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회귀하다.
“어……라?”
반호진은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새외무림에서 맹위를 떨치는 천하사패(天下四覇)의 맹주라 할 수 있는 북해빙궁주와 경천동지의 대결을 펼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동귀어진 했다.
소림사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불리던 그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북해빙궁주는 막강했고, 목숨을 바쳐야지만 겨우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었다.
“근데 이거 뭐야?”
중원의 평화를 위해 무공을 갈고닦았고, 사부의 뜻대로 소림사의 비밀병기가 되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한데 지금 그는 살아 있었다.
꾸욱.
“난 분명 죽었었는데?”
두 눈을 껌뻑거리던 반호진이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죽기 직전의 피투성이였던 손이 아닌,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양손의 모습에 반호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으나 서른의 손과는 확연히 다른 손이 두 눈 가득 채우자 반호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정말 다시 되돌아온 건가?”
잠시 멍을 때리던 반호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회귀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서였다.
그러나 의아함도 잠시, 이내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은데?”
소림사의 제자이나 그는 무기명제자였다.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사부가 소림사의 비전절기를 전수하기는 했으나 승적에 올리지는 않았다.
불가와는 인연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소림사의 제자로서 본인의 성격을 상당히 누르고 살아왔다.
소림사라는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한 번 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좀 설렁설렁 살아야겠어. 열심히 살고, 중원의 평화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이번 생은 좀 즐기면서 살아도 되잖아?”
제 1장. 이번 생은 좀 즐기면서 살아야지. -01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았지만 그건 하루가 채 가지 않았다.
우연찮게 찾아온 행운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떤 이유로 인해 과거로 되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반호진에게 있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었다.
어쨌거나 삶이 다시 한번 주어진 것이었으니까.
“몸이 진짜 다르네. 서른 살 때와는 완전 천지 차이야. 역시 젊음이란.”
새삼 스무 살의 활력을 느끼며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반호진은 느꼈었다.
삼십 대와 이십 대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 직접 느껴 보니 그 격차는 상당히 컸다.
“달리 말하면 천하사패의 침공이 십 년 정도 남았다는 건데. 날짜로 계산하면 구 년 정도인가?”
반호진은 더 이상 편하기 힘든 자세로 나뭇가지 위에 누워 있었다.
평소였다면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누워서 쉬지 못했을 터였다.
악착같이 그에게만 주어진 무공, 달마삼검(達摩三劍)을 수련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오로지 재능 하나 때문에 소림사가, 정확하게는 사부가 허락했지만 반호진은 달마삼검을 수련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다들 지금쯤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겠네.”
반호진이 여유를 부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단 현재 소림사에서 그보다 달마삼검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육체가 젊어진 만큼 충만했던 내공은 사라졌으나 대신 수많은 경험과 성취가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 보여도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름 노력하는 중이기도 했고.
그리고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숨어 있는 은거고수들과 각 무파와 무가가 키우고 있는 비밀병기들이 상당하다는 걸 말이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넌 날 어떻게 찾는 거냐?”
고개만 살짝 꺾고서 반호진이 물었다.
분명 예전과는 행동반경이 달라졌을 텐데 매번 귀신같이 찾아내서였다.
“에이, 딱 보면 알죠. 경내에서 갈 만한 곳이 얼마나 있다고요.”
“평소와는 내가 움직이는 게 다를 텐데?”
“헤헤! 예전에 제가 다 있었던 곳들이라서요.”
“아, 그래?”
이제 열다섯 살인 정현이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마디로 이미 자신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는 말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근데 사백께서도 아시네요? 예전과 많이 달라지신 걸요.”
“내 일인데 당연히 알지.”
“사실 그것 때문에 저희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백님과 사숙님들께서도 다들 의아해하세요.”
“너무 바뀌어서?”
“네. 사춘기가 늦게 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정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일대제자이기에 실제로 나이 차이는 그리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분은 천양지차였기에 제아무리 넉살 좋은 정현이라고 하더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장의 막내제자이나 무기명제자이기에 속가제자 신분이지만 그래도 소림사 방장의 단둘뿐인 제자 중 한 명인 만큼 반호진의 신분은 결코 낮지 않았다.
“사춘기라. 그것도 꼭 틀린 말은 아니네.”
“정말요?”
“그렇다고 맞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생각이 좀 달라졌을 뿐이야. 원래 내 성격은 너도 알잖아?”
“처음 소림사에 오셨을 때 성격이 지금과 비슷하셨죠.”
나이는 열다섯 살이지만 소림사에서의 시간은 정현이 훨씬 더 길었다.
소림사 일주문에 버려져 키워졌다가 불문에 귀의하게 된 이가 정현이었다.
즉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소림사에서만 자랐기에 반호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지난 생까지 합치면 내가 더 길긴 한데, 그건 말할 수 없으니까.’
처음에는 회귀 자체를 믿지 못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모든 건 엄연히 현실이었기에 반호진은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 모를까.
“용케 기억하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 하나는 좋지 않습니까. 초식도 외우는 건 제가 가장 빠릅니다. 다만 이해하고 펼치는 게 늦어서 그렇죠.”
정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사춘기라서 그런지 감정 기복이 널을 뛰듯 심했다.
“어쩔 수 없지. 타고난 재능은 각자 다르니까.”
“사백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까 더 가슴 아프네요.”
정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소림사 최고의 천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반호진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비전 중의 비전인 달마삼검을 허락한 게 아니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가지고 있는 재능은 각자 다르지만 그걸 개화하고, 만개시키는 건 다른 문제야. 무도(武道)는 끝이 없어. 죽는 순간이 끝인 거지. 죽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네가 넘고 싶어 했던 이를 넘을지도 몰라.”
“정말요?”
“응. 쉽지는 않겠지만.”
“치잇!”
정현이 다시 한번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마지막 말이 어째 자신을 넘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해서였다.
“덧붙이자면 네가 생각하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어.”
“정말요?”
“물론이지.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까. 나라고 해서 지금 당장 천하제일인은 아니잖아?”
“목표는 역시 천하제일인이시죠?”
“글쎄.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정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소림사를 진동시키는 천재답게 반호진의 목표는 늘 하나였다.
천하제일인이 되어 소림사를 수호하겠다는 것.
한데 지금은 그 말을 할 때와는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바뀌셨다고요?”
“응. 아, 그렇다고 해서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이후의 목표가 생겼다고 봐야지. 새로운 꿈이라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그게 무엇인데요?”
“한량.”
“네?”
정현이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왠지 잘못 들은 거 같아서였다.
그런데 반호진은 진담이라는 듯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한량 몰라? 빈둥빈둥 노는 한량. 아, 물론 앞에 여섯 글자가 붙어. 천하제일인 겸 한량. 한마디로 그냥 놀고먹고 싶다는 거지.”
“어…….”
정현의 눈알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반호진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반호진은 오히려 씩 웃었다.
“천하제일인 정도 되면 여유 좀 부려도 되잖아?”
“그, 그렇지만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계속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예 따라잡을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강해지면 되지.”
“에?”
정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면 천하제이인이 천하제일인을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도 같았다.
한편 정현의 말문을 막아 버린 반호진은 먼 미래의 일을 떠올렸다.
‘초월경 이상의 경지.’
과거 북해빙궁주와 사투를 벌일 당시의 반호진은 선택받은 무인만 오를 수 있다는 초월경에 오른 고수였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경지였다.
바로 그 경지에 반호진은 올랐었다.
근데 문제는 초월경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정당당한 대결도 아니었지만. 뭐, 북해빙궁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나?’
처절하게 싸웠던 먼 미래의 일이자 어떻게 생각하면 과거의 일이기도 한 사투를 떠올리며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마 안 된 기억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심지어 북해빙궁주가 뿜어 대던 극음지기와 전투 당시의 짙은 혈향도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그, 그게 가능할까요?”
“안 될 건 뭐야?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게? 그게 현재 네 마음가짐인가?”
“그럴 리가요!”
정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재능은 그리 특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정현은 반호진의 말대로 죽기 직전까지는 계속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게 어디쯤일지는 모르겠으나 꿈의 경지라는 초월경이었으면 좋겠다고 정현은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소림의 제자지. 더구나 넌 속가제자인 나와 달리 진산제자잖아? 당연히 나보다 더 큰 꿈을 꾸어야지.”
“……익히는 무공은 사백님이 더 상승절학이시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지. 내 재능이 그렇게 뛰어난걸. 약간의 행운도 따랐고. 사부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글공부를 하거나 장사를 했겠지. 그리고 확실하게 말하자고. 내게 허락된 상승절학은 단 두 가지뿐이야. 달마삼검과 내공심법인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뿐이야. 그것 말고 익힌 건 속가제자들에게 허락된 무공들뿐이지.”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누운 채로 반호진이 검지를 휘휘 저었다.
자신이 엄청난 신공을 익히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 중에 소림사를 대표하는 칠십이종절예에 속하는 건 무상대능력뿐이었다.
달마삼검의 경우 워낙에 난해한 무공이라 제대로 전수가 되지 않은 무공이었고.
괜히 방장인 사부가 달마삼검을 익히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그러네요?”
“칠십이종절예만 하더라도 하나같이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무공이야. 그러니 날 부러워하지 말고 배운 거나 열심히 수련해. 달마삼검을 원한다면야 언제라도 알려 줄 수 있고.”
“입문 구결만 봐도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어요.”
정현이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서 달마삼검을 익히는 이가 없는지 정현은 비급을 보고 느꼈었다.
“근데 왜 날 찾아온 거야?”
“아! 그걸 말씀 안 드렸네요. 명문세가의 자제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백님도 아시죠? 사룡삼봉(四龍三鳳)요!”
“구룡삼룡?”
“네? 아뇨! 사룡삼봉요!”
반호진이 귀를 후벼 파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사룡이지만 나중에는 구룡이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이맘때쯤 찾아왔던가?”
“얼마 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요.”
“그랬나?”
살짝 들뜬 정현과 달리 반호진은 심드렁했다.
후기지수가 오거나 말거나 그는 딱히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 모습에 정현이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 궁금하세요? 사룡이라고 하면 현재 백도무림 후기지수들 중 가장 뛰어나잖아요.”
“고작 그 정도로?”
“예?”
마치 사룡의 수준을 훤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에 정현이 반문했다.
느낌도 느낌이지만 말투가 사룡을 내려다보는 듯해서였다.
“아, 아직 등장을 안 했구나. 하긴, 어쩌면 덜 여물었을 수도 있고. 근데 그들이 온 걸 왜 네가 들떠서 좋아해? 아, 혹시 삼봉 때문에?”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