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221화 (221/225)

EP.221 외전 : 인자검 백리소현 - (18)

령 매와 지내면서 많은 광인들을 만났다.

음… 사실 령 매의 별호가 음란검신보다 ‘광마’, ‘색광마’ 이런 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령 매의 행동은 궤를 달리한 적이 많았기에 이제는 어느 정도 광인의 행동거지에 익숙해졌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칭 ‘진 색마’라고 칭하는 새로운 광인을 만난 뒤 내 생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지하랑 지약이를 들먹여…?”

그리 길지 않은 인생,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고 다양한 최후를 듣고, 또 경험했다 생각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최후를 고의적으로 끔찍하게 만들 인간이 또 있을까.

사랑스러운 지하와 지약이를 협박한 광인이라 일단은 분노의 감정이 먼저 샘솟았지만, 옆에서 숨 막힐 정도의 살기를 뿜어대는 령 매를 보고 그 감정은 금세 동정심으로 치환됐다.

불쌍해라.

어떻게 생긴 이인지 만나본 적도 없는 자지만, 아마 그의 최후는 결코 곱지 않으리라.

지금이라도 스스로 길게 혀를 빼물어 자결하는 걸 권해주고 싶었다.

물론,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관영아.”

“… 네, 독고 언니.”

“이 개새끼 지금 어딨을까?”

그렇게 말하는 령 매의 눈에는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흥분한 령 매를 보고 슬슬 위험하다 생각이 들 즈음,

“흐앙?!”

“진정하세요, 령.”

위 오라버니가 적절하게 개입해주며 령 매를 진정시켰다.

“일단은 조금 진정하죠, 령. 흥분으로 일으르 그르쳐선 안 되니깐요.”

“… 눼.”

“후훗.”

우리 일행의 분위기는 령 매의 감정에 따라 좌지우지됐고,

그리고 그런 령 매를 주도하는 위 오라버니가 결국 분위기를 결정짓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한풀 가벼워졌다.

순식간에 령 매를 진정시킨 위 오라버니는 잠시 관영이와 령 매가 안고있는 지하와 지약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손이 기분좋은지 평소 자주 웃는 지하뿐 아니라, 잘 웃지 않는 지약이마저 꺄르륵 웃는 모습에 확실히 분위기가 밝아진 느낌이었다.

“일단 그 작자가 어떻게 나오든간에 결국 우린 그 자를 잡을 목적으로 움직인 겁니다. 그렇죠?”

“… 그렇긴 하죠, 가가.”

“바뀔 건 없습니다. 다만… 그 자가 죽는 방법을 좀 더 괴로운 쪽으로 선택한 것 뿐이죠.”

위 오라버니의 입에서 내뱉어진 차가운 말에 살짝 가슴이 떨렸다.

확실히 자식을 얻게된 이후 변하게 된 건 령 매나 관영이 뿐이 아니었는지 위 오라버니 또한 표현을 안 했을 뿐 많이 화나있었다.

“관영.”

“네, 오빠.”

“늘 그렇듯 관영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겠군요. 자칭 색마의 추적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산중호걸을 데리고 내뻈으니 아마 더 찾기 쉬울거예요. 그리고 미리…”

관영이가 품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어보였다.

“천리추종향을 살짝 뭍여두었죠. 접선자와 만나다 문제가 생겨 도주할 수도 있다 생각했거든요.”

“그럼…!!”

“물론 도중에 자칭 색마와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그 꼬리는 잡을 수 있을 거 같아요오.”

“어머.”

관영이가 가끔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저 아이가 참 똑똑한 아이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놀라게 된다.

산중호걸을 아무 생각없이 붙잡아둔 건 아니였던 모양이다.

“쫓아가면 적어도 자칭 색마가 보낸 수하, 여차하면 자칭 색마 본인도 만날 수 있겠군요.”

“네에.”

“하오문주님, 그러면 조금이라도 일찍 쫓아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옆에서 잠자코 있던 청운 도사가 끼어들자 관영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나 비라도 내려서 냄새가 끊긴다면 곤란하니깐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좋아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위 오라버니는 나와 령 매를 바라보며 질문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바로 가야죠, 가가.”

“응, 바로 가자.”

“결정됐군요. 관영, 혹시 하오문에서 남은 일은…”

“더 없어요오. 마차도 준비해놨으니깐 바로 출발해도 돼요.”

“역시 관영입니다.”

“헤헤…”

관영이의 철저한 준비성 덕분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바로 가시죠.”

“네!”

그렇게 우리는 자칭 색마의 꼬리를 쫓기 시작했다.

*

관영이가 하오문에 들른 것은 단순히 하오문주의 소임을 다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는지 다시 출발할 때 우리에겐 새로운 마부가 하나 붙었다.

하필 그 마부의 성이 ‘허’씨라 ‘허 마부’라고 부르곤 했는데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관영이가 자주 변장하던 그 마부가 아닌가 했는데 진짜였다.

“… 저 분이 하오문에서 가장 말을 잘 몰아서 그래요오.”

“과찬이십니다, 문주.”

“무엇보다 네 쌍둥이라 구분하기 힘든 것도 큰 장점이고요.”

“형제들 모두 말을 모는데 재능이 있어서 그렇지요.”

확실히 변장하기엔 정말 좋은 대상이었다.

아무튼 관영이의 말은 그저 입 발린 칭찬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허 마부가 이끄는 마차는 무림맹에서 여기까지 오던 어느 때보다 빠르고, 조용히 자칭 색마를 쫓기 시작했다.

도중도중 냄새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가 멈추곤 했지만, 길이 정해지면 말들은 일사분란하게 내달리곤 했다.

그렇게 덜컹거리는 마차 내에, 이제는 청운 도사님까지 추가되서 총 7명은 자연스레 자칭 색마를, 령 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떻게 조질 지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산중호걸 유광이 잡힌 사실을 알고 구출해낸 거니깐, 그 형제인 담천산룡 유열도 있으리라 생각해요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역시 우리들 중 정보를 담당하는 관영이었다.

“둘이 합쳐서 천룡지호, 옛날부터 둘의 합격술은 유명했으니깐 이 쪽은 무조건 령 매가 상대해주셔야 해요오.”

“약한 놈 둘이 합쳐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유열도 유광이랑 비슷한 실력 아니야?”

“그렇겠죠, 아마. 둘은 매 번 한 수 차이라고 그랬으니깐요오. 하지만 둘의 합격술은 현 무림맹주이신 남궁진 대협께서도 정면으로 받지 않을 정도니깐 조심하셔요.”

“…”

이제는 새로운 강호삼신이라 불리는 남궁진 대협의 이름이 나오자 장내의 분위기가 살짝은 무거워졌다.

“고작 산적 새끼들이 그 정도로 강하다고?”

“녹림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녹림을 지배하는 천룡지호가 무서운 거니깐요.”

“알았어. 그 새끼들은 내가 맡을게. 그럼 자칭 색마는…”

일행들의 눈은 자연스레 령 매 다음으로 강한 위 오라버니에게 향했고, 위 오라버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제가 맡죠.”

“네.”

결국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이란 문파 대 문파의 총공세가 아닌 이상 매번 이런 식이었기에 자칭 색마는 자연스레 원조 색마, 위 오라버니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군사 관영이의 말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천무맹에서 지원이 왔을 때까지 고려해야하는데요오. 그 경우엔 가능한 후퇴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요.”

“굳이? 그 새끼들까지 싸그리 족치면…”

“지하랑 지약이를 지키면서 싸우기엔 무리가 아닐까요오?”

“으음…”

전투일변도, 선공제일주의인 령 매도 지하와 지약이의 이름이 나오자 한풀 그 기세가 꺾였다.

확실히 어린 아이를 둘이나 보호하며 얼마나 강할 지 알 수 없는 다수와 싸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혹시나 적들과 싸우다 지하나 지약이가 조금만 다치더라도 이 싸움은 우리가 지는 전투니깐.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령 매도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만약 다수의 적을 만난다고 치면 나랑 가가가 큰 기술로 적들을 휘젓고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

“그쵸?”

“그럴 경우엔 관영이랑 소현 언니가 시간을 벌어줘. 청운이가 그래도 무당파라 방어 쪽에도 일가견이 있으니깐 지하랑 지약이 위주로 잘 지켜주고.”

“예, 누님!”

“으응?”

관영이야 이해가 갔지만, 갑작스레 내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혹시나 충분한 시간을 못 벌면 어떻게 할까.

하지만 령 매는 그런 나의 망설임을 궤뚫어본 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우리 중에서 선공을 누군가한테 맡기면 언니가 제일 적격이야.”

“… 내가?”

“언니의 공격이 가장 빠르고, 날카롭거든.”

그럴 리가 없다며 말하고 싶었지만, 령 매의 눈을 바라보자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처럼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령 매의 눈빛이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증명하자, 나는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응, 령 매. 내가 선두에 설게.”

강호삼신,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무인.

그런 사람이 내게 보내는 신뢰의 눈빛이란 없던 확신도 생기게 하는 강렬한 무언가였다.

그렇게 령 매가 나에게 보내는 신뢰를 또 한 번 확인하게 된 뒤 막 그 여운에 젖어있을 즈음, 마차가 멈춰섰다.

또 다시 천리추종향의 냄새가 갈렸나 싶어 별 생각없이 창문을 열려던 순간…

쐐애액—-

섬찟한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날아와 마차의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음?!”

다행히 화살은 령 매가 붙잡아 아무도 다친 이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 생각이 멎을 즈음.

“위일청!!!!!!”

누군가 라버니의 이름을 외쳤다.

“네 놈이 뺏어간 무명, 오늘 이 형님이 다시 회수해가마!!!”

“… 자칭 색마가 역으로 함정을 파고 있었나보네요오.”

“글쎄. 주변에 느껴지는 기운은 몇 안 되는데 가가는 어떻게… 가가?”

령 매의 의문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엔 무언갈 골똘히 생가하는 위 오라버니의 표정이 있었다.

“음… 설마…”

“가가, 무슨 일 있어요?”

“오라버니, 왜 그래?”

“아니… 그…”

위 오라버니가 어딘가 이상해보여 뭐라 말하기도 전에 또 한 번.

자칭 색마가 밖에서 외쳤다.

“이 형님의 이름을 벌써 잊었더냐!!!”

“설마…”

아까부터 형님, 형님하길래 그저 광오한 놈이구나 생각했는데 위 오라버니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가보다.

나의 이런 생각을 증명하듯, 위 오라버니는 창문을 열어 자칭 색마를 바라보더니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혀… 형님…”

…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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