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이번 생은 좀 즐기면서 살아야지. -02
정곡을 찌르는 반호진의 말에 정현이 맨들맨들한 머리를 긁적였다.
머리를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양 볼뿐만 아니라 정수리도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여자를 좋아한다니. 설마 파계승이 되려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전 단지 천하를 진동시키는 미녀가 보고 싶을 뿐입니다! 순수하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궁금한 것뿐이라고요!”
“흐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는데. 너 그러다가 파계승 된다?”
“제 몸과 마음은 본사에 있습니다!”
정현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이 대화를 들은 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쯧쯧! 너도 네가 실언을 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하구나.”
“대체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시무룩함을 넘어 울먹거리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이 몸을 튕겼다.
널브러지듯이 누워 있던 나뭇가지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대충 움직인 것 같은데도 착지하는 데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깃털이 떨어지듯 너무나 부드럽게 정현의 앞에 내려섰다.
“이왕 파계할 거면 빨리 하라고. 나중보다는 지금이 잃을 게 적지 않겠어?”
“……너무하세요.”
“이런 선택도 있다고 말해 주는 거야. 꼭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근데 정말 사룡삼봉이 왔다는 걸 말해 주기 위해서 온 거야? 다른 의도 없이?”
“어…….”
심유한 반호진의 눈빛에 정현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의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은 깊은 눈빛이 마치 그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이상했다.
반호진의 눈빛이 사조뻘인 장로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우리 솔직해지자고. 누구야?”
“그게, 그러니까요…….”
“대사형은 아닐 테고. 사부님께서 고작해야 후기지수들 일에 나설 분은 아니신데.”
명문세가라고 했지만 사룡삼봉이 왔다는 건 오대세가의 자제들이 왔다는 걸 뜻했다.
그렇다면 대사형이 마중을 나갔을 터였다.
즉 그렇다면 대사형은 가능성이 희박했다.
“후개께서 부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방의 후개?”
“예에.”
정현이 개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말했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정현을 탓하지 않았다.
그가 알기로 개방의 후개는 대사형과 비슷한 나이대인 만큼 정현을 다루는 건 쉬웠을 터였다.
“근데 날 어떻게 알지?”
“개방의 후개이니 알지 않을까요? 차기 개방주님이시니까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차기 개방주라고 하나 후개는 개방에서 서열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신분만 따지자면 장로들과 같았으나 그렇다고 개방의 이인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현재 그의 존재는 엄연히 비밀이었다.
“방장께서 개방주님께 말하신 건 아닐까요?”
“뭐, 그랬을 수도 있지. 내가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무기명제자라고 하나 엄밀히 따지면 소림사의 속가제자일 뿐인데.”
“에이, 그건 아니죠.”
“아직 난 용서하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준 것뿐이지.”
“힉!”
정현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러고는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보기에 어때? 후기지수들도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후개께서 말할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곰곰이 기억을 곱씹은 후 대답하는 정현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현의 말에 따르면 일단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후개 한 명만인 것 같아서였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몇 명이나 왔어? 사룡삼봉이 왔으니 오대세가뿐만 아니라 웬만한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다 왔을 거 같은데.”
“호위무사들을 제외하면 서른 명 정도 되는 거 같아요.”
“그럼 호위무사들까지 합치면 백 명이 훌쩍 넘겠네?”
“얼추 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지객당 소속이 아니기에 정확한 인원 파악을 하지는 않았으나 대충 그 정도는 되는 듯했기에 정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안 가더라도 넌 갈 거 아냐? 삼봉을 보러.”
“헤헤. 사백님은 안 궁금하세요?”
“딱히. 예쁘긴 엄청나게 예쁜데 그게 다지.”
“어? 삼봉을 보신 적 있으세요?”
순간 반호진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본 건 미래의 삼봉이었다.
지금은 보기는커녕 마주친 적도 없었다.
“미인은 나도 제법 봤으니까. 향화객들 중에서도 미녀이신 분들 많잖아.”
“근데 격이 다르대요. 그냥 보는 순간 감탄만 한다던데요?”
“곧 파계승이 되겠구나.”
“으윽!”
“가자. 나도 후개가 궁금하기는 하니.”
반호진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지난 생에서 그는 후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후개가 아니라 방주였었다.
거지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개방도들과 방주들은 게을렀고, 그래서 제자도 늦은 나이에 들이는 편이었다.
‘지금 개방주 나이가 여든 몇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이는 팔십이 넘었지만 정작 후개의 나이는 반호진보다 열 몇 살 정도 많을 뿐이었다.
그걸 떠올리며 반호진은 걸음을 옮겼다.
카앙! 캉!
현 개방주와 후개에 대해서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자 금방 지객당에 도착했다.
명문세가의 자제들이 와서 그런지 따로 별채를 내어줬는지 벌써부터 살벌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역시 혈기왕성하네요.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대련들인지.”
“밥 먹고 수련만 하는 이들인데 저게 당연하지. 친목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힘만 있다면 오대세가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
“하북팽가나 황보세가, 모용세가는 자주 들락날락하긴 했죠.”
반호진을 보필하듯 반 보 뒤에서 따라가던 정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구파일방과 달리 오대세가는 당시의 성세에 따라 가문이 바뀌기도 했다.
실제로 그걸 노리고서 힘을 키우는 가문들이 많았고.
어떤 호사가는 오대세가가 아니라 십대세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왔는가, 사제.”
한창 비무로 뜨거운 앞마당으로 들어가자 법무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차기 소림사의 방장이자 같은 스승을 둔 법무는 막냇동생을 보듯 반호진을 바라봤다.
“예, 대사형.”
“정현이도 같이 왔구나.”
“예!”
인자한 법무의 눈빛에 정현이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짧았다.
이내 정현은 법무의 옆에 서 있는 중년의 거지를 힐끔거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개방의 오중건입니다.”
“후개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후개라고 해도 별거 없습니다. 똑같은 거지니 편히 대하시죠.”
정중하지만 은근히 선을 긋는 듯한 반호진의 인사에 오중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걸 법무도 알고 있었으나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법무 역시 탐탁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심 반호진이 안 왔으면 싶기도 했고.
‘흐음?’
동문수학을 해서 그런지 얼굴과는 달리 불편한 기색을 똑같이 드러내는 반호진과 법무의 모습에 오중건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였다.
이내 그는 반호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생각보다, 특별한 느낌이 없는데?’
오중건이 소림사에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소림사 방장이 극찬한 천재가 누구일지 궁금해서였다.
그래서 철없는 후기지수들이 소림사에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은근슬쩍 합류했었다.
한데 기대가 컸던 모양인지 실망도 컸다.
‘근골은 확실히 뛰어나나 풍기는 기세라든지 눈빛은 영.’
개방의 후개로서 수많은 강호고수들과 후기지수들 그리고 전대 고수들까지 다 만나 본 게 오중건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오중건을 충격에 빠트릴 정도의 강자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현재 앞에 있는 반호진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제법 뛰어나기는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사룡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수준 같은데. 근데 이 정도 차이는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지.’
오중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대단한 인재인 건 맞았다.
그러나 소림사의 방장씩이나 되는 이가 극찬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자격이 되지 않으면 전수를 하지 않는다던 달마삼검의 계승자가 아니던가.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가? 아니면 내가 보지 못한 걸 방장께서 보신 건가?’
오중건이 미간을 좁혔다.
개방의 후개인 만큼 안목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하지만 그렇다고 사부인 개방주나 소림사의 방장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오중건은 판단을 보류했다.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만.’
한데 그때 오중건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후기지수들 간의 비무를 지켜보는 반호진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너무 잘 보이잖아?’
오중건은 순간 자신이 그냥 지나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나 쉽게 반호진을 평가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그의 연배는 소림사의 대제자이자 차기 방장인 법무와 비슷했다.
즉 반호진과는 나이 차가 제법 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반호진의 무위를 훤히 들여다볼 자격이 된다거나 역량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인의 경지는 꼭 나이에 비례하지는 않았으니까.
‘설마 일부러 이 정도만 보여 주는 거라고?’
오중건의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앞서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윽.
그런데 그때 반호진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주 절묘한 순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던 것이다.
동시에 반호진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흠칫!
한데 그 마주침이 오중건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묘한 뒷맛을 남긴 채로 반호진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였다.
‘만약 일부러 이 정도만 보여 준 거라면…….’
오중건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착각한 걸 수도 있지만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방금 전에 느낀 게 절대 착각이 아니라고 말이다.
‘여전하네.’
누가 봐도 심사가 복잡해 보이는 오중건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속에 능구렁이를 여러 마리 키우는 성격답게 딱 봐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제 딴에는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반호진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다.
‘아직은 덜 여물 나이니까.’
중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였으나 십 년 후에 비하면 아무래도 아직은 연륜이 덜 쌓일 수밖에 없었다.
육체 나이는 스물이어도 반호진의 정신 나이는 서른이 넘었으니까.
사실 그로 인한 괴리감도 상당했다.
정신은 문제가 없었으나 육체가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나 할까.
“우, 우와……!”
그때 옆에서 깊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소림사의 무승으로서 체면도 없는지 정현이 어느 한 곳을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벌레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정현의 모습에 법무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헉! 죄, 죄송합니다.”
“이해는 하지만, 소림사의 제자라는 걸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죄송합니다!”
나지막한 법무의 한마디에 정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의 얼굴은 물론이고 정수리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답게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허허허, 승려는 사람 아닌가요. 더구나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고. 게다가 저기에 있는 여인들이 어디 보통 미녀들인가요.”
부끄러워하는 정현의 모습에 오중건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이상한 쪽은 반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