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그의 대계(大計)? -01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싶어 정현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반호진의 말마따나 익히고 있는 무공이 다르기에 가르치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무공을 봐주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더욱이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던 남궁광을 어린아이 다루듯이 제압한 걸 직접 봤기에 정현은 매달리듯이 반호진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아프다.”
“죄, 죄송합니다!”
“어쨌든 의지는 있다는 거지?”
“물론이죠! 근데 약속하신 거죠? 나중에 딴말하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아마 네가 먼저 못 하겠다고, 그만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흠칫!
정현이 움찔거렸다.
반호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게 두렵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을 포기하는 순간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에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설마 널 괴롭히겠어? 너를 괴롭혀서 내가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차라리 널 봐주는 시간에 내 수련을 하는 게 낫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게 기대는 안 하니까 꾸준히만 해. 난 많은 거 안 바란다.”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현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소리쳤다.
그런 정현에게서는 어느새 풀 죽은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뜨겁게 타오르는 의욕만이 남았다.
“그 말 마음에 드네.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겠다라. 아주 좋아.”
“대신 느린 건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것도 알고 있지. 말했다시피 난 큰 기대를 안 한다니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까.”
“으으, 시작도 안 했는데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정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웃긴 건 저 말이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뜻이야. 괜히 의욕만 넘쳐서 과욕을 부리지 말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러면 실력은 눈곱만큼이라도 늘게 되어 있어.”
“네!”
다부지게 대답하는 정현의 모습을 보며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지난 생에서의 정현이 떠올랐다.
입가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정현이.
그때 정현의 가슴에는 손바닥만 한 구멍이 있었다.
‘이번에는 이 녀석의 미래도 달라져야지.’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던 게 정현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현의 시체 앞에서 반호진은 울었었다.
때문에 이번에는 그 미래를 바꿀 생각이었다.
죽기에는 그 당시 정현은 너무 어린 나이였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정현만큼 친하지는 않아도 함께 소림사에서 살았던 제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사형도, 사제도, 사질들도 있었다.
특히 지금의 이대제자, 추후에 들어올 삼대제자들의 죽음은 반호진에게 많은 슬픔을 주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걸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넌 꼭 백 살까지 살아라.”
“예? 백 살은 너무 많지 않아요? 전 적당히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적당한 나이가 몇 살인데?”
“으음. 그래도 최소한 일 갑자 정도는 살아야 적당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소림사 제자인데 단명하면 좀 그렇죠.”
“그럼 딱 중간인 여든까지 살아라.”
육십 년도 짧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반호진은 정현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운명이 바뀌길 바랐다.
비록 그처럼 지난 생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정현이 강해지고 소림사가 강해져야만 천하사패의 야욕을 막을 수 있었다.
“여든도 너무 긴데요. 저는 벽에 똥칠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연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단명하는 것보다는 낫지.”
“어, 그렇긴 하죠. 근데 제가 일찍 죽을 상이에요?”
“그건 나도 모르지. 관상을 배우진 않았으니. 근데 약하면 죽는 게 무림이고, 너도 무승이니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할 수도 있지.”
“너무 극단적인데요. 근데 사백님이 그리 말씀하시면 이상하게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아요.”
정현이 몸을 떨었다.
왠지 모르게 으스스했던 것이다.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야. 나도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사백님은 벼락을 맞아도 살아남을 것 같은데요. 호신강기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벼락의 기운을 흡수해서요.”
“그 말을 들으니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기는 한데. 벼락이 정확히 나한테 떨어질까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근데 사백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사옵니다.”
“말투가 왜 그래?”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이 정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더불어 말투도 바뀌었다.
“흠흠! 진심으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진짜 삼봉과 안 만나실 거예요?”
“만나서 뭐 해?”
“어, 친목도모? 교분을 나누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겸사겸사 너도 데려가고?”
“헤헤헤!”
노을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정현의 정수리가 붉어졌다.
그 미묘한 색의 차이가 반호진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일없다. 정 만나 보고 싶으면 너 혼자 가.”
“제가 간다고 만나 줄까요. 문전박대당할걸요.”
“그리고 소문이 나겠지. 정현이라는 이대제자가 여자를 밝힌다는.”
“으헉!”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정현이 몸을 떨었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반호진은 히죽 웃었다.
이 반응이 재미있어서 놀리는 걸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수련에만 집중해. 좋은 무공, 좋은 사부, 거기다 환경까지 좋은데 노력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걸 배반하는 행위니까.”
“알겠습니다아…….”
“말 늘어뜨리지 말고.”
“넵!”
“내 수련은 끝났지만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오늘부터 시작하자. 아무래도 네 정신머리부터 당장 뜯어고쳐야겠어.”
정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적어도 반나절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호진은 마치 그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입을 열었다.
“허업!”
“싫으면 포기해.”
“아니요.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자, 가자.”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자 정현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없이 뒤따랐다.
***
“허!”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자 막내딸인 남궁소연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으로 찻잔을 거칠게 다탁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쌍둥이 동생인 그녀와 달리 언니인 남궁수연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뭘 그렇게 화를 내?”
“이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화가 안 나?”
“네가 보자고 한다고 꼭 반 공자님이 오셔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쌍둥이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그걸 보여 주듯 남궁소연이 손바닥으로 다탁을 연신 내려쳤다.
“어허, 조신하지 못하게. 여기 본가 아니야.”
“답답해서 그러지!”
“뭐가 답답해. 네가 청했고, 반 공자님은 거절한 것뿐인데.”
“언니는 기분 안 나빠?”
“그럴 수도 있지. 막말로 삼봉도 까였는데 우리라고 별 수 있니.”
남궁소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봉이 까인 건 금시초문이어서였다.
“정말?”
“삼봉만 까였게? 혜정이도 까였어.”
“헤에.”
제갈혜정조차 까였다는 말에 남궁소연이 해연히 놀랐다.
친한 만큼 제갈혜정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아서였다.
“오빠도 까이는 마당에 네가 거절당한 건 별거 아니지.”
“속가제자라고 하지 않았어?”
“정확하게는 무기명제자지.”
“근데 왜 이러지? 진산제자면 당연히 여인을 멀리하는 게 맞지만 그자는 속가제자잖아?”
“어제 보니까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것 같던데.”
남궁수연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화를 나눠 보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나름 반호진을 자세히 살펴봤었다.
특히 비무가 끝나기 무섭게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몸을 돌리는 모습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소림사의 무승조차 눈을 떼지 못하는 삼봉이 한자리에 있었음에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는데도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혹시 동자공을 익혔나?”
“진산제자라면 모를까 속가제자가 굳이 동자공을 익힐 필요는 없지. 지금까지 전수되는지도 모르고.”
“모르지. 승려들은 색계를 어기면 안 되니 동자공을 익힐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지. 자세한 사정은 소림사만 알고 있겠지만.”
“근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가 있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남궁소연이 울분을 터트렸다.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먼저 만남을 청했음에도 까였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남궁소연의 얼굴은 분함으로 빨갛게 변해 있었다.
“네가 황제도 아닌데 거절할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화를 내?”
“자존심이 상하잖아!”
“그럼 모든 남자가 네 말에 따라야 해?”
“그건 아니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져서 말하는 남궁수연의 모습에 남궁소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억지와 쓸데없는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자라고 해서 다 똑같지만은 않아. 미녀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도 있는 반면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도 있을 수 있어. 예를 들면 일편단심인 남자들.”
“그래도 나나 삼봉을 까는 건 너무하지 않아? 우리가 뭐 잡아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차 한 잔 하면서 대화 좀 하자는 건데.”
“그게 귀찮을 수도 있지.”
남궁수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동생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오히려 남궁수연은 더 늦기 전에 이런 일을 겪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번에 겪지 못했다면 가뜩이나 높았던 남궁소연의 콧대가 정말 끝도 없이 올라갔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 그게 귀찮지?”
“다른 사람들을 네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 그거 안 좋은 거라고 내가 몇 번 말했잖아.”
“언니는 안 궁금해?”
“궁금하긴 한데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잖아. 본가라면 다른 방법을 써 볼 수도 있지만 여기는 소림사야. 우리는 엄연히 손님이고. 그걸 생각하고 있어야 해.”
“칫!”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맞는 말이었기에 남궁소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토라졌다는 듯이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었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말이다.
“근데 나도 더 궁금해지기는 했어. 삼봉의 초대를 거절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오빠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한 것도 처음 보고. 또래 중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엇비슷한 실력자는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나 강한 걸까?”
“지금 당장은 오빠가 넘기 힘들어 보이던데. 제자리에서 한 발도 떼지 않은 거, 알고 있어?”
“정말?”
이건 몰랐다는 듯이 남궁소연이 깜짝 놀랐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괜히 오빠가 돌아가자마자 폐관수련 하겠다고 한 게 아냐. 그걸 아니까 순순히 패배를 시인한 거야. 더 해 봤자 자신만 초라해진다는 걸 아니까.”
“그래도 곧 따라잡을 거야.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추월하겠지. 오빠는 잠시 멈춘 것뿐이야.”
남궁광이 지긴 했으나 남궁소연은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보란 듯이 남궁광이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였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해.”
“그나저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무슨 방법?”
“삼봉보다 우리가 먼저 그자를 만날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