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02
흔쾌히 대답하는 반호진을 향해 법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반호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마지막 말에 상당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였다.
‘눈치채신 건가.’
반호진이 내심 씁쓸히 중얼거렸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아직 영혼과 육신이 제대로 합일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법무가 느낀 모양이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아직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조금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법무와 담현을 만나는 걸 피했는데 결국 들킨 듯했다.
“너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예.”
“그게 내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알기에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인은 무(武)로서 말하고 증명하는 법.
법무가 그걸 원한다면 해 주는 게 도리였다.
또 미래를 위해서라도 법무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일이야. 그게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을 뿐.’
반호진은 지금의 상황을 좋게 생각했다.
그가 아는 법무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담현의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림사를 이끌었던 인물이 지금 반호진의 눈앞에 서 있는 법무였다.
“횃불은 없어도 되겠지?”
“원하신다면 붙이겠습니다.”
“달빛이면 충분해. 다행히 오늘은 만월이니.”
구름 한 점 없이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잠시 올려다본 반호진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법무가 말한 대로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스윽.
그런 반호진의 각오가 느껴졌던 것일까.
법무 역시 작게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동시에 법무에게서 묵직한 기파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나 역시.”
“그럼, 가겠습니다.”
“차마 사형으로서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은 못 하겠구나.”
“하하하.”
진심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법무의 모습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이런 법무의 모습은 처음이어서였다.
더불어 법무의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오거라.”
“예.”
스르릉.
고즈넉한 어둠 속에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범한 청강검이지만 중요한 건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였다.
과거로 돌아온 후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들고 있는 청강검이었다.
죽을 때까지도 함께했던 천우이자 형제와도 같은 검이 지금의 청강검이었기에 뽑혀 나오는 소리도 범상치 않았다.
웅웅웅웅!
말은 못 해도 반호진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청강검이 우렁차게 울었다.
흔하디흔한 청강검이 터트리는 검명에 법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명을 못 들어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큰 울림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그 역시 반호진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후후후.’
그의 말대로 반호진은 진심이었다.
검명도 검명이지만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말해 주고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긴장하지 않으면 단 일 초에 모든 게 결판난다고 말이다.
꾸욱!
온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을 느끼며 법무는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그만의 방법으로 몸을 적당히 긴장시키고, 이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단전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스하아앗!
검명이 가라앉은 순간 반호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환한 달빛을 받아 은광을 토해 내며 그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속도가 이상했다.
두 눈에 내력을 집중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반호진의 검은 호쾌하기는 하되 엄청나게 빠르진 않았다.
‘봐주는 건가.’
육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검격에 법무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반호진이 자신을 기만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반호진의 검극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피할 길이, 없다!’
법무의 동공이 흔들렸다.
만만하게 생각한 건 반호진이 아니라 그였다.
묵직한 반호진의 기도를 느꼈음에도 그는 방심했다.
단순히 검속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스윽.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신형을 움직였으나 반호진의 검은 그대로 그를 따라왔다.
정확히 그의 움직임을 추격했던 것이다.
그것도 가까스로 따라붙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정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완벽히 떨쳐 내는 건 불가능해.’
불영선하보(佛影仙霞步)를 극성으로 펼쳤으나 반호진의 검 끝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정확히 그의 중단을 노리고서 정확히 따라오는 모습에 법무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이동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부우웅!
거기에 생각이 닿은 순간 법무의 우장이 묵직한 파공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반호진의 검을 향해 정면으로 우장을 내질렀던 것이다.
따아앙!
법무의 성격답게 우직하게 뻗어 나간 오른손은 반호진의 검극과 충돌했다.
그러나 피가 솟구치지도, 장심이 관통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법무의 우장은 반호진의 검을 정면으로 튕겨 냈다.
맨손으로 날카로운 청강검을 맞받아쳤던 것이다.
쉬이익!
그와 동시에 그의 좌장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묵직하게 움직였던 오른손과 달리 그의 왼손은 섬광처럼 반호진의 명치를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전광석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일장이었으나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한줄기 벼락처럼 쇄도하는 법무의 좌장을 반호진은 검을 비틀어 검신으로 막았다.
따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법무의 왼손이 튕겨졌다.
검기는 서리지 않았으나 진기가 서려 있었기에 반탄지기로 인해 튕겨진 것이었다.
하지만 법무는 포기하지 않았다.
왼손이 튕기는 반동을 이용해 이번에는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를 연거푸 펼쳤다.
따다다당!
법무의 정강이가 마치 칼날처럼 예리하게 반호진의 전신을 노렸다.
반격의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듯이 쉴 새 없이 몰아붙였던 것이다.
게다가 연이어 펼쳐지는 항마연환신퇴에 날카로운 돌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예리한 발차기도 문제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날카로운 퇴풍(腿風)이 반호진의 사지를 찢어 버릴 듯이 휘몰아쳤다.
‘바람은 더 큰 바람에 쉽게 잡아먹히지.’
휘몰아치는 돌풍으로 인해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으나 애초에 육안에만 의존하는 무인은 절대 고수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 고수는 오히려 육안보다는 오감을 두루두루 활용했다.
더욱이 이 정도 바람은 반호진에게 있어 애교 수준에 불과했다.
슈아아앙!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반호진의 검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과 불영선하보, 항마연환신퇴를 연달아 펼친 법무와 달리 반호진은 무공을 펼치지 않았다.
찌르고 베는 기본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법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닐 것이기에 반호진은 달마삼검의 첫 번째 초식을 펼쳤다.
스르륵.
단순히 검을 들어 올린 것뿐인데도 사납게 주변을 휩쓸던 바람이 가라앉았다.
반호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압에 모조리 가라앉은 것이었다.
그 광경에 법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달마삼검에 대해 말은 많이 들었어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역시나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쉬이익!
머리 위로 올라갔던 검이 느릿하게 내려왔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도양단의 초식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삼재검법의 초식과 동일했으나 법무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기 하나 서리지 않았음에도 법무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흐읍!”
그걸 털어 내기 위해 법무는 기합을 터트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력금강장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어서였다.
그래서 법무는 대력금강장 대신 대금강권(大金剛拳)을 펼쳤다.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강력한 대금강권이 반호진의 검격과 충돌했다.
쩌어어엉!
내력을 조절했음에도 검과 주먹이 부딪치자 굉음이 터져 나왔다.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충돌음이 연무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나 정작 가장 가까이에서 들은 반호진이나 법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비무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던 것이다.
부우웅!
대금강권을 받았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법무는 재차 좌권을 찔러 넣었다.
우권과 부딪친 순간을 노리고서 절묘하게 두 번째 공격을 날렸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호진은 왼손이나 발을 사용하기보다는 검병으로 막아 내는 임기응변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반동을 이용해 몸을 자연스럽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스아앗!
얼마나 예리한지 파공성조차 미세한 검격이 법무의 목을 노렸다.
대련임에도 반호진은 마치 실전처럼 검을 휘두르자 법무의 이마에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긴박하기 짝이 없는 상황인데 묘한 흥분이 솟구쳤다.
모든 걸 내려놓고 대련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큰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쩌엉!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법무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주먹으로 반호진의 검신을 때렸다.
베어 오는 검을 정확한 순간에 때려서 튕겨 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며 발차기를 펼쳤다.
몸을 일으키기보다는 그대로 눕듯이 쓰러지면서 반호진의 턱을 노렸다.
스윽.
칼날같이 예리한 일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법무의 공격은 실패했다.
근접한 상태에서, 그것도 아래에서 파고드는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음에도 반호진은 마치 이럴 거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는 한 발이 떠 있는 상태의 법무에게 다리를 걸었다.
동작이 큰 공격이 실패하면 빈틈 역시 커지기에 그걸 노린 것이었다.
“흡!”
그러나 법무도 아무 생각 없이 발차기를 한 건 아니었다.
실패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반호진이 지면에 닿아 있는 유일한 다리를 노리자 오히려 반대쪽 말도 허공으로 띄웠다.
반호진이 발차기를 피하기 무섭게 뒤구르기를 하듯 빠져나갔던 것이다.
검을 들고 있는 반호진과 달리 그는 양손과 양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에 법무는 자연스럽게 간격을 벌리고서 숨을 골랐다.
쌔애액!
다만 문제는 그조차도 반호진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황하기는커녕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반호진은 막을 수밖에 없는 검초를 뿌렸다.
첫 번째 초식이지만 수백, 수천 개로 응용할 수 있는 게 달마삼검이었고 그 무서움을 반호진은 직접 보여 주었다.
“으읍!”
거기다 이제는 숙달의 경지에 다다른 금광신보가 합쳐지자 법무의 승복이 점차 누더기로 화하기 시작했다.
검기는 없었으나 검날이 날카롭기에 옷이 찢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체력적으로도 밀렸기에 법무는 이내 포기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졌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진짜 고생은 네가 했지. 근데 정말 강해졌구나.”
한참이나 어린 반호진에게 패배했음에도 법무의 얼굴은 밝았다.
아니, 오히려 개운한 표정이었다.
모든 걸 쏟아 냈기에 후련한 표정이라고 할까.
그러나 법무와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헛소문은 말 그대로 헛소문일 뿐이지. 그리고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오히려 너와 같은 사제가 있어서 기쁘면 모를까.”
반호진이 지그시 법무를 바라봤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연기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한 그대로 기꺼워하는 표정이었다.
“진심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