석으로. 그럼 난 진짜 마음 편히 놀았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처음에는 기회라는 생각에 기뻤지만 지금은 달랐다.
개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모든 걸 혼자 준비하고 계획하며 실행해야 했기에 반호진은 한숨만 나왔다.
“얼른 쑥쑥 커 주길 바랄 수밖에 없나.”
세상의 근심을 전부 다 끌어안은 표정으로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담현에 대한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
“사백님, 사백님!”
“어어.”
두 번 불렀기에 반호진은 마찬가지로 두 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게 건성으로 느껴졌는지 정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 대충 대답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두 번 불렀잖아.”
“헐.”
정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정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새벽이라니요. 해가 저렇게 떠 있는데요. 정확히는 아침이죠.”
“그거나 저거나.”
“근데 사실이에요?”
“뭐가?”
이른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 정현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누가 봐도 원하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강호로 나가신다면서요!”
“그건 어디서 들었어?”
“지금 경내에 있는 제자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근데 왜 네가 신나 해?”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정현이 두 손을 맞잡았다.
늘 하는 합장이 아니라 간절히 부탁하듯이 두 손을 맞잡고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올려다봤다.
“너를?”
“네!”
“왜?”
“사백님을 시중 들 사람이 한 명 필요하지 않을까요?”
“필요 없는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정현이 입을 쩍 벌렸다.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라서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기에 정현이 받은 충격은 컸다.
“저, 정말요?”
“응. 일정이 꽤 길기도 하고. 그리고 난 혼자가 편해. 너는 아직 갈 길이 멀고.”
“무, 무공을 봐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정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설마하니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냐고 따지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너를 꼭 데려갈 이유는 없지. 복귀해서 봐줘도 되니까. 아마 내가 시킨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걸?”
“너무하세요.”
정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결정을 번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너한테 지금의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니 딴생각하지 말고 수련에만 전념해. 갈 길이 구만리니까.”
“저도 경험을 쌓아야 하지 않아요?”
“나중에.”
반호진은 어림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전 경험이 반드시 필요했다.
괜히 강호의 격언 중에 아이와 노인, 여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눈먼 칼에 맞으면 죽는 건 똑같았다.
“그럼 나중에 꼭 데려가 주세요!”
“유람을 할 수 있을 때가 올지 모르겠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 하산은 유람 아닌가요?”
“유람은 무슨. 나 일하러 가는 건데.”
“일요? 그럼 표국에 들어가시는 거예요?”
정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말을 하고 있어서였다.
“나 아직 일자리 찾을 때 아니다. 돈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이번 외출은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나가는 거야.”
“유람 겸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경험은 충분해.”
“에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알기로 반호진은 이번이 첫 강호행이었다.
그런 만큼 경험이 충분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란다.”
“그래도 하산은 처음이신데요.”
“사람마다 비밀은 있는 법이지.”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가능했다.
실제로 반호진은 죽음까지도 경험한 사람이었다.
“흠흠!”
아침부터 정신 사납게 떠드는 정현을 상대해 주고 있는데 앞마당의 입구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소림사 내원에서는 보기 힘든 황의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슬쩍 앞마당으로 들어왔다.
“방 사형?”
“하하, 다행히 날 기억하고 있구나.”
“제가 어렸을 적에는 자주 놀러 오셨잖아요.”
“놀러왔다기보다는 끌려왔지. 난 일하러 온 거였으니까.”
말끔하게 생긴 삼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부터 반호진의 재능이 특별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그때는 동생이라는 인상이 강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반호진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소년에서 남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력도 과거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긴 하죠.”
“안녕하세요. 이대제자 정현입니다.”
“만나서 반갑구나.”
눈치를 살피던 정현이 슬그머니 합장을 했다.
일대제자 배분의 속가제자로 보였기에 먼저 인사한 것이었다.
“어,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꾸나.”
“네. 그럼 편히 대화 나누세요.”
정현은 눈치껏 물러났다.
더 있어 봤자 반호진이 데려갈 것 같지 않았기에 정현은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의 마음가짐으로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잠시 대화 가능할까?”
“네.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장필상과 달리 방일석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막 친하지는 않아도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반호진은 웃으며 차를 권했다.
그런데 의외로 방일석이 거절했다.
“바쁘신 모양이네요.”
“바쁘기보다는 네 시간을 오래 뺏고 싶지 않아서지. 하하하.”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실 줄이야.”
“이번에 하산한다고 들었어. 혹시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거야?”
방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에 있는 반호진의 성격을 알기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 내려가는 겁니다.”
“기간은 얼마나 잡고 있어?”
“짧으면 반년, 길면 일 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빠를 수도 있고요.”
진짜 갈 길이 구만리이기에 반년도 짧게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그 안에 돌아올 수도 있었다.
이번에 금광신보를 완숙의 경지까지 끌어 올릴 생각이기도 했고.
“우리 청림표국에서 일해 보지 않을래? 급여는 두둑이 챙겨 줄 수 있는데.”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정이 아니라서요.”
“그래. 만약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말해. 혹은 도움이 필요하거나. 우리는 다 같은 소림의 제자잖아.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알겠습니다.”
매정할 정도로 딱 잘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일석의 표정은 담담했다.
여러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은 맞지만.
그리고 어정쩡한 대답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게 방일석에게도 좋았다.
“근데 무엇 때문에 나가는 거야?”
“중원의 평화를 위해서요.”
“하하하, 농담이 늘었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방일석이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반호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진지했다.
어쩌면 이번 일정으로 중원무림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다.
“겸사겸사 경험도 쌓고요.”
“경험 좋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니까.”
“이왕이면 안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고생하지 않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요.”
“역시 생각하는 게 별나다니까.”
방일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른이 되었어도 성격은 여전한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부럽기도 했다.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게.
***
반호진의 신형이 야산을 갈랐다.
숭산에서 내려온 반호진은 처음부터 목표를 가지고 이곳을 찾았다.
여기에서 얻을 게 있어서였다.
“분명 이곳에서 발견했다고 했는데.”
길도 안 난 곳을 가로지르던 반호진은 이내 계곡에 도착했다.
이름 없는 계곡이었으나 풍경은 그가 들었던 것과 딱 맞아떨어졌다.
다만 반호진이 찾는 게 보이지 않았다.
“쉽게 발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투명하게 맑은 계곡물을 내려다보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아서 그런지 마음도 청량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도움이 안 되는 놈이 얻을 거 내가 먼저 차지해도 상관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