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0 외전 : 인자검 백리소현 - (17)
날카롭게 벼려진 검기가 한 줄기 빛이 되어 청운 도사에게 쏘아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근래 들어 점점 령 매가 자주 말하곤 하는 심기체의 일치가 뭔지 체득하고 있다 확신할 정도로 물 흐르듯 정교한 일초.
하지만…
“흐읍…!”
화살 같이 날카로웠던 내 검기는 그물 같이 촘촘하고 끈끈한 청운 도사의 검기에 막혔다.
검기가 결코 끊이지 않고, 태극의 묘리를 따라 회전이 더해지며 더욱 강해지곤 하는 무당의 자랑, 면면절기였다.
청운 도사는 한 차례 몸을 빙글 돌더니 내 검기를 흘려내곤 역으로 쇄도해 들었다.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거리를 벌리며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심하십쇼!”
무당의 검법은 후발제인이라고 말해 놓고선 꼭 그치만은 않다는 듯 이번엔 청운 도사가 검기를 흩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북두칠성을 그리듯 동시에 7개의 요혈을 노리며 나를 덮쳐드는 검법.
피해야 할까, 맞받아쳐야할까 짧은 고민 끝에 나는 일단 맞부딪치기로 결정했다.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니깐.
“사양무광(斜陽無光)”
해가 기울고, 세상에 빛이 사라지는 심상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르자 검기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며 청운 도사의 공격을 막아 냈다.
‘빈틈…!’
반격을 성공하는 순간 한 차례 그물 같이 촘촘했던 청운 도사의 검기 사이로 틈이 보였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자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그 빈틈을 노려들어갔다.
사일검법의 마지막 절초, 후예사일을 제외한 최강의 초식.
“구곡진척(九曲箭剔)!!”
그리고 그 초식이 내 손끝에서 펼쳐지는 순간.
“어?”
시야가 암전됐다.
*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되찾은 감각은 청각이었다.
“… 끼야, 너는 진짜 무당이란 새끼가 태극검이나 쓰지 왜 괜히 헌허칠성검법 같은걸 써서…”
“아니… 정말 비등했습니다, 누님! 제가 큰 누님을 해하려던 게 아니라…”
“어쭈? 대가리를 다시 들어?”
“… 다시 박겠습니다. 근데 차라리 때려주시면…”
“그건 소현 언니가 일어나면… 응?”
다음 순간 느껴진 건 내 머리에 닿은 작지만 따스한 손길이었다.
“언니. 정신이 들어?”
“… 령 매야?”
“괜찮아?”
“응. 아야…”
몸을 일으키자 배가 얼얼했다.
자연스레 아픈 부위에 손이 올라가자 내 손 위로 령 매의 손이 포개졌다.
“가만있어. 청운, 너 이 새끼. 내가 무당 한 번 뒤집어 엎어 줘?”
“… 억울합니다다, 누님. 진짜 대등한 비무였다니깐요? 저도 큰 누님이 이렇게까지…”
“쓰읍.”
“…”
아까부터 령 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싶어 청운 도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보자 그곳엔 뒷짐을 진 채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있는 청운 도사가 보였다.
“… 령 매.”
“어, 언니.”
“청운 도사님이 하는 건 무슨 수련이야?”
“수련은 무슨. 벌 주고 있는 거지.”
“벌? 무슨 벌? 청운 도사님이 왜?”
“감히 언니를 공격한…”
“령 매, 그러지 마.”
“…”
조금 강하게 말하자 령 매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 도사님도 일어나세요.”
“하… 하지만…”
“령 매가 그냥 누님이면 제가 큰 누님이잖아요? 제 말도 들어 주세요.”
“… 예.”
청운 도사가 눈치가 없어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내 말에 따라주었다.
청운 도사가
“령 매.”
“… 어, 언니.”
혹시나 내 목소리가 너무 차갑진 않을까, 가시 돋치진 않았을까.
령 매는 은근히 속이 여리니깐 상처 주지 않게끔 최대한 애쓰며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비무였어. 무인끼리의 비무에서 다치는 일은 흔히 있는 거잖아.”
“… 그렇지.”
“령 매도 관영이랑 서로 주먹다짐까지 했으면서 나는 정당한 비무 중에 당한 건데 그거 가지고 청운 도사님을 벌주면 내가 어떻게 또 비무를 해? 나도 낯부끄럽고.”
“…그렇지만 언니. 비무도 어느 정도 규칙이란 게 있잖아. 적당히 실력도 맞추고, 3수도 양보해주고, 다치지 않게끔 조절하는 게 고수의…”
“령 매.”
“… 응.”
“말했잖아. 정말 대등했어.”
“응?”
내 말을 듣고 령 매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바를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령매에게 말했다.
“… 대등하게 겨뤘다고.”
“진짜?”
“내가 그렇게 약해 보여?”
“그건 아니야. 나는 언니 실력 잘 알지. 그러니깐 더 음…”
령 매가 말을 멈추더니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방금까지의 귀여운 령 매가 아닌, 무인 독고령의 얼굴이었다.
“얌마.”
“예, 누님!”
“비무 양상, 읊어.”
“그러니깐…”
령 매의 말 한마디에 청운 도사님은 비무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말들은 실제 비무 양상과 똑같았다.
“응, 맞아. 청운 도사님이 말한 그대로야.”
“… 그럼 안 되는데.”
“응?”
“언니, 완맥 좀.”
“완맥?”
“응.”
무인의 완맥은 함부로 남에게 내줘선 안 된다.
맥을 짚어보는 것으로 무인의 내력과 자주 쓰는 무공들을 단번에 알 수 있으니깐.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이 될 위험이 있는 상대나 비밀을 누설할 위험이 있는 사람한테나 그런 거지, 령 매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기에 나는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완맥을 내주었다.
“…”
완맥을 통해 들어오는 령 매의 내공을 느끼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만을 한참.
령 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즈음, 령 매가 눈을 떴다.
“언니.”
“왜 그래?”
다시 뜬 령 매의 눈망울이 참 예쁘다 생각하고 있던 중, 갑자기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고생했어.”
“응?”
“이제 하나 남았다.”
“… 내가? 하나 남았다고? 뭐가??”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 수 있었지만, 굳이 되물었다.
확언을 받고 싶어서.
“환골탈태까지 앞으로 벽 하나만 더 깨면 될 거 같다고.”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 하나 남았다고? 내가?”
“심, 기, 체. 기억해? 내가 맨날 말하던 거?”
“기억… 하지.”
깨달음을 뜻하는 심,
내공을 뜻하는 기,
그리고 육체를 뜻하는 체.
환골탈태는 심기체의 균형 중 하나가 깨지며 육신이 다른 두 개를 쫓아오는 과정이라고 령 매는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타고난 육신이 뛰어나도 환골탈태를 거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고, 또 삼류 무공보다 명문의 무공이 더 대단한 이유가 깨달음이 더 깊어서라고 령매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언니는 이미 내공 쪽은 충만했고, 육체 쪽도 그간 열심히 단련했나보네. 가장 어려운 깨달음의 단계가 남긴 했는데… 그래도 이제 하나 남았다고 생각해.”
“그… 그렇게 쉽게 돼?”
“전에 말했잖아. 환골탈태는 뭐 무조건 강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육체가 무공에 적응하는? 그런 단계 같은 거라고. 내공만 무식히 많아져서 환골탈태 하는 경우도 있어.”
“그럼…”
“응.”
령 매는 굳이 답하지 않고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 행위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답이 되었다.
“아아…”
“… 물론 그 깨달음 하나를 못 얻어서 평생을 헤매는 무인도 있지만, 걱정 하지마.”
령 매가 씨익 웃으며 천하에 가장 든든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도와줄게.”
그것만으로도 이미 환골탈태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흘린 땀을 씻어내고자 욕실까지 들린 뒤, 나는 그제야 일어난 위 오라버니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성취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해요, 소현.”
“아니야, 오라버니. 그… 령 매가 오랜만에 봐줬는데 그사이에 발전이 있었나 봐.”
“그래도요. 누구나가 다 노력한만큼의 성취를 얻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응…”
오라버니의 말은 기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령 매.”
“응?”
“… 내가 진짜 벌써 그 정도의 단계에 올라선거야?”
“못 믿겠어?”
“그건 아닌데 조금 잘 안 믿겨서…”
그때, 옆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청운 도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누님, 제가 말해도 될까요?”
“해.”
“흠흠… 큰 누님. 큰 누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땐 오히려 큰 누님이 왜 그리 자신없어하시나 이해가 안 될 정도입니다.”
“그 정도인가요?”
“검후님께서 꾸준히 수련을 봐주시고, 검신의 진전을 이어받아 현재는 강호삼신이 되신 누님, 게다가 위 대협 또한 강호 백대고수에 들어가 있지 않을 뿐 상위권에 있을 실력입니다.”
청운 도사님은 잠시 뜸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솔직히 이렇게 세 분의 지도를 꾸준히 받는 사람이라면 어지간한 재능의 사람도 충분한 성취를 이룰텐데 누님은 가진바 내공마저 많으십니다. 인자검이란 무명도 괜히 생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저 차기 무당파 장문인이 될 이상한 놈도 언니한테 진심으로 반격한 거고.”
“그… 렇구나.”
이렇게까지 얘기를 들었는데 더 겸손을 떨면 그건 오히려 기만이겠지.
언젠가부터 물집으로 가득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응. 순순히 기뻐할게, 후훗.”
그러자 잠자코 있던 관영이도 대화에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요오. 언니가 다 노력해서 쟁취한…”
“문주님!!”
“응?”
관영이가 이제 막 운을 뗐을 뿐인데 갑자기 끼어든 하오문도 때문인지 관영인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금세 문주의 얼굴로 변했다.
“무슨 일인가요?”
“죽여주십쇼.”
“…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건데요?”
“수감자가 도주했습니다.”
“엑?”
수감자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 산중호걸 유광이요?”
“예. 헌데 그자가 갇혀 있던 뇌옥에 이런 서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
서신을 받아 든 관영이는 조금 읽다가 이내 그 서신을 위 오라버니에게 건네주었고, 오라버니는 그 서신을 내게 건네줬다.
“뭔데뭔데?”
“같이 보자, 령 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들이민 령 매와 함께 받아 든 서신을 같이 읽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조만간 네 가족을 욕보이러 찾아가마. - 진 색마(眞 色魔) -]
그 아래로는 입에 담기도 꺼림칙한 저주의 말들이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이 천박한 농담으로 오라버니의 부인인 나와 관영이, 그리고 령 매를 욕보이는 말이었고 무엇보다…
“…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는 사람인가 보네.”
관영이와 령 매의 아이에 대한 험악한 욕설이 적혀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진 까닭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지하랑 지약이를…”
령 매가 많이 화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태껏 지켜본 그 어떤 때보다 가장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