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6 외전 : 광마와 색마 - (3)
청운의 안내를 받아 묵세휘 군사의 방에 도착하자, 독고령이 슬그머니 발을 들어 문을 걷어차려는 순간.
“아, 빨간 언니!”
“… 안녕, 소소야.”
문이 열리며 남궁소소가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리 부르면 독고 부인에게 실례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소소야.”
“아…”
뒤이어 나온 남궁진의 지적을 들은 남궁소소가 슬쩍 고개를 숙이자, 독고령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보였다.
“괜찮아, 소소야. 니네 아빠 없을 때는 그렇게 불러, 응?”
“헤헤… 지하도 왔어요?”
“응. 지하야. 소소 누나다, 누나.”
남궁소소가 배시시 웃으며 지하의 손을 만지작거리자 방 안에 있던 남궁진이 일어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버지가 왜 그대를 소소 곁에서 떼어놓으라고 말을 남기셨나 알겠소.”
“떼어놓긴 개뿔.”
독고령이 남궁소소를 쳐다보다 남궁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미리 소소도 데려다놓고 철저하네?]
그녀의 전음을 듣고 남궁진 또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어쩌겠소. 안 그러면 또 맹을 뒤집어 엎을텐데.]
그의 대답을 들은 뒤, 독고령은 살짝 짜증이 났지만 또 오랜만에 보는 소소의 얼굴이 반가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분을 풀었다.
“소소 봐서 한 번 참는다.”
“왔는가, 독고 부인?”
독고령의 목소리가 한결 풀어지자, 그제서야 안에서 걸어나와 인사를 건네는 묵세휘를 보고 그녀가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새끼야… 하…”
“내 탓으로 돌리지 말게나? 그대의 속에 항상 울화가 많은걸 내가 어찌하겠는가?”
“한 대만 딱 맞…”
“그리고 이건 선물일세. 지하 도련님과 지약 아가씨를 위해서 준비했다네.”
독고령이 막 짜증을 낼 즈음, 묵세휘가 칼 같이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 뭐냐, 이거?”
“영약일세.”
“나 그딴 거 안 먹어도 되는데.”
“말하지 않았는가? 지하 도련님과 지약 아가씨를 위해서라고.”
“…”
“이거 꽤나 비싼걸세. 안 받을 생각이라면 미리 말해주게. 내가 먹…”
“줘, 새끼야. 누가 안 받는다고 했냐?”
묵세휘가 피식 웃으며 독고령에게 영약이 든 찬합을 건네주었다.
“한 번에 다 먹이지 말고 젖을 뗄 즈음부터 조금씩 먹이게. 어린 아이에게 과한 내력은 오히려 독이네.”
“오냐.”
독고령의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을 확인한 뒤, 묵세휘가 책상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
책상 옆에 아기를 위한 간이침대가 있는 것을 보고 묵세휘가 처음부터 독고령 일가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는지 깨달았지만, 독고령은 원래부터 묵세휘가 그런 놈인지 알고 있었기에 포기하고 지하를 침대에 눕혔다.
“좋은 비단일세. 우리 집 아이가 어릴 적에는 어미품보다 저 비단을 좋아했지.”
“… 그래서 뭐?”
“필요하면 가져가라는 말일세.”
“보고, 지하가 좋아하면.”
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자신과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자신의 화를 잠시 눌러두었다.
‘…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주는 새끼.’
그게 독고령이 생각하는 묵세휘였다.
“다른 분들도 다 앉게나. 위 대협도 이 쪽으로.”
방에 찾아온 이후 노골적으로 독고령을 신경쓰는 작태를 보였지만, 또 그런 와중에 상석은 위일청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위일청의 옆에 앉았다.
“일단 오랜만에 맹에 찾아와주셨음에 감사를 표하오, 위 대협.”
“… 감사를 표할 일까지야 있겠습니까?”
“이전에도 말했듯이 맹이 한참 기틀을 잡아가는 와중에 위 대협과 부인이 함께 찾아올 때마다 얻는 게 많아서 그렇소.”
“얼굴에 금칠을 다 하시는군요.”
가벼운 인사치레를 끝낸 뒤, 남궁진이 묵세휘를 쳐다보자 그는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최근 사천 인근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네, 위 대협. 그 때문에 오늘 장원을 방문하였던 것이고.”
“… 색마라 자칭하는 마인이 날뛴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네. 일단 용모파기라도 확보해야겠다 싶어 맹이 보유한 무인 중 일부를 그 쪽으로 보냈는데…”
묵세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실패했다네.”
“어느 정도 되는 병력을 보내셨길래 그리 근심이십니까?”
“… 검왕과 도제를 보냈지.”
“허어…”
“그냥 걔네들이 약한 거 아니야?”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독고령이 끼어들자, 묵세휘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그대 기준에서 약하다한들 충분히 강한 자들인데다가 맹의 명을 받고 간 이들이 패배했으니 결과적으로 맹의 위신이 깎인다네.”
“그 놈의 위신, 으이구…”
“맹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시기에 이런 일을 기뻐할 무리들도 있을테니 문제겠지. 그래서 일부러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병력을 보냈는데 패퇴한 것이네.”
“그냥 생각보다 강하단 거지?”
“그리 간단하진 않아보여요, 언니.”
“응?”
옆에서 은관영이 끼어들자, 묵세휘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오문주는 역시 다르구만.”
“… 아니면 독고 언니가 무심하거나요오.”
“내가 왜?”
“아니에요오. 그… 지금 묵 군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맹이 모를 정도로 강한 무인이 나타났단 얘기에요. 군사님은 그게 마음에 걸리시는거죠?”
“정확하다네.”
묵세휘가 은관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곤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현재 강호에서 맹의 눈을 피할 정도로 강대한 무인은 거의 없다네. 은거기인이나 기인이사 따위의 허튼 소리를 믿을 정도로 본 군사가 아둔하지도 않지.”
“돌려말하지말고 대놓고 말해.”
“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조직이 강호에 몇이나 있겠나? 황실과도 친하니 그 쪽도 어느정도 알고 있고, 혈교는 교주를 제외하면 밑에 있는 작자들은 그리 고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진 않네. 되려 강시들이 무섭지. 그렇다면 남는 건 몇 없네.”
묵세휘가 세 손가락을 펼쳤다.
“정말 은거기인이거나, 마교거나, 아니면 사파거나.”
“은거기인은 네가 개소리라 했고, 마교 새끼들은 멀고, 그럼 사파 아냐?”
“그 가능성 때문에 맹이 마음대로 손을 못 대고 있다네.”
“엉?”
“사파가 역사에 다시 없을 강성한 조직으로 맹약을 맺고, 무림맹에 비견되는 거대한 조직을 이루어냈다네. 그저 사흑련의 새로운 수장 자리가 정해진 것으로 끝이 아니라 기존에 눈치를 보던 다른 사파의 무리도 한 번에 흡수하여…”
“거기까지.”
묵세휘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독고령은 그의 말을 끊었다.
“아무튼 가서 때려부수면 된다 아니야?”
“결과적으론 맞네. 맹의 입장에 서면서 맹엔 속하지 않은 강한 무인이 필요한 상황일세.”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그리 돌려말하고 있냐?”
“…”
묵세휘가 입을 꾹 다물고 독고령을 쳐다보자, 그녀가 쏘아댔다.
“뭐, 새끼야.”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위 대협.”
묵세휘가 위일청에게 물었다.
“만약 위 대협이 가준다고 하면 맹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라네. 어떻게 생각하나?”
“음…”
위일청은 자신의 아내들을 바라보았다.
“소현, 괜찮나요?”
“지하랑 지약이는 어떻게 하려고?”
“… 아무래도 같이 데려가야겠죠.”
“그럼 나는 괜찮아.”
“관영은요? 하오문의 일이 많지 않나요?”
“으음…”
은관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바깥 공기도 쐬고 싶고요.”
“그렇군요. 령은…”
“가가랑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
독고령의 대답이 튀어나오자, 일순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왜… 왜? 내가 뭐?!”
“… 좋은 아내를 두셨구려, 위 대협.”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크큭.”
“뭐가?!”
독고령이 이해를 못 하고 두리번거리자, 다른 이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다 같이 웃었다.
*
목적지가 정해지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묵세휘는 미리 준비라도 해놨다는듯이 가족 전원이 다 타고도 남을 마차와 함께 경비를 건네주었고, 남궁진은 쓸 일이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맹주의 직인이 찍힌 명패를 건네주었다.
“넓네, 푹신푹신하고.”
“그러게요. 가는 동안 아기들은 마차 안에서 재워도 되겠어요.”
“돌아가면서 잘까?”
“그래야죠. 새벽에 또 젖을 물리기도 해야하니깐.”
“그럼 관영이나 령 둘 중 한 명과 저랑 소현 중 하나씩 둘, 둘이 마차 안에서 자기로 하죠.”
“네.”
마차를 타고 장원으로 돌아온 위일청과 아내들은 각자 여행을 위한 행낭을 꾸린 뒤, 오랜만에 집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둔 비익과 연리를 꺼냈다.
“… 이거 기껏 받아놨는데 쓸 일이 없네요.”
“무기는 쓸 일이 없을 때 제일 좋은거죠, 령.”
“그렇긴 한데 좀 아까워서요.”
오랜만에 잡은 도는 독고령에게 조금은 어색했다.
새삼스레 느낀건데 도를 안 잡은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
처음에는 아이를 위해서, 출산 이후에는 육아를 위해서.
어느새 물집이 사라지고 젖내음이 물씬 풍기는 자신의 뽀송뽀송한 손을 바라보며 독고령은 마음이 묘했다.
“왜 그래요, 령?”
“… 나 좀 약해졌으면 어떡하죠?”
“령이 약해진 모습은 침대 위 말고는 상상이 안 가네요.”
“아잇… 그런 거 말고요. 막상 싸울 때가 돼서 도움이 안 될까 싶어서요.”
“그럼 내가 지켜주면 되죠, 뭐.”
위일청이 뒤에서 자신을 껴안자, 독고령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령은 제 아내니깐, 남편인 제가 지켜주는 게 이상한가요?”
“… 아니요.”
위일청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비비적거리다 살짝 입을 맞추고, 독고령이 미소지었다.
“뭐… 소현이도 그 사이에 엄청 열심히 수련했으니깐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령이 고작 1년 만에 약해졌으리란 생각도 잘 안 들고요.”
위일청이 웃자, 독고령이 그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따라 웃었다.
“1년 만에 하는 외출이네요, 령.”
“지하랑 지약이는 처음 나가보는 강호기도 하고요.”
“이것저것 많이 보고 오죠, 령.”
“… 네, 가가.”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으며 독고령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