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208화 (208/225)

EP.208 외전 : 광마와 색마 - (5)

해가 뉘엿거릴 즈음, 독고령과 일행들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누님!”

하루종일 혼자서 마차를 모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청운의 저 알 수 없는 충성심과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생각하며 독고령은 마차에서 내렸다.

“가가, 돈 잘 가지고 있죠?”

“네, 령.”

위일청이 품에서 묵세휘가 건네준 전표와 돈주머니를 내보이자 독고령은 앞장서서 객잔에 들어섰다.

“아…”

어린 점소이 하나가 객잔에 들어서는 독고령을 보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그녀가 툭 말을 내뱉었다.

“… 뭐해, 손님 안 받아?”

“죄… 죄송합니다! 선녀님이 오신 줄 알고…”

“장사 좀 할 줄 아네, 크큭.”

“하긴 령을 보면 선녀님과 오해할만하죠.”

“음탕한 선… 흐엑?!”

“죽는다, 진짜…”

“후훗, 많이 당해봤다고 이젠 령 매도 관영이를 괴롭히네.”

“지약이만 품에 없었으면 더 했을거야.”

순식간에 들어서는 5명의 선남선녀와 두 아이를 보고 점소이가 당황하고 있자, 안에 있던 객잔 주인이 눈치 빠르게 튀어나와 독고령과 일행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점소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습니다. 혹시 마차를 맡길 수 있을까요?”

“마차라면…”

객잔주인이 청운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마차를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마차가 조금 커서 돈을 더 받아야할 거 같은데 괜찮으신지…”

“상관없습니다.”

“예예! 바로 내어드리죠. 혹시 방은 몇 개를…”

“가장 큰 방으로 하나랑 작은 방 하나로.”

“예! 그럼 다 합쳐서…”

오랜만에 만난 통이 큰 손님이라 생각하며 객잔주인이 머릿속으로 열심히 셈을 하고 있던 와중, 위일청이 그의 손에 은자 두 어개를 쥐어주었다.

“이 정도면 차고도 남으리라 생각하는데 맞습니까?”

“이… 이렇게 많이 주시면 오히려…”

“대신 음식을 좀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술… 은 한 잔만 줘.”

“한 잔이요?”

객잔주인이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병도 아니고, 한 잔의 술만 요구하는 손님이 어디 있는가.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독고령이 품에 있는 아기를 슬쩍 내보이며 주인에게 말했다.

“… 애가 아직 젖을 못 떼서.”

“아… 예, 알겠습니다! 주아야, 손님들을 방으로 모셔라.”

“네.”

점소이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 위일청과 일행들이 발걸음을 뗐다.

방에 도착한 뒤, 지하와 지약이에게 젖을 먹이곤 일찍 재워두고 나서야 독고령은 밖으로 나왔다.

“아, 오셨습니까 누님?”

“어. 일찍 자게 빨리빨리 하자.”

“예!”

청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독고령이 남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생긴 건 위일청이었고, 그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변해나갔다.

적어도 자신에게 잘 해주는 이들에겐 무언가라도 하나 더 쥐어주고 싶은 마음.

이런 게 아마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이라 생각하며 독고령은 남들에게 하나둘씩 베풀어나가곤 했다.

그 일환 중 하나가 청운의 무공을 봐주는 일이었다.

남에게 무공을 가르쳐 본 적은 없고 기껏해봐야 비무를 상대해주곤 ‘어디가 비었다’ 정도만 얘기하는 게 다였지만, 청운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좋아하곤 했다.

“열심히 해. 나는 적당히 할게.”

“예, 누님! 제가 먼저 선공할까요?”

“어. 들어와라.”

그리고 이 과정은 그녀 스스로 자신의 무공을 오랜만에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독고령은 단 한 번도 무기를 다시 손에 쥐어본 적이 없었다.

위일청의 말대로 고작 1년 검을 손에서 놓았다고 한들 오랜 기간 익혔던 검이 어색하진 않을테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무뎌졌으리란 걱정도 있었다.

그리곤…

빠악!

“열심히 하라니깐, 새끼야.”

“… 열심히 했는데요, 누님.”

“…”

단 한 합만으로 청운을 제압해버린 독고령은 살짝 김이 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그렇지.’

여전히 그녀의 검은 날카로웠다.

“야 이 새끼야, 후발제인만 그렇게 좋아하니깐 선공이 안 날카롭잖아.”

“그래서 누님한테 무공을 봐달라고 청한거죠.”

“새끼야, 좀 더. 어? 팍! 하는 그런 게 있어야지.”

“그 팍!이 궁금합니다, 누님!”

“그러니깐… 어? 이렇게!”

슈육!

독고령이 허공에 일검을 흩뿌리자, 청운이 감탄했다.

“오…”

“느낌 오지?”

“… 그런 검을 저도 갖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쇼, 누님!”

“아니, 그러니깐 이렇게… 어?”

슉!

독고령이 똑같이 다시 한 번 보여주자,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그게 저는 안 되는데요, 누님.”

“될 때까지 해야지, 뭐. 그냥 맞으면서 배울래?”

“예! 그러겠습니다, 누님!!”

“…”

묘하게 청운이 눈을 빛내는 게 어딘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후 이 각(30분) 정도 청운을 잘근잘근 다져주자 결국 그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이 정도면 좀 알겠지?”

“허억… 예…!”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운은 후련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게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독고령은 스스로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생각했기에 저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웃을 리는 없다 생각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래, 고생했다. 내일도 잘 부탁하마. 괜히 막 몸이 쑤셔서 말 못 몰 거 같으면 얘기하고. 가가한테 부탁하게.”

“…”

독고령의 말을 들은 청운이 입을 쩍 벌리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그 표정은?”

“… 확실히 도련님을 낳고 바뀌셨네요, 누님.”

“내가?”

“술도 자제하시고, 이런 따스한 말도 건네주시다니… 저 방금 듣고도 놀랐습니다, 누님!”

“콱 씨 맞을라고…”

“때려주시나요?!”

“안 해, 새끼야!”

어딘가 아쉬워보이는 표정을 짓는 청운을 뒤로 하고 독고령은 등을 돌렸다.

“아무튼 내일 보자.”

“예! 가르침, 감사합니다 누님!”

“… 누님 소리 너무 크게 부르지 말고. 뭔가 사파 같잖냐.”

“그럼 누님 말고 뭐라고 부를까요…?”

“하긴… 그것도 좀 애매하긴 하네.”

부인이라고 부르게 시킬까 했는데 청운이 그렇게 부르면 이상할 거 같아서 독고령은 그냥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냥 목소리만 좀 줄여.”

“예, 누님.”

“아, 그리고 우리 사천엔 어떻게 들어갈거냐?”

“사천이요?”

“어, 사천.”

독고령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자, 청운도 웃음기를 지우곤 표정을 바로했다.

그녀에게 있어 사천이 어떤 의미인지 청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청운이 보기에 독고령이 당문에게 품고 있던 맹렬한 복수심은 예전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아니었으나 꺼져가는 재가 여전히 뜨겁듯이 그녀의 마음 한 켠에 불편함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천은 아무래도 당문의 영향력이 남아있을테니깐 솔직히 지하랑 지약이 데리고 가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네.”

“… 그러셨군요. 일단은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번 일이 사파와 연관되어있으리란 생각에 육로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천으로 가는 길은 청운의 말대로 크게 두 가지였다.

장강을 주름잡고 있는 장강수로채의 배를 이용하여 사천에 들어서는 방법과 그냥 육로를 이용해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

하지만 장강수로채는 이번에 새로이 세를 불린 사파의 총 연합, 사흑련에 한 발 걸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기에 묵세휘는 청운으로 하여금 육로로 가길 권했다.

괜히 맹과 어느정도 교분이 있는 위일청 일가가 굳이 벌집을 쑤셔서 좋을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기에.

“육로라…”

독고령이 잠시 고민에 빠지자, 청운은 그저 기다렸다.

‘누님…’

독고령의 마음에 남아있을 은원의 잔재는 언제든지 계기만 있다면 다시 불타오르리라.

그녀 나름대로 생각이 많으리라 짐작하며 청운이 독고령을 위해 슬며시 자리를 비울까 고민하던 찰나.

“동정호 주변을 지나서 가자.”

“… 예?”

“그래. 아이들한테 동정호를 보여주고 싶어.”

그녀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전에 관영이한테 들었는데 우리가 완전 아기 때를 기억 못 해도 그 때 좋은 것들을 보고 나면 나중에 다 기억 한 켠에 남는다고 하더라고.”

“그… 그렇나요?”

“그리고 애들이랑 추억도 좀 쌓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깐 지하랑 지약이한테 동정호를 보여줘야지. 돌아오는 길에 오악도 좀 들렀다 갈까?”

“오악을 다 들리기엔 조금…”

“사천 쪽에 또 유명한 명소가 뭐 있지? 아는대로 읊어봐.”

“글쎄요… 아무래도 도가 계열에선 오악은 아니지만, 청성산이 또 유명하죠.”

“청성? 거기 멋지냐?”

“… 저도 안 가봐서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산세가 오악 못지 않게 멋드러지다고 들었습니다. 또 개파조사께서 도가 문파를 세운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럼 거기도 슬쩍 들렀다 갈까?”

씨익 웃으며 자신에게 묻는 독고령을 보고, 청운은 허탈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 왜 웃어?”

“아닙니다, 누님. 크큭…”

“이상한 새끼 … 아무튼 네가 동선을 잘 짜 봐. 알았지, 마부?”

“예, 누님! 좋은 밤 보내세요. 내일 아침에 다시 뵙죠.”

“오냐.”

떠나는 독고령을 바라보며 청운은 계속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기 멋대로 독고령에 대해 오해한 것이 부끄러워서 튀어나오는 웃음과

역시 아이를 낳고 변한 독고령의 모습이 보기 좋아 튀어나오는 웃음이었다.

‘장문인의 말씀이 맞구나.’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무던히 노력하는 무당의 일원으로서 한 번은 장문인에게 음양의 조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장문인이 아이들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음과 양, 남과 여가 만나 조화를 이룬 결과물.

그 결과물은 많은 것을 뒤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낼 힘이 있다고 말했었다.

청운은 장문인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음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를 낳고 완전히 바뀐 독고령을 보자 장문인의 말이 또 새로이 느껴졌기에.

‘동정호를 지나 사천을 들렀다 청성산을 건너서 오악이라…’

비무의 복기도 잊고, 청운은 이내 독고령이 던져준 숙제에 집중했다.

그 또한 독고령을 저렇게 뒤바꾼 위지하와 위지약을 위해,

좋은 추억을 심어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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