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6 외전 : 하오문주 은관영 - (13)
언니의 말대로 창밖엔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항상 바쁘게 살아오시던 전대 문주님도 비가 오는 날이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시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일이 많았는데 독고 언니도 무슨 생각인지 술 잔을 손에 들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 술 안 마셔요?”
“응? 아...”
언니는 잠시 술 잔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누가 생각나서.”
“… 누구요?”
“니네 문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랑 같은 사람을 생각한 게 놀라 당황했지만, 나는 평소처럼 장난스레 툭 말을 던졌다.
“이젠 제가 문주인데요오?”
“그치. 이젠 네가 문주지, 크큭.”
웃으며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 언니를 보며 나도 따라 잔을 비웠다.
“으으…”
이렇게 쓴 걸 도대체 언니는 왜 좋아할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술 동무가 필요하셨어요?”
“뭐 그런 것도 있고.”
언니는 술잔을 매만지다 나를 보며 툭 말을 던졌다.
평소처럼 가볍게.
“그냥 네가 한 잔 마시고 싶어 할 거 같아서?”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사려 깊은 목소리로.
“… 누구세요오?”
“응?”
“제가 알던 독고 언니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에. 누군진 몰라도 우리 언니로 변장한 건 실수랍니다?”
“뒤진다?”
“헉! 진짜 언니예요?”
“야이 씨…”
“히힛, 농담이에요.”
평소답지 않게 배려심 넘치는, 마치 소현 언니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독고 언니를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괜히 의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이유 모를 의무감에 꾸욱 참고 있었는데…
“지약이가 니네 문주 많이 닮았더라. 일부러 이름에 ‘약’자 넣은 거지?”
“… 네?”
“아니야?”
툭 던진 언니의 말에.
“…”
할 말을 잃고 잠시 술 잔만 만지작거리게 됐다.
진짜 눈치 없으면서 이럴 땐 눈치가 빠른 게 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오?”
“가가도 알고 있었을 걸?”
“… 그런가요? 하긴 언니가 알 정도면 다른 사람도 다 알겠네요오.”
“조금 시건방 떨어도 오늘은 봐줄게.”
“… 왜 그러세요오, 진짜아…”
아,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드는 순간, 이미 코끝이 찡해서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톡.
술 잔에 무언가 떨어져서 봤더니 내 눈물이었다.
“아… 이게 왜…”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쉽게 되돌릴 수 없었다.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 울음은 눈까지 차올라 눈물로 바뀌어 다시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언니가 괜히… 흑…”
“… 이리 와.”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또 한 번, 분홍빛 비단이 넘실거리더니 따스한 무언가 내 머리에 닿았다.
“어휴… 힘들면 그냥 좀 쉬지, 멍청아.”
“흐윽…”
머리에 얹혀진 언니의 손이 자신을 향해 내 머리를 당기자, 나는 거부할 수 없이 천천히 언니의 품에 안겼다.
“울어. 울고 털어내.”
그 말을 기점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버티던 나는 무너졌다.
*
“이제 다 울었냐?”
“… 네에.”
너무 많이 울었는지 코끝이 다 아팠다.
이렇게 속 시원하게 울어본 게 얼마만일까.
적어도 문주가 된 이후로는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던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오열하다시피 울었었는데 이제 좀 진정이 되자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방금까지 내가 얼굴을 파묻고 울던 독고 언니의 가슴팍이었다.
“옷 나중에 빨아드릴게요.”
“그래야지, 크큭. 지하랑 지약이도 이렇게 울진 않았는데.”
“…”
평소와는 다르게 독고 언니가 나를 놀리니깐 괜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시원하게 속에 있던 응어리를 다 털어낸 뒤라 그런지 후련하기도 했다.
“… 웬일이래요. 언니 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모습도 보여 주고.”
“그냥 내가 해야겠다 싶어서.”
“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돌아온 말은 사뭇 진지했다.
“최근에 내내 너 힘든 게 눈에 보였으니깐. 내가 도와줄 방법이 너 두드려패는 거 밖에 없을 줄 알았냐?”
“어… 네.”
“야이 씨.”
“헤헷, 농담이에요오.”
욕을 하고 나서야 겨우 평소의 독고 언니 다웠다.
“… 저 그렇게 힘들어 보였어요?”
“말은 안 했지만 가가랑 소현 언니는 내내 너 걱정하고 있었어.”
“…”
티났구나.
“그러다가 음… 솔직히 말해서 그냥 술 마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려왔는데 네가 보이더라고. 네 얼굴이 뭐라고 해야지…”
언니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뜬금없는 이름을 내뱉었다.
“… 하오문주랑 닮았더라고.”
“제가요?”
“어, 네가.”
이젠 내가 하오문주지만, 언니가 말하는 하오문주는 매번 전대 문주님을 뜻하곤 했다.
다른 사람은 독고 언니가 나를 하오문주로 인정 안 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한테 전대 문주님이 매우 특별하고, 여전히 내게 하오문주인 것처럼.
언니에게도 전대 문주님은 아마 특별한 사람이었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언니는 또 한 잔, 백주를 들이키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크으… 네가 하오문주랑 너무 닮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깐,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더라고.”
“… 잘하셨어요.”
“그래?”
“네. 진짜 힘들었거든요.”
“…”
“고마워요.”
“됐어.”
언니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면서 또 한 잔, 술을 홀짝였다.
“… 나도 네 덕분에 마음을 덜었으니깐.”
“언니가요오?”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술 더 없어?”
언니가 어느새 텅 빈 술병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그 새 한 병을 다 비웠네.
“하오문에 술 맡겨 놓으셨어요? 비싼 술인데… 그것도 다 저희 문파 재산이거든요오.”
“니네 문주한테 맡겨놨어.”
“그만 마셔요. 한 병으로 제한했었잖아요.”
“칫.”
언니가 혀를 찼다.
이제 슬슬 눈물도 다 흘렸겠다 손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나는 배실배실 웃었다.
“그보다 언니가 용케도 여기로 왔네요오.”
“… 뭐가.”
“오늘도 오빠랑 야한 일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오?”
“그냥 그보다 네가…”
“지금이라도 갈래요오?”
“엑?”
이 한 마디로 대화의 주도권이 금세 바뀌었다.
“… 소현 언니랑 하고 있겠지, 뭐. 오늘만 날이 아니라…”
“셋이서 해도 좋잖아요오? 언니는 같이 잘 안 하려고 하더라.”
“아니 부끄럽잖아…”
“헤에~”
웃으면서 언니한테 다가가자, 그녀는 휙 내게 등을 돌렸다.
방금까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던 언니는 어디 가고 이럴 때 보면 또 동생 같다.
누구나 다 언니가 음란하고, 음탕한 건 아는데 정작 언니는 완강하게 자기는 음탕하지 않다고 저렇게 구는 게 참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
“같이 할까요오?”
“아니 그…”
“왜요오?”
뒤에서 살포시 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귓가에 속삭였다.
“싫으세요오?”
“귀… 귀에 속삭이지 마!”
“저는 갈 거예요오.”
“… 어?”
언니가 당황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가서 오빠 품에 안겨서 좀 더 마음을 달래고는… 오빠랑 사랑을 나누며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내려고요오.”
“가… 가게?”
“그래서 물어봤잖아요. 아까 같이 가실거냐고요오.”
“…”
언니는 고민에 빠졌는지 비어 버린 술잔만 매만졌다.
사실 언니의 대답이 뭐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 속은 알기 참 어렵다고들 하는데 언니에 한해선, 그것도 야한 일에 한해선 이보다 알기 쉬운 게 없다.
그리고 지금이 놀릴 때지.
“아, 뭐… 안 가실거면 문도에게 부탁해서 술을 좀 가져오라 말할게요오.”
“아니… 그으…”
“백주로 드리면 되죠? 안주도 좀 드릴까요오?”
“으으…”
언니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상황이 너무 뻔히 보여서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나오지 않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가 볼…”
“자… 잠깐만!!”
“네에?”
너무 히죽거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뒤돌아보았지만, 언니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술 기운이 돌기 시작한 걸까?
아마 그보다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가… 같이 ㅎ…”
“네에? 잘 안 들리는데요오.”
“… 같이 하자고!!”
“에헤헷.”
슬며시 언니를 껴안자, 독고 언니는 다 포기한 듯 내 손을 맞잡았다.
결국 독고 언니는 참 음탕하고 밝혀서 절대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으니깐.
“같이 씻고 갈까요오?”
“… 응. 가가 보러 가니깐…”
“어머 어머.”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독고 언니를 보자 내가 다 가슴이 설레였다.
평소엔 그렇게 날뛰다가 또 밤만되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위 오빠도 금세 빠진 거 아닐까.
진짜 이런 모습 볼 때마다 나도 설레는데 남자인 오빠는 더 하겠지.
“그럼 갈까요, 언니?”
“응.”
아까까진 독고 언니가 언니였다면, 이젠 내가 언니가 된 기분으로 언니의 손을 붙잡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 쪽 지부의 욕탕은 제법 넓었고 운취가 있는 노천탕이라 기분 좋게 욕실로 향했는데 아쉽게도 선객이 있었다.
“… 하필 누가 안에 있네요. 잠시만요, 언니.”
누가 있나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관영. 우연이네요.”
“… 그러게요오.”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마침 안에 있던 건 위 오빠였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