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9 외전 : 인자검 백리소현 - (16)
“… 으음.”
아침 햇볕이 눈부시게 비치며 동시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젯밤 정사의 후유증으로 조금은 뻐근해진 다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 있었다.
‘씻지도 않고 바로 잤네.’
평상시라면 상공과 정사를 치른 뒤, 몸을 정갈하게 씻고난 뒤에야 침소에 들곤 했는데 어젯밤은 유난히 격렬했기에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 나른함에 안주하여 조금 더 누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두 아이들보다 뒤처지는 내게 그런 느슨함은 허용되지 않았다.
말은 느리지만, 의지까지 느리진 않았으니깐.
“흐읏… 어?”
기지개를 크게 켜며 몸을 풀어 주던 차, 그때서야 눈에 들어온 방 안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들어온 지는 모르겠지만 령 매와 관영이가 상공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흐르는 희끄무레한 액체를 보자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됐다.
아마 내 차례가 끝난 뒤, 령 매와 관영이랑 2차전을 치렀나보다.
모처럼 하오문에 들렀고, 아이들 또한 잘 자는 것을 확인한 뒤 아침 수련을 위해 나서려던 차.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소현?”
“아, 상공. 일어나셨어요?”
“잠시 깼습니다. 조금 더 잘까 싶네요. 소현은 아침 수련을 나서는 건가요?”
“네, 후훗. 어제 령 매와 관영이가 즐기는 모습을 보지 못 해서 아쉽네요.”
“다음에 또 숙소를 찾게 된다면 그때 같이 즐기시지요.”
“그럴게요. 조찬을 미리 숙수님께 부탁드릴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네.”
이제는 상공이 된 위 오라버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삼매진화를 일으켜 간단하게 몸을 정갈하게 하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하아…”
자연스레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검을 쥔 왼손에 힘이 꾸욱 들어가고, 검이 없는 오른손은 아랫배에 올라갔다.
‘아이라…’
옷 위로 아랫배를 훑자 옷 너머에 있을 흉측한 상처들이 느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픔도 느껴지지 않은 아문 상처지만, 흉터는 가슴속에 다른 종류의 아픔을 내게 주곤했다.
잉태, 그리고 출산.
여성으로 태어나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
상공과 함께 부인이 된 다른 두 명은 겪었지만 아직 나는 겪어본 적도, 겪을 수도 없는 그 무언가.
그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던 관영이도,
그 괄괄하고 난폭하던 령 매도,
아이를 낳고난 뒤에는 어엿한 여인의 느낌을 풍기곤 했는데 홀로 정체된 이 기분이 가끔 나로 하여금 진흙탕에 가라앉는 듯한 우울한 기분으로 인도하곤 했다.
그리고 이 기분은 언제나 결국 ‘무(武)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수렴하곤 했다.
내 어머니에게 씨를 주어 나를 낳게 만든 아비란 작자는 그 알 수 없는 무를 위해 내 뱃 속을 헤집어 영단을 갈취했고, 지금 나는 상처 난 하단전을 복구하고자 환골탈태를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려고 무를 쌓고 있다.
결국, 같은 무(武)였다.
“모순이네.”
자식을 가두고, 방치하고, 사랑 한 줌 주지 않고서 끝끝내 자식의 속을 헤집어 얻은 영약으로 아비가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리하여 얻은 아버지의 무는 령 매의 무력 앞에 쉽사리 허물어졌다.
그 충격이 어지간히도 컸는지 지금은 백치가 되어 참회동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 노망난 아비가 떠오르자, 아물었을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는 환상통이 느껴졌다.
아…
너무 많이 생각했다.
이러면 안 좋은데, 우울한 기색을 내비치면 다른 아이들과 상공이 걱정할 텐데, 내가 지금 걱정이 앞서서 수련을 내팽개치고 멍하니 서 있을 시기가 아닌데.
끈적한 우울함은 점차 형태를 갖춰 내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침잠하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의식이 흐릿해질 즈음.
“큰 누님?”
“… 안녕하세요, 도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청운 도사가 내 의식을 되돌려놓았다.
“괜찮으십니까? 아침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 괜찮아요. 그보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냥 일어난 김에 누님과 위 대협께 문안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사문에서 기침한 뒤, 큰 어르신들께 인사하러 가는 버릇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서요.”
“후훗. 령 매는 아직 자고 있으니 나중에 제가 전달해드릴게요.”
“예.”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청운 도사를 보고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근데 도사님, 호칭들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어떤 호칭 말씀입니까?”
“관영이는 하오문주라고 부르고, 령 매는 누님이라 부르고, 저는 큰 누님인데 또 상공께는 위 대협이라고 부르네요.”
“아… 하하. 형님이라 불러본 적이 있는데 그냥 대협이라 불러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저는 왜 큰 누님인가요?”
청운 도사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문주님은 문주님이니깐 아무래도 삼대 제자인 제가 당연히 존칭하는 게 맞죠.”
“그러네요.”
“또 누님은 제가 음… 무인으로서의 존경심을 담아 부르는 거라 그냥 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거 같았어요. 약간 사파같긴 한데 또 입에 담는 분이 도사님이니깐 괜찮겠죠, 후훗.”
“그런 두 분이 믿고 의지하는 분이 큰 누님이시니 큰 누님인 거죠.”
“… 저를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관영이와 령 매가 나를 의지한다고?
“… 그랬나요?”
“저는 아무래도 제 3자니깐 크게 게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 3자인 제가 봤을 때 누님과 문주님이 가장 의지하는 분은 큰 누님과 위 대협이셨습니다.”
“…”
“혹시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그냥 인자검 여협이라고…”
“아니요.”
마음에 안 들리가 있나.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믿고 신뢰하는 두 명이 타인이 보기엔 나를 가장 의지해주는 거 같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로 내가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끼고, 또 의무감을 느꼈을 지 청운 도사는 알까?
갑자기 어깨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올려진 것만 같았다.
이게 아마 책임감이겠지.
그 둘의 신뢰를 내가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책임감.
“청운 도사님.”
“네, 큰 누님.”
“아침 수련을 하려고 하는데 비무의 상대가 되어 주시겠어요?”
“때마침 저도 아침 수련을 하려고 했습니다.”
허리춤에 묶인 칼집을 툭 치며 청운 도사가 웃어 보였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군요.”
“어머.”
가만 보면 청운 도사도 약간 령 매랑 닮은 거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곤 나는 웃으며 칼을 고쳐잡았다.
그래, 우울해하며 멈춰있을 시간마저 아까우니 그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둘러야겠다.
하오문의 문도 중 한 분에게 비무장을 안내받은 뒤, 나는 청운 도사와 함께 비무장으로 나왔다.
“… 이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곤란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도착한 비무장은 넓고, 텅 비어 있었다.
요 근래 강호에서 이런저런 눈초리를 받는 하오문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이른 아침 시간이라도 수련을 거를 리는 없었다.
아마 하오문주인 관영이의 일행이라고 자리를 비워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넓은 비무장을 써 볼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기회라 여기고자 합니다다.”
“어머, 비무라고 했는데요?”
“훈련은 실전같이, 또 실전은 훈련같이. 사형께서 자주 하신 말씀이죠.”
그러면서 청운 도사가 검을 뽑아 들자, 나도 똑같이 발검하며 기수식을 취했다.
“좋은 말씀이네요. 저도 동의해요.”
“잘 부탁하겠습니다, 큰 누님.”
“저야 말로요. 선공을 양보해주시겠어요?”
강호에서 비무란 언제나 고수가 하수에게 선공으로 3수를 양보해 줌으로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매번 선공을 양보받는 입장이었고, 이번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청운 도사는 조금 특이한 괴벽을 가진 데다가 령 매의 심부름꾼 느낌에 자청해서 마부일하고 있지만, 차기 무당파의 장문인으로 일찍이 낙점된 유망주.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운 도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보다.
“저는 결코 큰 누님이 저보다 하수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말이죠…”
“기쁘네요.”
“그렇기에 선공을 내어드리는 것이 결코 큰 누님이 저보다 하수라 여겨 내어드리는 거라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저…”
기수식을 취하는 것만으로 기세가 일변한 청운 도사를 보며 검을 고쳐잡았다.
“저희 무당의 검이 후발제인(後發制人)의 검술이니깐요.”
상대에게 선을 내주고, 후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검술.
“그럼 잘 부탁할게요.”
“저야말로, 한 수 배우겠습니다.”
검을 붙잡은 손을 크게 뒤로 당기며 마치 활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싫어하던 점창의 검술, 하지만 알고 있던 것도 익힌 것도 이것밖에 없어 쓰는 검법.
사일검법(射日劍法).
사문은 끔찍이도 혐오했지만, 무공까지 그러하진 않았다.
그나마 이 검법이라도 익혔기에 나도 강호에 머무를 수 있었으니깐.
아래에서부터 내공을 끌어올리고, 혈도를 따라 온 몸을 도는 내공은, 이윽고 칼을 붙잡은 손에 도달하며 화살을 쏘아내듯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검법의 이름 그대로, 마치 내 검이 태양(日)을 향해 날아가는(射) 화살처럼.
첫 초식은 늘 그랬듯이, 가장 많이 연습하고 가장 익숙한 초식.
“일수초현(日輸初現)”
비무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