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5 외전 : 16년 후 - (完)
무림 맹이 위치한 합비에 사는 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장소가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정파의 심장이라 불리기도 하는 무림 맹의 본부,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은 강호에서 제일 강한 가족이 사는 한 장원이었다.
전자의 무림 맹이 대규모 집단으로서 강호제일세력이라 친다면,
후자의 장원은 가족 규모의 집단으로서 강호제일세력이라 불렸다.
한 때 세력이 흔들렸지만, 강호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정보집단 하오문의 수장.
여성의 몸으로 점창파의 문주 자리에 오를 뻔했으나 그 자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검수.
그리고 과거에 강호삼신이라 불리던 것을 넘어, 이제는 무림의 여섯 하늘이라 불리는 ‘천하육걸’ 중 두 명이 한 곳에 사는 장원이니 누구도 가볍게 여기진 않으리라.
그리고 오늘, 그 장원의 안에서 네 명의 젊은 남녀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막 문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독고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보내도 되는 게 맞나 모르겠네.”
“후훗, 령 매. 아직도 걱정이야?”
“… 아직 애들이잖아. 혹시나 어디 가서 해코지 당할까 봐 그러지.”
“그래서 소소랑 같이 보내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관영이가 개방 쪽이랑 협조해서 별 문제없이 여행할 수 있게 돕는다고 했잖아.”
“… 그렇긴 한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깐 고민하던 독고령의 눈이 무심코 비익연리를 놔둔 창고로 향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백리소현은 웃으며 독고령을 껴안았다.
“언제까지 품에 안고 살 순 없잖아. 보내주기로 해 놓고는.”
“으으…”
백리소현의 아들이자 막내 위지겸이 지학(15세)에 이르자 위일청과 그의 세 부인은 아이들을 강호로 내 보내기로 결정했다.
강호초출.
무림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게 할 나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같이 따라가겠다고 악을 썼던 독고령이었지만, 아들인 지하가 완강이 거절하자 못내 허락해주었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이었다.
“…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지?”
“아잇 참… 그럴 애들도 아니잖아. 령 매 애들이고 지하도 있는데?”
“지하가 마음이 많이 여리잖아…”
“그래서 벌써 합비의 동년배들을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울게 만드니?”
위지하의 악명은 이미 합비에 제법 유명했다.
독고령의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시비를 거는 남자가 있다면 싸움을 피하지 않았고,
위일청의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여러 여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뭇 여인들의 베개를 눈물로 적시게 만들곤했다.
“지하가 강하고, 잘생긴거잖아. 뭐 어쩔 건데.”
“닮은 건 위 오라버니랑 닮았는데 하는 짓은 령 매랑 닮았으니 걱정되긴 하네.”
“역시 나도 같이 따라갈까? 지금이라도 바로 준비해서…”
“령 매.”
백리소현이 조금은 엄한목소리로 꾸짖자, 독고령이 다시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 안 그럴게. 그냥 보내줄게, 언니.”
“그래, 후훗.”
그때, 남녀의 무리에 섞여 있던 한 여인이 다가와 독고령에게 물었다.
“많이 걱정되세요?”
“걱정이 안 되겠니? 애기들만 넷을 보내는 데.”
“히힛. 사고 눈에는 저도 아직 애기인가 봐요.”
“너 애기 때부터 봐 왔으니깐 그렇지, 소소야. 그보다 아직도 사고라 부르니?”
독고령의 말을 들은 남궁소소는 부끄러운 듯 뺨을 긁적였다.
“옛날처럼 언니라 부르기도 그렇잖아요. 그리고…”
살짝 뺨을 붉히며 무심결에 위지하에게 향한 남궁소소의 시선을 독고령은 놓치지 않았다.
“하긴 시어머니될 사람한테 언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겠네.”
“아… 아니에요! 지하랑은 그런 관계 아닌데요?!”
“조만간 무림 맹에 또 들려야겠구나. 니네 아빠랑 비무 하는 건 즐거운데 묵세휘가 또 만난 김에 뭘 맡길지는 상상만 해도 싫은데 소소를 며느리로 받기 위해서라면야 뭐…”
“그… 그런 거 진짜 아니예요!”
“크큭.”
새빨갛게 뺨을 붉히는 남궁소소를 바라보며 독고령은 아이들이 떠나는 즉시 무림 맹에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맹주 자리에 앉아 있는 남궁소소의 아비, 남궁진의 도움을 받아 이참에 아이들의 호위 관련해서도 맡겨야겠다 생각하며.
흑룡강까진 너무나 먼 곳이었고 한 번 떠난 뒤 얼마나 천하를 주유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한 달음에 뛰쳐나갈 독고령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은 아예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자매인 하오문주, 은관영이 알아서 잘할테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독고령의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독고령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비 다 끝났어요, 어머니.”
“하아… 지하야.”
“네, 어머니.”
“… 진짜 떠나야겠니? 그냥 엄마랑 같이…”
“에이, 왜 그러세요. 약속하시고는. 불안하셔서 작은 엄마랑 하오문에도 꾸준히 연락하기로 했고, 소소 누나도 일행에 포함시키신 거잖아요.”
“그래도…”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요. 그러니깐…”
어느새 자신보다 머리 하나 커진 아들이 그녀를 안아주자, 독고령은 코끝이 찡해졌다.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아버지인 위일청의 모습을 닮아가더니 언제 이렇게 커졌는가 생각하며 결국 독고령은 마음을 정했다.
“그래, 잘 갔다 오고. 혹시나 강적을 만나면 괜히 싸우겠다고 그러지 말고 도망치고.”
“어머니는 매번 맞서 싸우셨다면서요.”
“나니깐 되는 거야. 너는 그러지 마렴.”
“네, 크큭. 없어서 적적하신동안, 아버지랑 잘 지내시고 계세요.”
“그래. 너랑 지약이가 나이는 같지만, 그래도 네가 장남이니깐 동생을 잘 보살피고 네가 나랑 성격이 많이 닮았으니깐 뭘 선택할 땐 꼭 지약이랑 소소의 의견을 들어라. 응?”
“네.”
“지약아, 지겸아.”
독고령이 부르자, 뒤에 서 있던 다른 두 남녀 또한 앞으로 다가왔다.
“지약아.”
“네, 엄마.”
대답하는 위지약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함께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여행의 진로는 항상 네가 결정해. 관영이랑 같이 자주 연락 나누면서 위험한 곳은 미리 피하고. 응? 네가 제일 똑똑하니깐.”
“헤헷, 그럴게요.”
“그리고 흑룡강에 도착하면 꼭 찾아가야 할 곳이 한 곳 있단다. 그 근처에 도착하면 관영이랑 꼭 함께 다녀오렴.”
“네.”
독고령은 위지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신기하게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 텐데 지약이는 자라면서 점차 은약벽과 비슷한 분위기를 띄곤 했다.
아마 은관영이 나이를 먹으며 점차 은약벽을 닮은 것처럼 하오문에 속한 이들은 다들 그렇게 은약벽을 닮아가는구나 생각하며 독고령은 신기해했다.
“지겸아.”
“네.”
위지겸이 앞으로 나오자, 독고령이 지겸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딘가 여리여리한, 살짝 처진 눈매가 백리소현과 똑 닮은 아이였다.
하지만 유약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의 심지가 다른 어떤 아이보다 굳은 것을 독고령은 잘 알고 있었다.
“막내인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무위가 가장 뒤처진다. 알고 있지?”
“몇 번이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이라도 어릴 때 강호를 경험하는 거란다. 이건 나중에 네게 큰 힘이 되어줄 거야. 지하랑, 지약이랑 소소 말 잘 듣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그래, 후우…”
이제 정말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왔구나 생각할 즈음.
“다 모였나요, 령? 소현?”
“네, 가가.”
“응.”
위일청이 장원의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아이들에게 줄 것들이 잔뜩 있었다.
“일단 소소야.”
“네.”
“맹주님이 바쁘셔서 대신 전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받거라.”
“이건…”
위일청이 건넨 것은 손 때 묻은 낡은 검이었다.
독고령이 어디선가 본 물건이다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즈음, 위일청이 말했다.
“맹주님이 무림 맹으로 떠날 때 쓰시던 검이라고 하더구나. 아직 날카로운 예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귀히 쓰거라.”
“감사힙니다.”
“그리고 지겸아.”
“네, 아버지.”
“받거라.”
“이건…”
그가 건넨 것은 여러 약재들이 든 주머니였다.
“금창약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유용한 약들을 챙겨 놓았다. 언제든지 마음껏 쓰거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니라.”
위일청이 보랏빛 가루를 하나 꺼내 들었다.
“수면향이니라. 지하가 날뛰거든 이걸로 제압하거라.”
“… 제일 귀한 거네요. 알겠습니다.”
“지약아.”
다음으로 위지약을 부른 위일청은 그녀에게 돈이 담긴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대륙 곳곳에서 바꿀 수 있는 전표와 은자들을 넣어 두었다. 네가 돈 관리를 맡거라. 특히 지하가 술을 마시려고 하거나 기루에 들리려고 한다면 무조건 막아 세우거라.”
“후훗, 네.”
“그리고 지하.”
“… 눼.”
입을 삐죽 내밀고 튀어나온 위지하를 보고 위일청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제발 사고 치지 말거라.”
“… 저 별로 사고 안 치는데요.”
“아무 데서나 싸움 걸지도 말고.”
“받아온 싸움은 받고요?”
“함부로 여심을 가지고 놀지도 말고.”
“… 먼저 다가오는 여인은 내치지 말라고…”
“어허.”
“… 눼.”
“그리고 네가 장남이니 부디 잊지 말고 제발 책임감을 가지거라.”
“… 가시는 날까지 잔소리만 하시고.”
다른 아이들에겐 이런저런 물건들을 건네주고 자기한테만 잔소리를 하는 게 못마땅했는지 위지하가 툴툴거리자, 위일청이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그의 팔에 묶여 있던 연검을 하나 풀어 위지하에게 건넸다.
“자, 이제 네 것이니라.”
“어…”
“젊은 시절엔 내가 쓰다가, 이후엔 령이 쓰던 연검이다.”
검에 얽힌 내력을 듣자 놀란 위지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호에서 가장 강한 이 중 하나로 일컫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던 연검이라니, 필시 중한 물건일 것이다는 생각에 위지하는 떨리는 손으로 연검을 받아들였다.
“제… 제가 받아도 돼요, 아버지?”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란 얘기니 제발, 당부컨대, 사고 치지 말거라.”
“… 네!”
방금까지 들은 당부의 말들은 금세 잊어 버리고 신이 난 위지하는 연검을 손목에 묶었다.
그러고는 다른 아이들 사이에 서더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고, 문제 있으면 하오문 찾아가고!”
“후훗, 몸 성히 다녀오렴.”
그렇게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위일청, 독고령, 백리소현은 조용해진 장원을 보고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 조용하네요.”
“그러게요.”
“후훗, 애들이 시끌벅적하긴 했지.”
“한동안 적적하겠네.”
독고령이 울적한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위일청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으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글쎄요. 아이들도 없으니 이제부턴 눈치 안 보고 령이 좋아하는 일들을 잔뜩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렇긴 한데…”
“그리고 정 적적하면 아이들의 형제를 더 만드는 것도 방법이고요.”
남는 한 손으로 백리소현까지 품에 끌어들인 위일청이 침실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녜… 녜헷…”
독고령의 하단전이 또 한 번,
욱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