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달라달라. -03
도저히 스무 살이라고는 믿기 힘든 화술에 오중건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탄하기도 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심기도 대단한 것 같아서였다.
동시에 소림사의 제자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제도 남다르다고 느끼긴 했는데 이 정도로 별종일 줄이야.’
신기하지만 이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림사의 제자라고 해서 전부 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성격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반호진은 속가제자인 만큼 꼭 전형적인 소림사의 제자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만.”
“사부님께 들었습니다. 제 사부님께서는 방장님과 대화하다가 반 공자님에 대해서 들으셨고요.”
“역시 그런가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여서였다.
그리고 출처가 담현이라면 반호진이 뭐라 따지기도 애매했다.
“반 공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당혹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난데없이 끌려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성격이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다음에는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거든요.”
“크흠! 알겠습니다.”
정중하지만 안에 뼈가 서린 한마디에 오중건은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잘못한 건 그였기에 입이 있어도 따질 수가 없었다.
“아,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오 대협을 찾아가려고 했거든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지은 죄가 있기에 오중건은 말만 하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참에 빚 아닌 빚을 청산할 수 있으면 그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새외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네? 새외무림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오중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후기지수들이나 명문세가, 또는 구파일방에 대해서 물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질문을 받자 오중건은 두 눈을 껌뻑거렸다.
“개방에서도 새외무림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모양이군요.”
“말 그대로 새외무림이지 않습니까. 본 방의 제자들이 새외무림에서도 활동하기는 합니다만 따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동정을 살피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반호진이 눈을 반개했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방심이 중원무림의 몰락을 불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천하사패는 결코 갑자기 뜻을 모은 게 아니었다.
분명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최소한 의견 정도는 주고받고 있겠지. 각자 힘을 키우고 있으면서.’
새외무림은 언제나 중원의 비옥한 대지를 노렸다.
척박한 곳이기에 늘 풍요로운 땅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원무림은 늘 그 침공을 막아 왔었다.
다만 지난 생에서는 그게 실패했을 뿐.
‘언젠가는 어떻게든 밀어냈겠지만 그래도 거의 정복당했다는 건 사실이니까.’
죽었기에 반호진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가능했다.
북해빙궁주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중추적인 인물들이 죽었으나 천하사패의 전력은 중원무림을 압도했기에 상당 시간 암흑기가 도래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근데 지금 그걸 생각할 필요는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니까.’
죽은 순간 미래는 반호진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오지 않은 미래이기도 했고.
또 반호진은 전생의 삶을 반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뼈 빠지게 고생하고 목숨을 바치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이번에는 절대 안 죽어. 나도 좀 즐겁게, 누리면서 살아 보기도 해야지.’
반호진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희생은 한 번이면 족했다.
이번 삶은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겸사겸사 지난 생에서 이루지 못했던 목표도 이루면서 말이다.
“혹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숭산에서만 지냈던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는 무가도 아닌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었는걸요. 다만 소문으로만 들었기에 궁금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오중건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파악한 반호진은 결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이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맞았다.
오중건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숭산을 벗어난 적도 없었고.
“사람들이 너무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괜히 새외무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니까요. 알고 싶다고 해도 쉽게 알아낼 수도 없고요.”
“그렇지요.”
새외무림의 동정을 살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들어가는 돈도 상당했다.
자금과 인력, 시간이 꾸준히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개방이 새외무림 정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고. 자세히 파악하면 좋지만 그게 무리라면 흘러가는 동정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만 알고 있는 미래였기에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믿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를 미친놈 취급할 게 분명했다.
‘이건 좀 생각해 봐야겠군.’
개방의 정보력이 천하제일이라고 하나 비견되는 곳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거대방파와 명문세가들 역시 나름의 정보 조직을 꾸리고 있었고.
그리고 꼭 백도무림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 깜빡 잊고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 남궁세가에 반 공자님에 대해서 말한 건 제가 아닙니다. 이걸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법무 대사께는 어제 말씀드렸고요. 믿는 기색은 아니셨습니다만 하늘에 맹세코 저는 절대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믿어 주시는 겁니까?”
“개방이 알고 있었으니 남궁세가가 아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다 알게 되었고요.”
“하하하.”
오중건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 시초가 된 게 자신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만약 그가 정현을 꼬드겨서 반호진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걸 알기에 오중건으로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짧았어. 따로 조용히 봤어야 했는데.’
오중건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뒤늦게 후회했으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을 수밖에 없었기에 오중건은 오늘 이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이왕 늦은 후회는 나중으로 미뤄 놓고 앞으로 반호진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어 갈 것인지만 생각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향후 중원무림의 거물이 될 게 분명하기에 반드시 친분을 맺어 놓아야 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인상은 확실하게 주었으니까.’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오중건은 이보다 더한 악조건에서도 필요한 걸 얻은 적도 있었다.
만만치 않은 인물인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파고들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사람 좋은 얼굴로 강호 정세에 대해 재미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
생각할 거리가 있었기에 반호진은 혼자서 휘적휘적 걸으며 산책했다.
소림사도 넓었지만 숭산도 넓었기에 산책할 곳은 많았다.
한동안은 사람 없는 곳을 찾을 필요도 있었고.
그러다가 반호진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정현을 발견했다.
“뭐 해?”
“아, 사백님!”
“왜 처량하게 이곳에 있어?”
“어, 수련 중이었는데요?”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시각에 혼자 공터에 쭈그려 앉아 있는 정현을 발견한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이대제자였다면 그랬겠지만 나름 정이 든 정현이었기에 반호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었다.
“수련을 하는데 눈시울은 왜 붉어져 있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 사백님이 오시기 전에 돌풍이 불었거든요.”
“그으래?”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호진이 말끝을 늘렸다.
그러나 정현은 당당했다.
잡아떼면 반호진으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어서였다.
아무리 귀신같은 눈치를 가지고 있는 반호진이라고 하더라도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이상 그의 현재 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네. 사내대장부는 함부로 울지 않으니까요.”
“넌 사내대장부가 아니지. 그냥 무승이지. 그것도 곧 땡중이 될 무승.”
“땡중이라니요!”
“파계승보다는 낫잖아?”
“끄응!”
삼봉에 관한 걸로 아직도 우려먹는 반호진의 모습에 정현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정현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삼봉의 모습을 보고 넋을 잃기도 했고.
그런데 그 정도 미모면 여자에 내성이 없는 젊은 승려들에게는 당연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고. 뭐가 그렇게 분해?”
“분하다니요?”
“패배한 게 분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정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귀신도 이런 귀신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정현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딱 보면 알지. 네가 지금 걸었던 길은 나 역시 걸었던 길이니까.”
“……사백님은 또래에게 져 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정현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마치 반호진은 절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네 말도 맞지. 근데 나라고 패배한 적이 없는 건 아냐. 오히려 누구보다 많이 져 봤지. 근데 내가 언제 기죽은 거 봤어?”
“어…….”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에 정현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반호진의 말도 꼭 틀리지만은 않아서였다.
또래든 어른이든 선배이든 패배한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덜 분하냐, 완전 분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승패에 너무 연연하지 마. 인생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아. 천하제일인이라고 해서 패배한 적이 없는 건 아니고. 다만 성장하는 속도가 다를 뿐이야.”
“사백님은 정신적으로 되게 강인하신 것 같아요.”
“맞아. 모두가 내 재능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장점은 정신력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으니까.”
“부럽습니다. 그 단단한 자신감이요.”
“너도 가질 수 있어. 나처럼 타고 나는 사람도 있지만, 나중에 길러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어.”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반호진의 따뜻한 손길에 정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다독여 주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처음 보는 반호진의 모습에 정현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누구세요?”
“이게 조언을 해 줘도 이러네?”
“평소 사백님답지 않으니까요. 혹시 귀신인가? 아직 해도 안 졌는데.”
해가 서산에 반쯤 넘어가기는 했으나 아직 주위는 밝았다.
그렇기에 정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위로해 주었더니 헛소리하네? 역시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으힉!”
반호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정현이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손이 엄청나게 맵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몸이 반사적으로 쭈그러든 것이었다.
“어떻게든 따라잡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하루에 반 시진 정도 시간 내서 찾아와. 무공을 가르쳐 줄 수는 없지만 봐줄 수는 있으니까.”
“저, 정말요?”
정현의 두 눈 휘둥그레졌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기에 정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물론 귀찮긴 한데,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내가 무공을 봐준다고 해서 네 실력이 급격하게 발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할게요! 매일 찾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