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3화 (13/468)

제 5장.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03

“너의 목표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나의 꿈은 소림사를 지키는 것. 경지가 높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나는 사부님처럼 소림사를 이끌고 지키고 싶어. 그러나 너는 다르지. 사제는 소림의 검이니까. 그것도 유일한 달마삼검의 계승자니까. 그러니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돼. 나머지는 모두 나에게 맡기고. 오히려 내 부담을 줄여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내가 질투할 줄 알았어?”

“승려도 사람이고 무인이지 않습니까.”

“그런 이들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난 아냐. 그렇게 옹졸한 이는 대사형이 될 수도 없고.”

법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처럼 세상에는 온갖 군상들이 존재했다.

스님이면서 여자를 탐하는 이도 있고, 도사이면서 구도를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법무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지금 그걸 느끼고 있습니다.”

“일대제자 중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다른 이도 분명히 있을 거야. 하지만 누구도 너를 핍박하거나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말했다시피 사제는 소림의 검이니까. 그러니 무공정진에만 집중하면 돼. 나머지는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반호진이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허리를 숙였다.

그런 사제의 모습에 법무가 흡족한 듯 웃었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대견스럽게 다가와서였다.

육체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성장 역시 그 못지않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반호진은 쑥쑥 잘 자랐다.

‘소림지검(少林之劍)이라.’

법무가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반호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화인처럼 머리와 가슴에 남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지금처럼 하면 된다. 누구의 말도 따를 것 없이. 그만큼 나는 널 믿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이런 자리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법무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이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차마 꺼내지 못했었다.

불감청 고소원이었는데 반호진이 먼저 말을 꺼내 주자 법무는 손을 덥석 잡았다.

“사형뿐만 아니라 저도 배우고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 사형께서 시간을 잡아 주시면 제가 맞추겠습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어느새 추월당해 있었지만 거기에 대한 자격지심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직속 사제인데도 제대로 신경 써 주지 못해 미안했었다.

한데도 되레 자신을 배려해 주는 반호진의 모습에 법무는 감격했다.

‘이걸로 대사형은 됐어. 이제는 사부님만 남았나.’

법무는 반호진이 순수한 호의로 제안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예전부터 계획하던 걸 실행한 것에 불과했다.

저벅저벅.

내심 흡족한 얼굴로 앞마당을 떠나는 법무의 뒷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히죽 웃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일 하나가 쉽게 풀렸기에 기쁜 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걸어가던 제갈혜정이 입구에서 마주친 여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인물이 그녀와 마찬가지로 호위무사들과 함께 나타나서였다.

그리고 그건 제갈혜정을 발견한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네가 어떻게?”

“언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상대방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두 사람 다 놀란 것이었다.

더불어 두 여인을 호위하던 무사들도 놀랐다.

이곳에서 상대측을 볼 줄은 몰라서였다.

“나는 선우 공자에게 볼일이 있어서. 참고로 말하자면 난 미리 약속을 잡고 온 거야.”

“어? 저도 그런데.”

“그래?”

제갈혜정의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그런데 그건 모용희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단번에 제갈혜정의 속셈을 파악했다.

‘역시 제갈세가라고 해야 하나.’

모용희수는 제갈세가의 체면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모용세가와 달리 제갈세가는 엄연히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정도쯤 되는 가문이면 체면과 명예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한데도 제갈혜정이 직접 여길 찾아오자 모용희수는 놀라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모용세가에서도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한편 모용희수만큼이나 제갈혜정 역시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단순히 반호진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선우방을 이용해서, 우회해서 만나고자 했다는 사실에 제갈혜정은 놀랐다.

자신도 겨우 생각해 낸 묘수를 모용희수가 찾아낼 줄은 몰라서였다.

“일단 들어가죠.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너도 약속 잡고 온 거야?”

“물론이죠. 저 그렇게 무례한 사람 아니에요.”

“하긴.”

엄청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아 온 지 십 년은 훌쩍 넘었다.

그렇기에 모용희수의 성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제갈혜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시겠습니다.”

두 여인이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서 앞마당을 가로지르자 선우세가의 무사들이 하나같이 긴장한 모습으로 앞장섰다.

제갈혜정과 모용희수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직접 보게 되자 본능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특히 모용희수는 미모로 천하를 진동시키는 삼봉 중 한 명이었기에 나이를 막론하고 모든 무사들이 힐끔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제갈혜정은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여자에게 미모는 확실히 무기이기는 해.’

제갈혜정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그녀도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못난 외모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예쁜 축에 들어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공도 그렇지만 미모 역시 상대적이었다.

‘대신 나에게는 똑똑한 머리가 있으니까.’

모든 남자들이 모용희수를 힐끔거렸으나 의외로 제갈혜정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인정했다.

애초에 자신과 모용희수의 매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제갈혜정은 부러워는 하되 질투하지는 않았다.

열등감을 폭발시켜 봤자 달라지는 건 없고, 자신만 손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소연 언니도 그걸 알아야 할 텐데. 근데 이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지.’

문득 떠오르는 남궁소연을 생각하며 제갈혜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살 많은 언니지만 언니라기보다는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사람은 좋았다.

달칵.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접객실에 도착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선우방이 어색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누가 봐도 두 여인의 방문에 당황해하는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좋은 오후입니다, 제갈 소저.”

“후훗.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좋은 오후라는 말은 처음이네요. 근데 신선하고 좋네요.”

“아.”

선우방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민망함에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우 공자님.”

“아, 예. 여기 앉으시죠.”

안면은 있어도 이렇게 말을 나눈 건 처음이었다.

선우방도 명문세가의 자제였으나 제갈세가나 모용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십대세가에도 속하지 못하는 곳이 선우세가였기에 선우방은 마음속으로 의문을 계속 떠올리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벽라춘을 두 여인에게 따라 주었다.

“벽라춘인가요? 향이 좋네요.”

“하하, 동정벽라춘은 아닙니다.”

“그래도 향이 되게 좋은데요?”

벽라춘 중에서 최고는 누가 뭐래도 동정벽라춘이었다.

그러나 동정벽라춘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가격도 상당하기에 선우방이라고 해도 물 마시듯이 마실 수는 없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우려냈습니다.”

먼저 대화를 이끌어 주는 제갈혜정의 모습에 선우방이 속으로 안도했다.

사실 선우방은 두 여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딱히 친분이 없는데 갑자기 방문하겠다고 하자 그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날 찾아온 건데. 근데 그게 뭐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 주는 제갈혜정과 달리 모용희수는 조용히 차만 홀짝였다.

제갈혜정이 알아서 분위기를 풀어 가니 자신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조차도 선우방에게는 분위기 있게 다가왔다.

가만히 있는 것조차도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이거 서운한데요. 저를 앞에 두고 희수를 힐끔거리시다니.”

“아, 입맛에 맞으신지 궁금해서요. 언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헤에, 순발력이 상당하신데요?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이유를 생각해 내시다니.”

“지, 진짜인데요.”

“그, 그럼 말을 왜 더듬으세요?”

선우방을 따라 하며 제갈혜정이 생긋 웃었다.

그 모습에 선우방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정곡을 찔리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저는 맛있어요. 벽라춘은 오랜만이기도 하고요.”

그런 선우방을 모용희수가 구해 주었다.

시기적절하게 입을 열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선우방은 감사의 눈빛을 가득 담아 모용희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마음껏 모용희수를 쳐다볼 수 있었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백봉(白鳳), 혹은 백련화(白蓮花)라는 별호답게 모용희수의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고 맑았다.

거기다 새하얀 백의경장까지 입고 있어 더더욱 새하얀 인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보면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선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감생심이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렇기에 선우방은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를 느꼈다.

지금의 그로서는 감히 가질 수 없는 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시간이 흘러 그가 가주가 되더라도 모용희수와 맺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동시에 모용희수와 어울리는 친구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 혹시?’

선우방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한 가지 가설이 떠올라서였다.

사실 지금껏 데면데면했던 제갈혜정과 모용희수가 갑자기 연락을 보내 온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목적이 있기에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인데, 선우방은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호진을 떠올리자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졌다.

소림사에 온 후 그에게 있어 달라진 점은 반호진과 친구가 된 것밖에는 없었다.

‘모용세가와 제갈세가라면 이 일을 충분히 알아낼 역량이 되니까.’

더욱이 반호진이 뭇 명문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선우방도 알고 있었다.

또한 귀찮다는 이유로 전부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가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그의 친구인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만날 수가 없으니 그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된 것이었구만.’

이제야 모든 게 명약관화해졌다.

반호진을 떠올리니 이 상황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새삼 반호진의 가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하긴, 나라도 여동생이 있었다면 똑같이 했겠지.’

씁쓸하고 부럽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질투하기에는 반호진이라는 인간이 너무나 괜찮았다.

별 볼일 없는 그를 먼저 찾아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말이다.

똑똑똑.

“나 왔어.”

그때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모용희수와 제갈혜정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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