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215화 (215/225)

EP.215 외전 : 하오문주 은관영 - (12)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예, 문주님.”

산중호걸 유광과 함께 온 떨거지들은 따로 사람을 시켜 처리해두고 우린 기절한 그만 챙긴 뒤 다시 여로를 떠났다.

유광을 사주한 이와 만나기로 한 접선지가 그리 멀지 않았고 독고 언니가 따로 점혈까지 해두었기에 여행길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응? 내가?”

“네, 오늘은 언니랑 소현 언니가 오빠랑 같이 밤을 보내시면 될 거 같아요.”

아까 언니가 자고 있을 때 나눈 얘기를 다시 나누게 된 걸 빼고 말이다.

독고 언니는 참 솔직하지 못 해서 이제는 같이 밤을 보내기도 하고 얼마나 음탕하고, 음란한 지 누구나 다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사실을 숨기려고 든다.

문제는 언니가 거짓말을 정말 못 하고 속 마음이 얼굴로 다 드러나서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참기 힘들게 만들 뿐이지.

지금도 그럻다.

“흐… 흐으음… 그래?”

“왜요, 싫으세요오?”

“응?”

머리카락을 배배 꼬으면서 얼굴을 살짝 붉히는 저 모습은 같은 여자가 봐도 괴롭히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솔직하지 못한 언니 같으니라고.

근데 저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자꾸만 괴롭히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튼 괴롭히는 건 다 독고 언니 탓임.

“그럼 오늘은 저랑 소현 언니랑 둘이서만…”

“시… 싫다고 한 적은 없거든!”

이거 봐라.

미끼를 드리우면 무조건 무는 물고기, 그게 독고 언니다.

이 반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매번 괴롭히게 된다.

예전엔 진짜 때릴 것만 같아서 두려움에 적당히 괴롭히곤 했는데 요즘엔 독고 언니가 말만 험하게 하고 절대 안 때릴 거란 사실을 아니깐 더 괴롭히게 되는 거 같다.

“역시 음란검…”

“뒤진다?”

“헤헤…”

그래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딱 여기까지만.

적당히가 중요하다.

나는 귀여운 독고 언니가 좋은거지, 그녀를 화나게 만들고 싶은 생각까진 없으니깐.

*

미리 연락해둔 하오문 지부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이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오셨습니까, 문주님?”

“오랜만이에요, 윤 총관님.”

“이제는 소문주 후보가 아니라 문주님이니 하대하시지요.”

“그럴 순 없죠. 전대 문주님도 모든 문도에게 존대를 했으니깐요.”

“… 예.”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 윤총관의 마음을 나도 이해는 했다.

아직도 하오문 내에서 많은 문도들은 전 문주님을 그리워하고 있을테니깐.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깐.

그 때.

“관영아, 여기 음식 잘 해?”

“글쎄요. 윤 총관님, 숙수님의 요리 실력은 괜찮나요오?”

“이 일대에선 최고라고 보장합니다. 식사부터 준비해둘까요?”

“네. 그래주시겠어요?”

조금 우울해지려던 순간, 독고 언니가 슬그머니 옆에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 일부러일까?

아마 배려심보다 무신경함이겠지만, 이럴 땐 독고 언니의 무신경함이 고마웠다.

“언니. 먼저 안에 들어가있으실래요?”

“응. 지약이도 내가 데리고 있을까?

“그럼 고맙고요오.”

“지약이 이리 와.”

지약이를 건네주자 언니가 두 손 가득 지하와 지약이를 껴안곤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따로 먹으려고?”

“네. 아무래도 문주 일을 할 때니깐요.”

“이열~ 하오문주.”

“히힛, 엄마 일하고 올께 지약아.”

쪽.

부드러운 이마에 입술을 맞추자 지약이가 간지러운 듯 눈을 깜빡거렸다.

감정 표현이 잘 없는 아이긴 하지만, 아마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독고 언니가 좋다고 꼭 끌어안으면 팔로 언니를 내치기도 해서 독고 언니가 지약이한테 미움 받는다고 징징거렸던 걸 생각해보면 적어도 감정표현이 없을 뿐이지 싫으면 싫다고 확실히 표현하는 아이니깐.

“그럼 먼저 먹을게. 빨리 끝내고 와.”

“네에~”

“관영,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적당히 하고올게요, 오빠.”

“이따 봐, 관영아.”

“네, 언니.”

그렇게 모두를 먼저 안으로 보내고 나는 표정을 바로했다.

“그럼 일하러 가볼까요오?”

이제부턴 하오문주 은관영이니깐.

한 때는 독고 언니가 몰라줘서 섭섭함에 뭐라고 한 적도 있었지만, 합비의 장원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이젠 모두가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안다.

“… 천무맹쪽 정보는 여전히 빈약하네요오.”

“죄송합니다. 정보원을 집어넣으려고 해도 그 쪽이 워낙 방비를 잘 해두어서…”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진 않을테니깐 빈틈을 계속 노리는 방향으로 가보죠. 그 쪽에서 여는 흑시(黑市)에는 계속 참가중이죠?”

“예. 꾸준히 동향을 파악 중에 있습니다. 그건 이 쪽 자료로.”

윤총관이 서책을 넘겨주자 나는 재빨리 내용을 훑으며 머릿 속에 정보들을 쑤셔넣었다.

이 모든 방식은 전대 문주님이 정한 방식인데 총관을 따로 정해두지 않는 대신 문주님이 부지런히 강호를 유람하며 각 지부에 힘을 실어주는 특이한 방식이었다.

소문주 후보일 땐 그저 효율적으로 여러 조직을 운영하는구나 했었는데 막상 문주직에 오르니깐 이 방식은 문주가 힘든 일을 도맡아가며 문파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전대 문주님은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소화해내셨는지.

“흑시 쪽에 최근 인력시장이 활발해졌네요?”

“아무래도 사천 일대에 천무맹이 자리잡고 그 쪽 세력도가 매일 같이 바뀌고 있어서 용병의 수요가 높아졌습니다.”

“하긴…”

천무맹이 자리를 잡은 곳은 사천 일대였다.

그리고 그 근방에 위치한 호남, 귀주까지 위세를 떨쳤다.

기존에도 귀주에서 흑시를 열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데다가 호남에는 사파 최대 세력 중 하나 장강수로채가 자리한 곳이니 그러리라 생각했다.

다만 사천 일대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은 오롯이 이번 정파의 내전 때문이었다.

사천 일대가 정마대전 당시 마교의 침공으로 한 차례 쑥대밭이 되었다.

그 다음엔 혈교와 손을 잡은 당문의 착취로 완전히 죽은 땅이 된 이후로 힘을 잃은 뒤에 독고 언니가 소현 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인근의 점창파까지 조져놓으면서 사천 일대의 문파는 죄다 사라졌다.

게다가 당시 당문에 힘을 실어주었던 인근 문파들마저 싹 다 무림맹의 관리하에 힘을 잃으며 되려 가장 정파가 강성했던 사천 일대가 이제는 힘을 잃고 말았으니 천무맹은 그 빈자리를 잘 파고 들었던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별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

이 쪽은 그래도 잘 보이려고 꼬박꼬박 정보를 갖다주곤 하는데 정작 무림맹 측에선 협조가 없다고 하니 속이 쓰리기도 했다.

이 또한 전대 문주님의 뒤를 이어받은 내가 해결할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속상함을 떨쳐내긴 힘들었다.

“나중에 제가 군사님과 얘기를 나눠볼게요.”

“… 예.”

그렇게 보고가 끝나고, 혹시나 특별한 일이 있는지에 대해 따로 얘기를 나누고, 추가로 지시 사항을 몇 개 얘기한 뒤 나는 자리를 떴다.

“하아…”

밖으로 나오자 답답함 때문인지 자연스레 한숨이 튀어나왔다.

‘힘들어…’

이대로 다 때려치우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고, 모든 걸 다 내게 맡기라는 식으로 문도들을 다독이며 또 무림맹에 찾아가선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며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문파의 안위를 지키고, 집으로 돌아와선 지약이를 돌보며 잠시 동안의 휴식을 즐기고.

문득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두려움에 빠졌다.

‘… 또 이러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홀로 남으면 내 안을 잠식하곤 했다.

나는 잘하고 있는게 맞을까.

문주 자리에 급하게 올라서인지 여전히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고 매번 확신이 없어서 걱정에 잠을 못 이룬 적이 많았다.

그래도 나마저 포기하면 하오문은 정말 끝이니깐이란 생각으로,

문파에 마지막까지 남기로 한 문도들을 떠올리며 매일을 버텼다.

그래, 버티고 있었다.

‘지약이한테도 미안하네.’

독고 언니와 소현 언니가 지약이를 자주 봐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 해 아쉬웠다.

게다가 위 오빠의 아내로서 내조는 잘 하고 있는걸까?

걱정은 꼬리의 꼬리를 물며 늘어져나갔고, 그럴수록 내 어깨는 처졌다.

‘… 모르겠다.’

순식간에 급격히 우울해진 마음에 아무 것도 하기 싫어졌다.

오늘은 어차피 소현 언니랑 독고 언니가 위 오빠랑 같이 자기로 했으니깐 적당히 방이라도 하나 구해서 혼자 술이나 마실까.

그런 생각에 빈 방을 찾아 지친 발걸음으로 몸을 옮기던 와중.

“왜 울상이야?”

내 시야를 분홍빛으로 넘실거리는 비단이 가렸다.

“언니가 왜 여깄어요?”

“아… 아무 일도 아닌데?”

진짜 거짓말 참 못 한다.

“술 때문이죠?”

“… 있어?”

독고 언니가 하도 술 마시고 친 사고가 많아서 위 오빠가 언니의 술을 금지시켰고 그 의견엔 나도 동의했다.

언니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오문주가… 아니지. 이젠 네가 하오문주구나. 전대 문주가 하오문 올 때마다 술은 잘 챙겨줬는데 말이야.”

하지만 언니의 말을 듣는 순간,

“같이 마실래요?”

나도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말을 내뱉는 순간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 독고 언니를 보고 황급히 내뱉은 말을 주워담으려던 순간,

“독한 걸로 가져오면…”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얘기 정돈 들어줄게.”

평소 내가 알던 쾌활한 독고 언니답지 않았다.

살짝 우수에 젖은듯한 눈빛이 나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싶게 만들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깐.”

“풉, 뭐예요 그게.”

“싫으면…”

“황주로 괜찮아요?”

같이 마시자는 뜻으로 말한 내 말을 듣고 언니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독한 백주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