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세상으로. -01
“아, 들어와!”
“무슨 일이야? 손님들이 와 계시고.”
방의 주인인 선우방의 대답에 문이 열리며 반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접객실로 들어온 반호진이 살짝 놀랐다.
손님이 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제갈혜정과 모용희수일 줄은 몰라서였다.
특히 모용희수의 등장이 반호진은 놀라웠다.
“안녕하세요, 반 공자님! 제갈세가의 제갈혜정이라고 해요!”
“처음 뵈어요. 모용세가의 모용희수예요.”
동공이 살짝 커지는 반호진을 향해 제갈혜정과 모용희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했다.
두 사람 다 이 자리를 고대했었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선우방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너무나 달라서였다.
‘역시나네.’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보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기분 나빠 하는 것도 옹졸한 것이기에 선우방은 이내 씁쓸한 기색을 지웠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 예. 반호진입니다.”
“역시 반가워하시진 않으시네요.”
“친구를 이용했는데 기뻐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으음!”
제갈혜정이 침음을 흘렸다.
대개는 모른 척 넘어가는데 반호진은 달라서였다.
대놓고 면전에서 말하는 화법에 제갈혜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언니와 생각이 달라요.”
“응?”
그때 모용희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명확하게 제갈혜정과는 선을 그으면서 말이다.
마치 변명을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듯한 모용희수의 발언에 제갈혜정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르다고요?”
“예. 저도 반 공자님을 뵈러 온 건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반 공자님께서 선우 공자님을 먼저 찾아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호오.”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듣던 것과 달리 당돌한 구석이 있는 듯해서였다.
백련화라는 별호처럼 연꽃을 닮아 온화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되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내뱉고 있었다.
“어머?”
그리고 그 모습에 놀란 건 제갈혜정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오랜 세월을 봐 왔지만 모용희수의 이런 모습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동시에 제갈혜정은 느낄 수 있었다.
모용희수가 이 자리를 위해 상당히 많이 준비했다는 걸 말이다.
“또 선우세가는 본가와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하고요.”
“오대세가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요.”
“어?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선우방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대화가 요상한 길로 흘러가는 것 같았기에 선우방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그건 아니지만.”
선우방이 제갈혜정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대세가의 한 곳인 제갈세가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제갈혜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무림에서 경쟁은 필수죠. 약하면 잡아먹히는 곳이 강호니까요. 그걸 알기에 본가도 쉽게 잡아먹혀 줄 생각은 없어요.”
“하하하, 저는 제갈세가와 경쟁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말한 적 없는데? 오대세가에 제갈세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은근슬쩍 눈치를 주는 선우방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 역시 제갈혜정의 생각에 일정 부분은 동의해서였다.
경쟁 없이는 발전이 없었다.
다만 너무 과한 경쟁은 서로의 출혈을 부르기에 좋지 않았다.
“맞아요. 본가 말고도 네 가문이 더 있죠. 그중에 안절부절못하는 가문들도 있고요.”
“제갈세가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냉정하게 말해 최고를 다툴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밀려날 정도도 아니거든요.”
당당한 제갈혜정의 말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그가 죽기 전에 제갈세가가 오대세가 밖으로 밀려난 적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딱 중간의 자리를 견고히 지킨 무림세가가 바로 제갈세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갈세가가 야망이 없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반호진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째서 제갈혜정이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지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품종 개량.’
신기제갈이라는 말과 함께 뛰어난 두뇌로 무림의 명문세가로 군림하는 곳이 바로 제갈세가였다.
그러나 제갈세가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문무겸전처럼 무공으로도 천하에 우뚝 서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부족한 근골을 개선시키는 것이었다.
근골이 뛰어난 여인을 찾아 혼인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제갈세가가 노리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천당가와 마찬가지로 데릴사위를 좋아하는 가문이지.’
무림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강호세가답게 제갈세가에는 뛰어난 무공들이 많았다.
다만 근골과 무재가 부족해 그걸 십분 활용하지 못했을 뿐.
그래서 제갈세가는 생각해 냈다.
스스로 키워 낼 수 없다면 밖에서 데려오면 된다고 말이다.
“저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반 공자님에게 관심이 있어요. 무공에 대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요. 아시겠지만 본가에는 많은 것이 있거든요.”
제갈혜정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여자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는 외모이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게 매력이었다.
그리고 제갈혜정은 자신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할 줄 알았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갈혜정이 간과한 건 반호진은 여자에게도, 제갈세가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하나 반호진은 아직 영웅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영웅이 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제갈혜정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모용희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용세가의 소가주는 언제 폐관 수련에서 나옵니까?”
“네?”
모용희수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제갈혜정이 순간적으로 똥 씹은 표정을 짓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반호진이 생각지도 못한 걸 물어봐서였다.
이번 질문은 선우방도 의외였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연히 들었거든요. 모용 소저의 오빠가 가진 재능이 대단하다고요.”
“어, 그렇긴 해요.”
몇 번 보지는 못했으나 누구나 한 번 만나면 알 수 있었다.
반호진이 허튼소리를 아예 안 한다는 사실을.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직설적으로 할 말을 다 하고 있었기에 모용희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기쁘기도 하지만 놀라워서였다.
“나중에 한 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물론 이 녀석도 함께요.”
“응? 나도?”
“어. 아마 좋은 자극이 될 거다.”
“나야 좋지만…….”
난데없이 끼게 된 선우방이 말끝을 흐렸다.
그로서는 나쁠 게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다만 문제는 모용세가의 입장은 다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반호진의 방문이야 당연히 반기겠지만 그는 달랐다.
“지금 수준이 낮다고 미래에도 낮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당대의 오대세가도 처음부터 오대세가는 아니었고. 아, 소림사도 마찬가지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에 반호진은 말미에 소림사도 넣었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선우방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없어서였다
“그럼 본가에도 한 번 들러 주세요. 제가 초대할게요.”
“알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방문하겠습니다.”
“약속하신 거예요?”
대화의 중심이 모용희수에게로 향하자 제갈혜정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떠날 수는 없어서였다.
힘들게 지금의 자리를 마련한 만큼 최대한 많은 걸 얻어 가야 했다.
“예.”
“언제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 공자님은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제갈혜정을 마주하며 반호진도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를 것이었다.
기회가 되면이라는 이 다섯 글자에 담긴 의미를 말이다.
근데 그걸 알아차린 이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예. 조심히 가시길.”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앉아 있던 제갈혜정과 모용희수가 방을 나섰다.
나름 원하는 걸 얻었기에 눈치껏 떠나 준 것이었다.
두 여인이 곱게 인사하며 떠나자 선우방이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남자답게 들이대 봐.”
“누구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딱 보면 알지. 모용 소저 아냐?”
“근데 모용 소저의 눈에 내가 차겠냐? 아니, 모용세가주께서 만족하실까?”
선우방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이게 현실이었다.
그걸 선우방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은 그렇겠지. 근데 나중에는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보다는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은데?”
“내가 매력적인 신랑감 후보이기는 하지.”
“역시 모른 척하는 것이었구만?”
“모른 척은 아니고, 굳이 이 자리에서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합쳐도 반호진의 인생에 여자는 없었다.
전생에서는 소림사에만 박혀 있었고, 그건 이번 생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연륜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름 눈치도 빠른 편이었고.
“제갈 소저도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딱 봐도 간 보는 중이구만. 아마 후보만 열 명은 넘을걸?”
“막상 그렇지는 않을걸. 제갈세가도 사천당가와 마찬가지로 데릴사위를 선호하니까. 그럼 선택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지.”
“그래도 최소 열 명은 될걸.”
반호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제갈혜정에게는 미안하지만 반호진의 뇌리 속에 그녀는 그저 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일 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부러운 녀석. 나도 그런 호기 좀 부려 봤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꾸준히 정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참 재수 없는 말인데 네가 하면 이상하게 뭔가 있어 보여.”
“그야 사실이니까, 너도 알고 있고. 그나저나 앞으로는 네가 내 처소로 와야겠다. 매번 이런 일이 있으면 피곤해.”
반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반호진도 사람이었다.
더욱이 여자들과의 대화는 편하기보다는 피곤했다.
다른 이들이야 모용희수나 제갈혜정과 함께하고 싶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배가 불렀네.”
“네가 도와달라면 한두 번은 도와줄 수 있다.”
“아냐, 지금은 수련에 집중할 때가 맞으니까. 내가 좋다고 해서 혼인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힘차게 붙어 보자고.”
“응.”
선우방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언제 헬렐레했었냐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우방의 모습에 반호진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거의 한 달가량 소림사에서 머물렀던 후기지수들이 떠났다.
선우방이 아쉬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너무 오랫동안 본가를 떠나 있는 것도 좋지 않았기에 선우방은 나중에 꼭 찾아오라는 말을 몇십 번이나 하고서 떠났다.
또르륵.
덕분에 조용해진 경내에서 반호진은 홀로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모용희수가 선물로 준 동정벽라춘을 마시면서 말이다.
그것 말고도 반호진의 방에는 제법 다양한 선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역시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다니까. 괜히 사람이 사치를 부리는 게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