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2 19장. 건곤일척 - (完)
위일청이 검후에게 전수받은 절기, 파랑섬(波浪閃)은 그 이름대로 거대한 파도와 같은 검기를 뽑아냈다.
콰과과곽!
“으윽…!”
휘몰아치는 검기의 파도는 주변 일대를 휩쓸었고, 곧 이어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당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당정을 발견한 독고령이 잠시 멈춰서서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령, 가세요.”
“가가…”
“어서요.”
가라고 재촉하는 위일청을 보며 독고령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가슴 속에 묻어두곤 검을 고쳐잡았다.
“… 금방… 돌아올게요.”
“네, 령.”
떠나는 독고령의 뒷모습을 보고 홀로 남은 위일청이 숨을 골랐다.
“후우…”
큰 기술을 쓴 여파였는지 온 몸에 나른해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위일청이 중얼거렸다.
“… 기다릴게요, 령.”
위일청의 절기는 엄청난 위력이었다.
울창한 숲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휩쓴듯 삽시간에 텅 빈 평야로 바뀌어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주변에 어떠한 엄폐물도 없자, 그 사이로 당정이 보였다.
위일청의 기술이 그에게도 여파가 있었는지 당정의 안색은 그리 좋아보이지 못 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독고령을 보며 당정이 입을 열었다.
“이런 기술도 있었군.”
“포기했냐?”
“포기?”
당정이 수강을 끌어올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여전히 그의 품엔 아무런 무기도, 암기도 없었지만 더는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판단했는지 당정은 묵묵히 독고령에게 손을 뻗었다.
“당문이 가진 게 암기가 다라고 생각했나?”
“그래. 끝까지 모가지 뻣뻣한 게 보기 좋네.”
독고령이 비익을 고쳐잡으며 조금씩 당정에게 다가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독고령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었다.
“… 어차피 죽을 거 최후의 발악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 너네 가문 새끼들이 다 그렇더라. 항상 독은 안 쓰겠다면서 발악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 독을 꺼내들거나 꼴에 정파란 새끼들이 지 목숨이 위험하면 어린애도 인질로 잡는 게 그랬지.”
“대를 위해 소를 버릴 수도 있는 법이지.”
“네가 말하는 소가 나한테는 대였고, 천하였어.”
“협이 떨어진 무림에 협의 가치를…”
“닥쳐.”
독고령이 차갑게 일갈하며 도를 휘둘렀다.
당정이 막대한 내공으로 수강을 일으켜 그녀의 일영기를 빗겨냈다.
그러자 독고령은 허리에 매달려있던 또 하나의 무기, 유성도를 뽑아 휘둘렀다.
“크윽…!”
푸욱.
급급히 남는 손을 들어 그녀의 도를 막아냈으나 당정의 손바닥을 파고든 유성도가 긴 자상을 만들어냈다.
방울져 흘러내리는 당정의 피를 보며 독고령이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내 가족을 죽였는지는 아무 상관없어.”
“큭… 끄으으…!”
“한 때는 궁금하기도 했었지. 왜 하필 내 가족이였냐고. 왜 하필 가족이 지내던 산이였냐고…!”
“끄아아악…!”
유성도가 조금씩 당정의 손바닥을 파고들자, 참지 못한 그가 독고령에게 내공을 실어 발을 내질렀다.
하지만 박투술에 도가 튼 독고령의 눈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는 허망한 발길질이었다.
독고령이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하며 역으로 다리를 잘라내자, 당정이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끄아아아…!!!”
“바닥을 벌벌기는 꼬라지가 이제야 버러지답군.”
“네가… 네가 뭔데…! 우리 가문의 비원을…!!!”
“사람 죽여 얻은 비원이 뭐가 그리 중하다고 지랄이야.”
독고령이 도를 어깨에 툭 걸치며 당정을 내려다보았다.
당정은 그 내려다보는 시선이 싫었다.
두 번의 환골탈태, 강호에 다시 없을 위업, 당문의 비원인 독인.
그 모든 것을 이루고도 비도 한 자루, 절편 한 자루가 없어서 허망하게 죽어가는 작금의 상황이 당정으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무공이란게 그렇지!! 사람을 죽이며 발전한 기술이 어찌 고결하겠는가?!!”
“아, 좆까. 뭘 징징거리냐.”
“독만 있었다면…! 하다못해 비도 하나만 있었다면 여기서 죽는 건 네 년이였어!!”
“있어도 뒤진 건 너였어. 그리고 내가 뭐 너랑 무를 겨뤄줄거라 생각했냐?”
독고령이 유성도를 역수로 고쳐잡고는 당정의 허벅지를 찍었다.
“끄으으…아아아아악!!!!”
“뭘 이런 거 가지고 비명을 지르고 그러냐.”
“이… 이 버러지 같은 년이…!!”
“너를 만나면 혀를 가장 나중에 자르기로 약속했으니 좀 더 짖어도 돼.”
“끄아아아!!!”
독고령이 그의 허벅지에 박아넣은 유성도를 휘적거리며 웃었다.
“듣기 좋네.”
“이익…! 차라리 명예롭게 죽여라! 무인답게 죽이라고!!!”
“지랄한다.”
“끄으윽…!”
독고령이 그의 다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놓고는 유성도를 뽑았다.
그리고는 연리와 유성도를 각각 그의 팔에 꽂아넣으며 당정의 위에 섰다.
“그래도 기억하고 있었네. 아까 지껄이던 거 보니깐… 내가 누군지 알았나보고.”
“광마… 크크큭… 그래, 광마 독고진.”
“다행이야, 정말로. 그래도 네가 왜 뒤지는지는 알고 뒤지길 바랬거든.”
“큭… 크큭… 크하하학!”
갑자기 미친듯이 웃는 당정을 보고 독고령은 인상을 찌푸리다 발을 들어올렸다.
콰직!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짓밟았다.
“뭐가! 좋아서! 쳐웃어!!!”
“크헥… 쿡…”
당정은 곤죽이 된 얼굴로 입에서 피를 한웅큼 뱉어내곤 독고령을 보며 말했다.
“여인이 되려고 했나? 크큭… 가가?”
“…”
“위일청이 이제 네가 누군지…”
콰직!
독고령이 그의 입을 발로 내리찍었다.
“… 새끼, 말 많네.”
“커헉…”
“어차피… 이제 다 끝이야.”
독고령이 그의 팔에 박아둔 도를 뽑아들었다.
당정을 만나고 그를 어떻게 죽일지 매일 같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살아왔다.
막상 그 때가 다가왔지만, 독고령의 마음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 유언이라도 있냐?”
“유언? 크… 크큭…”
당정이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귀기 어린 눈으로 독고령을 노려보았다.
“마교 놈들을 좀 더 못 죽여서 아쉽군.”
“멍청한 새끼…”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자신에게도 해당될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독고령에겐 없었다.
하지만 복수를 하고자 마음먹은 이가,
누구보다 그 슬픔을 잘 아는 이가,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자신과 같은 아픔을 남에게 준 것을 독고령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놈이 나한텐 왜 그랬냐?”
“…”
“… 잘 가라.”
휘익.
독고령의 손이 움직이고, 당정의 목이 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입은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벌어져있었지만, 시체는 말이 없었다.
마침내 죽이는 데 성공한 원수의 시체를 보고 독고령은 기쁘고, 또 슬펐다.
“…”
그를 죽이기만 하면 앞으로 위일청의 아내로 살리라 다짐했다.
남은 여생을 그저 한 명의 여인이 되어 평범하게 살고자 했다.
하지만 당정은 끝끝내 독고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위일청에게 드러내려함으로서.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뒤, 독고령은 위일청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직 그녀에겐 중요한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
“령, 다녀왔나요?”
“가… 가.”
아까 큰 기술을 쓴 여파였을까?
위일청은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를 반겨주었다.
“일은 잘 해결하고 왔나요?”
“… 네.”
“다행이네요. 다친 데는 없나요?”
“…”
“령?”
막 땅을 짚고 일어나는 위일청을 느꼈지만, 독고령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일청, 할 말이 있어요.”
“… 지금요?”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독고령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처음 복수를 하고자 낫을 쥐었던 순간보다,
남궁원청을 마주하고 죽음을 느꼈던 순간보다,
살면서 겪었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더 괴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했다.
가장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가장 죽이고 싶었던 원수를 통해서,
가장 사랑하던 이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밝혀질 것이었다면… 스스로 밝히는 게 맞다 생각했기에
독고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일청한테… 전부터 숨겼던 게 하나… 있…”
“령.”
“흐읍…!”
갑자기 다가온 위일청은 독고령의 턱을 부여잡곤 그대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흐읍… 일… 청… 흐윽…!”
입이 틀어막힌 상태에서도 독고령은 무언가 말하려고 애썼으나, 위일청의 혀가 그녀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뭐라고요, 령?”
“…”
천역덕스럽게 자신에게 되묻는 위일청을 쳐다보며 독고령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말을 꺼냈다.
“일청! 실은 내가… 흐아앙!”
“뭐라고요, 령?”
“이… 일청!”
갑작스레 위일청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쥐자 독고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 할 말이 있다니까요…”
“해도 돼요, 령.”
“… 진짜로 해도 되는 거 맞아요?”
“그럼요.”
독고령이 슬며시 자신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막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내가… 흐윽…!”
그러자 이번엔 훤히 드러난 가슴을 위일청이 움켜잡았다.
“해… 해도 된다면서요!”
“해도 돼요, 령. 정말로요.”
“…”
“말하고 난 뒤에도 령이 계속 제 옆에 있을 거라면요.”
“일… 청…”
“전에도 말했잖아요, 령.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면…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
“령이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
위일청의 말을 듣는 순간, 독고령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며 그녀의 눈으로 흘러나왔다.
울고 있는 자신의 눈가를 닦아내는 위일청을 보며, 독고령이 물었다.
“… 정말… 나로 괜찮아요, 일청?”
“말했었잖아요, 령.”
“… 네?”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요.”
“…”
“령과 함께 있으면 항상 행복하다고요. 령이 성격이 괴팍한 것도, 나한테 무언갈 숨긴다는 것도, 그리고… 아주 음탕한 것도. 다 알고 있어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점을 포함해서, 령을 사랑한다고 말한 거예요. 그러고도 제 아내가 되어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일청…”
“령은 아닌가요?”
“흐윽…”
독고령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애썼다.
소매로 몇 번이고 눈가를 훔치며, 독고령은 어떻게든 웃어보이려 노력하며 위일청에게 대답했다.
“네… 네, 일청.”
“그거면 됐어요, 령.”
위일청의 가슴에 와락 안기며 독고령은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그녀의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줌의 무언가가 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독고령은 되뇌였다.
‘이제 나는… 독고령이야… 일청의 아내인… 독고령…’
더 이상 얽매일 과거가 없어진 그녀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묻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 흘린 뒤, 다시 고개를 들자 위일청이 살짝 놀란 듯 독고령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령.”
“… 네?”
“그새 야한 생각했나요?”
“네?!”
“머리가 분홍빛이네요.”
“아… 아니…”
당황한 독고령이 자신의 머리색을 확인했다.
분명 분홍색이었다.
“아… 안 했어요! 진짜 야한 생각 안 했는데…”
“… 음탕하네요, 령.”
“아니, 진짜… 하으읏…!”
독고령의 반론을 무시하고, 위일청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속삭였다.
“아직 스승님도 전장에 남아있으니깐, 야한 건 조금만 더 있다가. 모든 게 끝나면 하죠. 알았나요, 령?”
독고령은 억울했다.
자신은 정말 야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위일청의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았기에,
그와 함께 야한 일을 할 생각만으로 하단전이 욱씬거렸기에,
그녀는 두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녜… 네헤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