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4 외전 : 하오문주 은관영 - (11)
독고 언니와 함께 지내면서 바뀐 점이 있는데, 사람은 참으면서 살면 안 된다.
짜증나는 상황이나 복잡한 감정이 있으면 일단 들이받아야한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질 이들을 감당할 만한 힘이 있어야만 하지만, 그런데서 앞뒤 가리는 일은 참 피곤하기 짝이 없다.
감정적으로도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그런점에서 독고 언니는 참 행복하게 잘 사는 거 같았다.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일단 욕부터 내뱉고, 들이받고.
한동안은 나도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그랬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 문주니깐, 문주 자리에 오른 뒤에 가능한 이러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언니를 만나기 전에 나랑 먼저 얘기하지?”
나도 독고 언니를 닮아가나보다.
*
다른 놈도 아니고 당시 일과 전혀 상관도 없는 사파의 나부랭이가 전대 문주님을 욕하고, 지금의 하오문을 비아냥거리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일 때문에 하오문의 문도들이 얼마나 눈치를 보면서 지내는데… 지가 뭘 안다고.
독고 언니랑 오빠가 그 일을 무마하고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군사와 맹주를 은근히 도와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검후님에게 부탁한 사실도 따로 들어서 알았다.
그런 노력도 모르고, 멋대로 말하는 유광이 얼마나 밉살스럽던지.
평생을 수련해온 무공이 자연스레 펼쳐졌다.
콰직!
비록 내가 뻗은 주먹이 그의 손에 막히긴 했지만,
“돈 밖에 모르는 사파 나부랭이랑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짜증나거든요?!”
“음!”
그의 턱을 향해 날린 발은 유광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겁하며 뒤로 빠지는 유광의 모습을 확인하자 조금은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어떤 개새끼가 우리 애 잠을 깨워!!!”
마차문을 박차며 튀어나온,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의 목소리가 내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속 시원하게 풀어해쳤다.
“독고 언니!!”
“어떤 새끼야?!!”
아까까지 위 오빠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자던 선녀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당장이라도 도륙낼 상대를 찾아헤매는 야차와 같은 형상으로 독고 언니가 으르렁대며 칼을 뽑아들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분노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먹잇감을 찾아헤매는 야차에게 나는 반가움을 담아 외쳤다.
“저 새끼예요, 언니!”
“저 새끼야?!”
“네!”
유광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나는 최대한 독고 언니를 부추겼다.
“저 새끼가 갑자기 찾아와서 마차를 멈춰세웠어요.”
“산적 새끼?”
“네네.”
벌써부터 언니의 칼에 분홍빛 기운이 맺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아, 언니가 많이 화났구나.
마차에서 간간히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마 지하나 지약이 중 하나가 잠에서 깼으리라.
아이들은 참 별 것도 아닌 시덥잖은 일에도 울곤하는데 독고 언니는 그런 걸 구분하지 않는다.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매번 혹시 어딘가 아픈 줄 알며 당황하는 언니였기에 지금 상황이 매우 짜증이나겠지.
그리고 나는 분노해있을 그녀에게 아주 약간의, 부채질을 더 했다.
“저 새끼가 언니보고 음란검신이래요!”
“…”
아무 말 없이 칼을 고쳐잡는 그녀를 보고 나는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오늘 이후, 유광이란 자가 함부로 음란검신이란 별호를 입에 담고 살진 않으리라.
독고 언니는 정말 음란하고, 음탕하지만…
“캬아아악!!!”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하니깐.
산중호걸 유광과 음란검신 독고 언니의 싸움은 허망하게 끝났다.
사실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못할 정도긴 했다.
“새끼야, 다시 한 번 불러봐. 내가 누구라고?”
“데… 데송합니다…”
유광이 독고 언니의 절기를 맞받아치려든 순간, 승부는 이미 끝이 났다.
첫 한 수에서 승패가 정해졌고, 남은 것은 독고 언니의 분풀이를 가장한 일방적인 구타에 불과했다.
독고 언니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음란하다거나 음탕 따위의 말로 자신을 욕 보이려든다면 그 상대가 천제라도 후려칠 사람인데 저 멍한 산적 놈은 그걸 몰랐나보다.
바닥에 우수수 이빨을 흩뿌린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있지 않을까?
“콱 씨, 디질라고.”
“데송합니다!”
독고 언니의 두 배는 될 법한 덩치를 가지고 유광은 그녀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용서를 빌고 있었다.
같이 온 산적들 또한 소현 언니와 청운 도사님, 그리고 일청 오빠가 합세해 죄다 정리해두고 점혈을 끝마쳤다.
어느새 데리고 나온 지하를 품에 안고 어화둥둥 달래고 있으면서 동시에 유광을 갈구고 있는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와 참는 게 제법 고역이었다.
“령 매! 애들 앞에서 말 조심해. 애들도 다 듣는다니깐?”
“… 지하야, 잠깐만 귀 막을게?”
“꺄학!”
독고 언니가 지하의 두 귀를 막는 걸 보고 나도 재빨리 손을 들어 지약이의 귀를 막았다.
이미 제법 많은 욕을 옆에서 엿들었겠지만, 그래도 더 엿듣는 것보다야 아이들의 정서에 낫겠지.
“그래서 산적 새끼야.”
“예!”
“날 왜 찾아왔냐?”
“그… 그게…”
“대답이 느리다?”
독고 언니는 그 말과 동시에 유광의 명치 깊숙이 발을 꽂아넣었다.
언제봐도 감탄이 나오는 참으로 깔끔한 각술이었다.
“커헉!”
“지금부터 대답 늦을 때마다 골고루 다져줄테니깐 생각 같은 거 하지말고 바로바로 대답하자. 알았지?”
“끄으윽…!”
“또 늦네?”
명치를 걷어차 호흡을 하기 어렵게 만들어놓고 대답을 강요하여 다시 한 번 후려치는 독고 언니의 잔혹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언니는 역시 재능 덩어리다.
고문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이렇게 능숙하게 유광 같은 자를 휘어잡을 줄은 몰랐다.
그 때.
[관영아, 나 뭐 물어보지?]
갑작스레 날아든 그녀의 전음을 듣고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일단 누구 사주냐고 물어보세요, 언니.]
“누가 시켰냐?”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어쭈? 덜 맞았구나.”
“정말 모릅… 끄으윽…!!!”
또 한 번 등을 뚫을 기세로 깊숙이 발을 꽂아넣는 독고 언니를 보며 나는 묘한 쾌감까지 느꼈다.
역시 독고 언니.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유광을 잘근잘근 다지는 모습은 기가 막혔다.
눈을 하얗게 뒤집고, 입에 거품까지 물며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유광이였으나 여전히 사주한 사람을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나는 확신했다.
[정말 모르나 보네요. 잠깐 숨 돌릴 틈 좀 줘보실래요오? 그럼 알아서 불 거 같은데.]
“야, 산적 새끼야.”
“끄르륵…”
“새끼야, 숨 셔. 너무 편하게 죽으려고 한다.”
“그… 그마안! 그만 때리십쇼!!”
언니가 살짝 손을 들어올리자 기겁하며 자세를 낮추는 유광을 보고 그 사이에 약간의 안쓰러움마저 들었다.
“저… 저는 정말 모릅니다! 그저 막대한 착수금을 받았으니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이야~ 생각보다 너 대단하구나?”
“예?”
“의리 있어, 의리 있어.”
언니가 유광의 머리를 툭툭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광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사… 살려주십쇼! 저는 진짜 아무 것도…!”
“크으~ 의리의 사나이! 좋아, 멋져! 이야… 사파 새끼들도 다 의리있구만. 그치, 관영아?”
“그러게요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속 보이는 뻔한 연극이긴 했지만, 독고 언니의 압도적인 무력이 더 해지면 이야기는 다르다.
유광은 지금쯤 아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염라대왕의 환청이 들리지 않을까?
“모르면 죽어야지. 어쩔 수가 없다.”
“그쵸. 모르면 죽어야죠.”
“지하 좀 잠시 데리고 있을래, 관영아? 애들 안 보이는데서 목을 그냥…”
“여혀어어업!!!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까, 독고 언니가 지하를 넘겨주고 허공에 우스꽝스러운 칼춤을 추기 시작하자 유광은 언니의 발목을 붙잡고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언니의 검무는 그냥 어설프고 웃기기 짝이 없어 웃음을 참기 힘들었으나 유광의 흐트러진 호흡으로 보아 저 우스운 춤을 흉흉한 살기로 숨기고 있나보다.
가만보면 즐기는 거 같단 말이지.
“이야~ 사주도 받아서 나를 죽이려고 왔는데 누가 시켰는지도 모른다라…”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실력만 적당히 보고 오라고…!”
“오, 뭐야? 대화를 나눴나보네?”
“아… 아니! 서신에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서신?
“서신은 가지고 있나요오?”
“… 바로 태워버려서 없다네. 하지만 정말 서신만 받았…”
빠악!
속이 후련해지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독고 언니가 유광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뒤질라고 어디 말을 놔? 상황파악이 안 돼?”
“… 죄송합니다.”
“새끼야 넌 부채주고 쟤는 문주인데 문주님한테 존댓말 써야지, 뒤질라고.”
“푸흡.”
웃음이 터져나오자 유광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려고 하다가 또 한 대 맞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쭈? 살기가 느껴진다?”
“아… 아닙니다!!”
이래서 독고 언니가 좋다.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어떻게든 확실히 챙겨주려고 하는 거.
물론 때론 그게 과해서 무림맹주한테까지 저런 일을 강요하려 들었을 때는 조금 걱정되긴했지만, 뭐 어쩌겠나.
저게 독고 언니인데.
“그래서… 서신도 없으면 저희가 진짜 더 이상 믿을 이유가 없는데요오?”
“만나기로 약조했었습니다!!! 확인을 위해 꼭 다시 저를 찾아올 겁니다!!”
“어디서요오?”
유광이 말한 장소는 때마침 우리가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 찝찝함은 안 남기는 게 좋은데…’
일단 유광을 인질삼아 그 접선 장소까지 찾아간 뒤, 사주한 자를 만나는 게 최선책처럼 보였다.
마음이 정해지자 나는 독고 언니에게 전음을 보냈다.
[언니, 점혈 좀 잡아줄 수 있어요?]
[점혈? 기절만 시키면 되는거지?]
[그쵸?]
콰직!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독고 언니의 손이 번개처럼 유광의 뒤통수에 내리꽂혔다.
“…”
나도 권각술을 주로 쓰는 입장에서 독고 언니의 권각술은 정말 범상치 않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주먹이나 발을 휘두르는 거 같은데 그 도착 지점이 하나같이 요혈을 찔러대는 걸 보면 두렵기도 하다.
천부적인 재능 아닐까?
근데 거기에 무식한 내력까지 더 해져서 주먹질 한 방으로 유광의 목이 바닥에 쳐박힌 걸 보자 걱정이 앞섰다.
“… 죽인 거 아니죠, 언니?”
“잘 조절했지, 다.”
언니가 땅에 파묻힌 유광의 목덜미를 잡아 꺼내자 하얗게 눈을 뒤집은 그의 눈 아래로 희미하게 숨이 오가고 있었다.
진짜 살았네.
“아무튼 기절만 시키면 되잖아? 이 새끼, 아까부터 너 꼬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헤헷.”
뭐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역시 독고 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