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3 후일담.
그렇게 한동안 위일청의 품에 안겨있던 독고령은 문득 남겨둔 이들이 떠올랐다.
남궁원청, 은약벽, 그리고 검후 등등.
이 곳에서 이대로 위일청의 품에 안겨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일테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위일청 또한 같은 생각이였다.
“… 이제 슬슬 갈까요, 령?”
“네, 가가.”
위일청의 품에서 나온 독고령은 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 수급은 챙겨갈까요? 그래야지 전쟁이 쉽게 마무리될 거 같은데…”
“오히려 강시들이 더 날뛸수도 있겠죠. 그리고 또 저길 보세요, 령.”
위일청이 손을 들어 가르킨 곳을 바라보자, 그 곳에 있어야할 당정의 시체가 없었다.
“… 어?”
“아까 령이 눈물을 흘리느라 말은 못 했는데 시체가 녹아내리더라고요.”
“…”
독고령은 당정의 시체가 사라지고, 그 곳에 남은 찐득한 검은 액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어차피 뭐 장례를 치뤄줄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긴 하네요. 갈까요, 령?”
위일청이 독고령의 손을 고쳐잡아, 깍지를 끼자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곳에서 죽은 것은 당정 뿐만은 아니리라.
아주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한, 한 때는 그녀 자체였던 독고진 또한 이 곳에 잠드리라.
“… 령?”
독고령이 우두커니 멈춰서있자, 위일청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가. 갈까요?”
“네, 령.”
독고진에게 짧은 인사를 마친 독고령은 그렇게, 위일청의 손을 잡고 산을 떠났다.
*
한편 위일청과 독고령이 떠난 전장은 파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파란은 백도 무림 측보다는 갑작스레 후방에서 들이닥친 강시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마교 측에서 일어났다.
“당문…!”
“하늘이시여, 일단 자리를 피하셔야…!”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하늘이시여…!!”
당정이 이끌고 온 강시들은 대부분 독강시였다.
달려드는 강시를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독을 뿜어내며 지독하리만치 마교를 괴롭혔고, 중독되어 쓰러지는 자신의 교도들을 바라보며 천유하는 피눈물을 흘렸다.
“… 천산으로 돌아간다.”
“예!”
“하나라도 많은 교도를 살리거라! 반드시!!”
“존명!!”
그렇게 마교는 빠르게 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묵세휘가 마교의 뒤를 칠까 고민했으나 강시가 뿜어낸 독은 정파와 마교를 가리지 않았기에 결국 마음을 접었다.
마교가 사라지자, 그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무당은 점차 이성을 되찾았고 다음으로 진정한 것은 소림이었다.
“… 아미타불.”
강시가 된 그들의 전대방장, 공여 대사를 쫓아 전장에 참여한 소림이었고 그 원인이 된 공여 대사의 강시는 금세 그의 오랜 벗, 검후에 의해 제압당했다.
아무리 천하제일인에 가까운 이의 육신으로 강시를 만들었다 한들, 살아있을 적 그의 깨달음과 무공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기에 검후는 쉽게 그를 제압했다.
“…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검후님.”
“그리 생각한다면 공여의 유해를 잘 수습하거라. 그리고 더 이상 살계를 일으키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을 돌보거라. 이미 너무 많은 업을 짊어졌노라.”
“예…”
백도무림의 태산북두가 진정되자, 남은 것은 세가들 뿐이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검선 남궁진을 위시로 한 무림맹의 세가와 모용벽을 위시로 패도를 걷고자 한 흑룡, 요녕, 길림 연합이 있었으나 정작 그 구심점인 모용벽이 당정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하게 되자 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궤뚫어본 듯, 남궁진이 앞으로 나서 중재를 요청했다.
“… 이미 다 끝난 듯 하오. 모용세가는 오늘 가주를 잃었고, 우린 이미 많은 피를 흘렸소. 이 쯤 하는 게 어떻소?”
“…”
승패가 갈리는 확실한 승부는 없었지만,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모용세가 내의 가장 큰 어른이라 할 수 있는 노순평이 고개를 떨구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조금은 허망하게.
전쟁은 독고령과 위일청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끝이 나 있었다.
전장으로 돌아온 위일청과 독고령은 시끄러운 소리보다 조용한 침묵만이 맴도는 것을 보고 조금은 당황했다.
“… 벌써 끝났나본데요, 가가?”
“그러게요.”
조금이라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독고령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검후 할머니!!”
“령 아야.”
한달음에 독고령과 위일청에게 다가온 검후는 둘을 쳐다보며 짤막하게 물었다.
“다 끝났더냐?”
“… 네.”
“예, 스승님. 다 끝났습니다.”
“그렇구나…”
“이 쪽은요?”
“거의 다 끝났노라.”
“… 거의요?”
“다행히 가기 전에 얼굴은 보겠구나.”
“… 네?”
검후의 목소리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 원청이는 상태가 별로 안 좋더구나.”
“어… 어딨는데요?!”
“가자꾸나.”
검후가 앞장서자, 독고령과 위일청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 왔나, 광마의 여식?”
팽유덕, 황보기를 지나,
“령 매…”
“독고 언니.”
백리소현, 은관영을 지나,
“… 오셨소?”
안색이 좋지 못 한 남궁진과 묵세휘를 넘어서자,
“… 오랜만이구나.”
“영감님…”
흙바닥에 누워있는 남궁원청을 발견했다.
“아니… 그… 왜… 이런데 누워있어요…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말하는 뽄새는 여전하구나, 크큭.”
“괜찮은 거 맞죠…?”
“안 괜찮은 듯 하구나.”
“아잇, 말을 왜… 그렇게…”
독고령은 괜히 울컥하여 목소리가 점점 젖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남궁원청은 한없이 평온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결정했더냐?”
“… 네.”
그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얘기하진 않았지만, 독고령은 남궁원청의 물음에 대답했다.
“… 결정했어요.”
“다행이구나.”
“… 소소도 도중에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지켜냈어요. 이상한 말도… 안 가르쳤고요.”
“그래, 다행… 크윽…!”
“여… 영감님!!”
“아버지!”
남궁원청의 입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자, 독고령이 그의 등을 받쳤다.
“… 노부의 몸은 노부가 더 잘 알아. 이제 시간이 되었구나.”
“영감님… 제발…”
“령 아야.”
검후가 슬며시 독고령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가족끼리 있을 시간을 주자꾸나.”
“…”
독고령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득 남궁원청을 향해 오체를 투지하며 큰 절을 올렸다.
“주신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 그래. 도움은 되었더냐?”
“예…!”
“그럼 됐다, 클클.”
독고령을 보며 남궁원청이 미소를 짓고는 손짓으로 남궁진을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검후가 말한대로 가족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기며 위일청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떴다.
“… 괜찮나요, 령?”
“네, 가가.”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령.”
“…”
위일청의 말을 듣고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지만, 독고령은 꾹 울음을 삼켜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깐요.”
“… 네?”
“가가. 잠깐 다녀올게요.”
“어디를…”
“… 전쟁을 일으킨 사람을 만나러요.”
“…”
독고령이 결연한 표정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에는 남궁원청과 사뭇 다른 자리였다.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애도하기보다, 경계하고 있었다.
그 무인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침내 정중앙으로 가자…
“어머, 손님…”
보랏빛 안색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은약벽이 있었다.
*
“…”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어떤 일이 있었나… 윽…! 궁금하네요.”
힘겹게 힘겹게 말을 쥐어짜내는 은약벽을 보며, 독고령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전쟁을 일으켰냐.
왜 이런 일을 꾸몄냐.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지경까지 왔냐.
하지만 그 모든 의문보다 독고령은 다른 말을 꺼냈다.
“… 괜찮냐?”
“… 그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네요.”
“그래도 함께한 정이 있잖냐.”
“정… 이라…”
식은 땀을 흘리는 은약벽을 보며 독고령은 그녀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은약벽이 피식 웃었다.
“…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시다니…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러게 말이다.”
“남일처럼 얘기하시네요?”
“… 이젠 남이거든.”
“…”
독고령의 대답을 들은 은약벽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 결정하셨나요?”
“어. 결정했어.”
“… 부러워라.”
그녀의 한 쪽 손은 이미 거무죽죽하게 변해있었다.
아까 당정에게 당한 여파처럼 보였다.
보랏빛 안색으로 힘겹게 헐떡이는 그녀를 보며 독고령은 확신했다.
이미 중독되었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녀를 낫게하리란 방법은 없으리라고.
그렇기에 하다못해 말동무라도 되어주고자, 독고령은 은약벽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 그래서 이제 속이 후련하냐?”
“잘 모르겠네요. 후련한건지… 아니면 미련이 남는건지…”
“멍청한 년아. 차라리 후련하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왜… 하아…”
“후훗…”
은약벽의 웃음에는 평소와 같은 여유가 없었다.
그 모습이 괜히 독고령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 역시 손님은 참 상냥하시네요.”
“지랄.”
“그 상냥함에 기대… 제가 마지막으로 부탁해도 될까요?”
“… 말해봐.”
“은호와 후개가 제 지시를 따랐어요. 하지만 그 둘은 아무 상관없다고… 잘 말해주세요.”
“그리고?”
“하오문도 어디까지나 문주인 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문도들에게 피해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냐? 네가 이 지랄을 해놓고서?”
“그 부분은 산동지부의 특실에 위치한 제 책장을 확인해보라고 얘기하세요. 맹은 아마 이 제안을 거절 못 할 거예요. 우읍…!”
“야!”
은약벽이 갑작스레 괴로운 듯 몸을 비틀자, 독고령이 당황했다.
“하아… 하아… 이제 얼마 안 남았나보네요.”
“다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그딴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건… 너는 뭐 없어?!”
“… 손님은 정말… 끝까지 상냥하네요.”
“아, 좀!”
“그럼… 하나만 더 부탁할게요.”
“말해. 빨리…! 뭔데?!”
은약벽의 말이 천천히 느려졌다.
“… 위 공자와… 혼례를 한다 들었어요. 맞나요…?”
“… 어. 맞아.”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애랑 함께… 나를 보러 와줘요.”
“… 그래. 그럴게.”
“후훗…”
은약벽의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 나도… 그냥…”
그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