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223화 (223/225)

EP.223 외전 : 인자검 백리소현, 그리고 과거 - (20)

허리가 불에 데인 듯, 격통이 일었지만 그보다 손을 통해 퍼져나가는 확실한 감각이 고통을 지워냈다.

“컥…!”

검신을 통해 상대의 맥박이 천천히 사라지는 감각과 내 얼굴에 튄 유광의 따스한 피를 느끼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후우…”

방금 내가 경험했던 것은 뭘까?

온몸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으로 가득 찼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왠지 모르게 지금의 몸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몸 안에 갇혀 있는 내공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어 하는 것을 느끼며 당장에라도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 순간.

“유광!!!!!”

멀리서 유유자적하게 전장을 관망하며 화살이나 쏘아대던 유열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나도 내가 해낸 걸 믿을 수 없었는데 그의 형제인 유열은 더 하리라.

파앗!!

혹시나 또다시 날아올 지 모르는 유열의 화살에 대비해 그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내자, 유광이 피를 흘리며 거대한 육체와 함께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쿵!

“네년이 감히 내 형제를…!!!”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의 짙은 살기가 나를 향했다.

시위에 또 하나의 화살을 먹이는 유열을 바라보며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다시 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몸이 무너졌다.

“…어?”

당황하며 고개를 내려보자 어느새 바닥에 닿은 무릎이 보였다.

다리가 풀린 건가?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보려고 애썼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기이한 상황이었다.

몸 안을 맴도는 내공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이 생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정작 몸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령 매가 말하던 심기체의 조화였다.

깨달음을 뜻하는 심,

내공을 뜻하는 기,

육신을 뜻하는 체.

혹시 지금이 환골탈태의 순간일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쏘아낸 일격이 깨달음이 되어 오히려 지금의 육체가 감당하지 못한건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못 움직이면 안 되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멀리서 유열이 있는 힘껏 잡아당긴 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날아든 화살이 코앞까지 당도한순간.

“언니!!”

콰직!

관영이가 묵직한 일격을 내지르며 화살을 막아섰다.

“아파라…”

“관영아!”

막아 내긴 했지만, 화살에 담긴 힘이 느껴진 것처럼 범상치 않았는지 관영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언니? 어디 다친 거예요?!”

“… 모르겠어. 다친 건 아닌데…”

“큰 누님!! 괜찮으십니까?!”

이젠 청운 도사님 마저 나를 걱정하며 내 안위를 물어 주는 걸 보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랄까… 정말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언니?”

“웃음이 나오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있을까.

상대는 강하고, 수도 많았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왠지…

전혀 불안하지가 않았다.

“관영아.”

“네, 언니.”

“나 좀 지켜 줄래? 어림잡아… 한 다경(15분)만?”

“한 다경이요?”

“응, 깨달음을 얻었거든. 아마 지금인 거 같아.”

관영이 또한 무인인지라, 또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던지라 내 말을 듣고 참 기뻐하며, 동시에 왜 하필 지금이냐는 난색을 같이 표했다.

하지만 그런 표정이 드러난 건 아주 잠시뿐.

“네, 언니.”

나와 유열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관영이의 작지만 든든한 등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켜드릴게요.”

“응, 고마워.”

무인에게 있어 가장 취약해지는 때는 운기조식의 때다.

혹여나 뭐 하나 잘못되는 순간 기혈이 뒤틀려 쌓아온 무공을 잃기도 하기에 운기조식을 할 때는 정말 안전한 곳에서 홀로 하거나, 아니면 신뢰하는 이에게 호법을 부탁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가장 믿음직한 이에게 호법을 맡겼다.

“부탁할게.”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오히려 빨리 회복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며, 눈을 감음과 동시에 온전히 자신의 내부에 몰두했다.

그만큼 관영이를, 청운 도사를, 령 매를, 그리고… 위 오라버니를 믿으니깐.

*

싸움의 시작부터 마차를 중심으로 전선이 갈렸다.

나와 령은 일홍 형님과 대치하고,

소현과 관영은 유광, 유열 형제와 대치하는 구도.

가능한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일홍 형님의 무위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기에 그저 소현과 관영이 잘 버텨주기만을 바랬는데 오히려 소현이 그 축을 무너뜨린 걸 보고 안심됐다.

그리고 안심하는 순간,

“어딜 한 눈을 파는 게냐!!”

일홍의 매서운 일격이 나를 덮쳤다.

“윽…!”

“가가!!”

일홍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처럼 재기 넘치는 자였다.

단순히 내공을 손에 담아내어 발경하는 기(氣)의 단계를 넘어, 내공을 압축하여 쓰는 강(罡)의 단계마저 넘어서, 강환(罡丸)으로 뽑아내는 모습은 두렵기까지 했다.

여인들을 덮쳐 내 쌓은 막대한 내공을 바탕으로 그는 쉴 새 없이 강환을 뽑아내어 던졌고 뒤에는 아이들이 있는 마차가 있어 쉬이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지금처럼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한 싸움이었다.

“벌써 지친 게냐?!”

그 뛰어난 재능을 하필 여인을 덮치는데 쓰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지, 그는 항상 가문 내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아버지의 주목을 받던 자였으니깐.

생각해 보면 내 어린 시절의 편린 속에서 아버지보다 더 많이 튀어나오는 게 형님이었다.

항상 형님, 형님하면서 그의 뒤를 쫓아 주변을 돌아다니고, 동네의 아낙네들을 꼬시기도하고, 무공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네놈만 아니었다면…!”

“그게 제 탓입니까?!”

“닥쳐!!”

나와 얼굴을 맞대며 이를 갈고 있는 형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애처로운 마음마저 들었다.

어쩌다가 우리 둘의 관계가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서로를 아끼는 형제 사이였는데… 하필.

형님은 모든 재능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딱 하나 타고나지 못한 게 있었다.

“형님의 양물이 작은 것이 어찌 제 탓이란 말입니까?!”

“크아아악!!!! 죽여주마!!!!”

형님의 양물은… 어린아이보다 못한 크기였다.

*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흑룡강에 위치한 우리 가문에는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이 존재했다.

얼핏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열 댓명의 아이가 있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해가 지날 때마다 아이가 하나둘씩 떠나곤 했다.

아버지는 소싯적부터 강호를 주유하며 여러 여인과 관계를 가지셨고 그로 인해 내겐 세기도 힘든 참 많은 형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오직 재능 있는 아이들만 아버지가 거둬들이셨고, 또 그 재능있는 아이들 중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안 드는 아이는 저렇게 내쳐지곤 했다.

내가 아버지를 지금까지도 혐오하는 이유는 내 유년기를 이별 가득한 시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까지 남겨져 나의 15살을 같이 맞이한 유일한 형제가 일홍 형님이었다.

일홍 형님마저 내 15살의 생일에 떠나며 혼자가 되기 전까지, 적어도 그는 가장 오랜 시간 나와 시간을 보낸 형제였다.

“소녀경의 마지막 구결을 이을 후계자는 일청이다.”

“무… 무슨 소리십니까, 아버지?!!”

“일홍. 너도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거라. 가문은 일청이가 이을 것이다.”

“아버지!!!”

그날, 일홍 형님이 떠나라 통보받은 날.

당연히 형님이 가문을 이어받고 내가 떠날 줄 알았다.

그래서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떨어진 아버지의 말이 이해가지 않았다.

“아버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일홍 형님보다 훨씬 모자란…”

“아니다. 소녀경을 전수받기엔 네가 적격이구나, 일청아.”

“이유가 뭡니까?!”

너무나 확고한 아버지의 대답에 일홍 형님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항상 아버지를 잘 따랐던 형님이었지만, 그날만큼 격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처음 보았다.

그만큼 일홍 형님은 후계자 자리에 진심이었다.

“제가 도대체 일청이보다 뭐가 부족한 겁니까?!”

“마… 맞습니다. 소녀경의 숙달도 형님이 더 뛰어나시고, 방중술이든 무예든 형님이 더 뛰어나신데 어떻게 제가…”

“하지만 작다.”

“예?”

“… 나도 일홍이가 크면서 더욱 커질 줄 알았으나 이 나이까지 저렇게 작다면 사실상 앞으로 자랄 가능성이 없다봐도 무방하지.”

“무엇이 말입니까?”

그때, 그 마지막 질문을 나는 하면 안 됐다.

일홍 형님은 이미 작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무얼 말하는지 알았는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저 어린 마음에 되물은 것뿐이었지만, 돌아온 아버지의 말은 형님에게 평생 상처로 남았으리라.

“양물의 길이다.”

“… 예?”

“소녀경을 익히는 데 있어서 방중술은 필수고, 크기가 작다한들 문제는 되지 않는다. 허나 일청이의 양물이 1 자(30cm)에 가까워질 동안, 일홍이의 길이는 여전히 한 치(3cm)밖에 안 되는구나. 작아도 너무 작아 소녀경을 익혀도 써먹을 곳이…”

“그… 그만하십쇼!!!”

그때, 울먹거리는 형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 형님, 역시 제가…”

“일청!”

그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보려보던 형님의 눈빛이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넌 커서 좋겠구나.”

“… 형님.”

크고 난 뒤에서야 형님의 원한이 얼마나 컸으리라 짐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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