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1 19장. 건곤일척 - (14)
이 모든 일을 이제 끝맺어야겠다.
이제는 오래된 과거가 되어버린 옛날,
가족을 잃고 어린 마음에 낫 하나 꼬나쥐고 시작한 기나긴 여정을 여기서 마쳐야겠다.
가족을 잃은 증오는 마음속에 쌓여 거무죽죽한 원한이 되었고,
원한은 곧 피보다 붉은 무언가가 되어 온몸을 돌아 복수의 원동력이 되었다.
살아온 모든 순간이 복수를 위해서였다.
때로는 육체가 한계를 맞이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을 때는 광기가 그 빈자리를 메꿔 독고진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누구냐?”
“누구냐고?”
원수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 했다.
“다른 개새끼들은 몰라도 네가 날 모르면 안 되지.”
모습이 달라졌다 한들,
“죽은 아비와 어미, 그리고 형제와 남매까지. 모두 6명의 가족을 너에게 잃었다.”
과거는 바뀌지 않았다.
“가족이 죽은 그 날부터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당문의 개새끼는 내게 목숨을 빚졌고, 이제 그 빚을 받으러 찾아왔다.”
으스러질 정도로 무기를 꽈악 꼬나쥐고서 독고령은 가슴 속을 먹먹하게 만드는 답답함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내가 광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기술, 일영기를 끌어올려 독고령은 도를 휘둘렀다.
“으윽…!”
손을 들어 간신히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당정을 보며 독고령이 그의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콰직!
“큭…!”
“하고 싶은 말이 존나 많아. 듣고 싶은 말도 존나 많고. 근데… 다 필요 없어.”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흥분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독고령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만나서 존나 반갑다!! 그러니깐…”
“어떻게 여자가…!”
“뒤져!!”
독고령이 당정을 향해 다시 한번 크게 도를 휘둘렀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년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가주님을…!”
“꺼져!”
독고령의 시야 밖에서 우모침이 날아들었다.
채챙!
우모침을 떨쳐내는 것까진 좋았으나, 한순간 드러난 빈틈을 당정은 놓치지 않았다.
“막아라! 저놈을 막아!!”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당정이 도망치는 것을 보자, 독고령이 으르렁댔다.
“어딜 도망쳐!!”
독고령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 당정을 놓치면 안 된다고.
당문의 진짜 무서움은 항상 소매 속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암기, 독, 편, 비도까지.
하지만 지금 당정은 막 환골탈태를 끝마치고 알몸의 상태였다.
‘놓치면 안 돼…! 지금이 아니면…!’
짧은 수 교환으로 독고령은 당정이 가진 가공할만한 내공을 느꼈다.
다만 그의 박투술이 그리 대단치 않았기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을 뿐, 만약 그가 재정비를 하고 돌아온다면 승산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이익…!!”
독고령은 당정이 몸을 날린, 강시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
독고령과 그 일행들이 전장에 도착한 순간은 막 당정이 모용벽의 몸을 꿰뚫던 때였다.
“당정…!”
“… 령!”
“령 아야!!”
검후와 위일청이 말릴 겨를도 없이 독고령은 당정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검후는 이를 갈았고,
“령! 혼자 가면 위험합니다…!”
“그렇게 말했거늘…!”
위일청이 뛰쳐나가자 마차에 남은 검후는 재빨리 전장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허공에 떠오른 당정, 그리고 양분된 전장의 상황이었다.
마교의 무리로 보이는 이들은 강시 떼와 얽히고설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고,
그 반대편에 소림과 무당을 위시한 백도 무림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리고 상황파악이 끝난 것은 묵세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맹주. 우익부터 정리해나가야겠습니다. 맹주는 어서 검신 어르신을…”
“군의 지휘를 부탁하오, 군사!”
“예!”
뒤이어 남궁진이 뛰쳐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묵세휘가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하자 검후는 남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소현 아가, 관영이와 함께 후열에서 몸을 사리거라.”
“… 네.”
“일청이와 령아는 본녀가 데리고 와야겠구나.”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하여간 말은 죽어라 안 듣는 아이 둘이서 만났구나.”
검을 뽑아든 검후는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두 번의 환골탈태… 그 정도의 무위를 이루고도 어찌 원한으로 제 몸을 불태우더냐…’
전장의 정중앙, 독고령과 당정이 한 차례 손을 섞은 뒤.
당정이 먼저 몸을 내뺐고, 그 뒤를 독고령이 쫓았다.
“이런…!”
갈수록 멀어지는 독고령과 그녀의 뒤를 쫓는 위일청을 보며 검후 또한 그 둘을 쫓아 몸을 날렸다.
“거기… 서!!”
당정이 몸을 내빼자 그가 지나왔던 길은 순식간에 강시들로 메꿔졌다.
마치 파도가 밀려들 듯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강시의 무리를 어떻게든 독고령이 헤쳐나가고 있었으나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퉁!
“윽…!”
갑작스레 묵직한 공격이 들어오자 독고령은 당황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건 또 뭐야…”
낡은 승복을 걸친 강시가 독고령을 멈춰세웠다.
“…”
독고령의 본능이 그녀에게 경종을 울렸다.
‘뭐야, 이거…’
그동안 상대해 온 그저 그런 강시들과는 격이 다른 느낌이었다.
강시가 두 다리를 벌리며 한 손을 허리춤에, 다른 한 손은 주먹을 꾹 쥐어 앞으로 내밀자 독고령은 본능적으로 검을 고쳐잡았다.
그때…
“끄어어어!!!”
“이런…!”
또 다른 강시가 옆에서 덮쳐드는 순간.
서걱.
“… 앞서 나가지 말랬잖아요, 령!”
“가가!”
위일청이 주변의 강시들을 정리하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여!”
“검후 할머니…!”
검후가 독고령과 강시 사이로 끼어들었다.
“… 당정 이 놈이 기어이…!”
“할머…니?”
검후는 독고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격노한 얼굴이었다.
“… 령아야, 당정이를 쫓는 게지?”
“… 네.”
“여긴 본녀가 맡으마. 일청이와 함께 먼저 가거라.”
“…”
독고령은 잠시 검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후와 강시 사이에도 뭐라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듯했다.
“… 먼저 갈게요, 할머니.”
“오냐. 일청아,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령 아가를 잘 도와주거라.”
“예… 가죠, 령!”
“네, 가가!”
위일청이 연리를 휘두르며 길이 열렸다.
멀어지는 독고령과 위일청을 강시가 된 권신이 잠시 쳐다보았으나 검후가 검을 휘둘러 그를 막아섰다.
“… 공여.”
“그어어…”
“이건 아니니라… 이건… 이건 아니야…”
이성을 잃고 그저 괴성을 내지르는 자신의 오랜 친우를 보며 검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그대가 강호를 위해 헌신한 것을 생각하면… 이건 옳지 않노라…”
“그어어어!!!”
하지만 그녀의 외로운 말은 벗에게 닿지 않았다.
검후는 이를 악물며 그의 공격을 받아내곤 자신의 벗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안식뿐임을 깨달았다.
“편히 쉬게 본녀가 도와주마.”
“그어억!!!!”
권신의 외침에 호응하듯 강시떼들이 천지팔방에서 그녀를 덮쳐들었다.
“아미타불의 자비는 대해보다 깊으니…”
검후가 검을 휘두르자 강시들의 괴성 사이로 파도 소리가 일었다.
“거센 파도도 잠재우는 대자대비함을 보이리라.”
그리곤 그녀의 검이 곧 파도가 되어 전장에 내리쳤다.
“만파식(萬波息)”
콰과과곽!!
거센 풍랑과 높은 파도와 같은 검기가 검후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
‘제발…! 제발제발…!’
독고령의 경공술은 무명에게 배운 이후로 크게 진일보하였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고수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으나 닿을 듯 말 듯 자신의 시야 끝에서 도망치는 당정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점차 안달이 났다.
이대로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문의 술수는 저열하고, 비겁하며, 음습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눈앞에서 당정이 또 하나의 성취를 이뤄낸 것을 직접 보았기에 다음에 만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신 기회가 없으리라는 절박함이 그녀를 애달프게 만들었다.
파삭!
또 한 무리의 강시를 도륙하며 독고령이 다시 몸을 날리려던 순간,
‘… 사라졌어?’
당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령?”
“가가.”
뒤따라온 위일청이 그녀와 함께 멈춰섰다.
그제서야 좁아진 시야가 넓어지자, 독고령은 어느새 자신과 위일청이 전장에서 꽤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가가, 독선이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천천히 주변을 살펴야겠네요.”
“… 네. 조심하세요, 가가.”
독고령은 바짝 기감을 끌어올리며 긴장했다.
어쩌면 당정이 이미 자신의 암기들을 챙겼을지도 모른다.
“가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세요. 당문의 독은 칠공을 통해 들어와요.”
“네.”
“혹시 모르니깐 제 옆에 꼭 붙어있어요. 암기가 날아들면…”
“알았어요. 령도 조심하세요.”
“… 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독고령은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드문드문 당정의 남겨진 발자취를 쫓아 조금씩 걷던 와중, 위일청이 물었다.
“령.”
“네, 가가.”
“아까 령이 했던 말이요.”
독고령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 어떤거요?”
“… 아닙니다. 나중에 얘기하죠.”
“…”
독고령은 자신의 멍청함을 후회했다.
열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당정이 자신을 기억 못 한다고 하니 자신이 누구인지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정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죽어야만 한다 생각했다.
그래야 지옥에 가서라도 그녀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 거라 생각했으니깐.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위일청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어느새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식자, 독고령은 또 다른 조바심이 일었다.
혹시나 위일청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자신의 정체를 안 위일청이… 실망하고,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조바심.
“… 일청, 사실은요…”
“그 날 실험한 것은 독무였지.”
“!!”
갑작스레 당정의 목소리가 산속에 울려퍼졌다.
“육합전성…!”
온 천지에 울려퍼지는 당정의 목소리는 어디서 얘기하는지 그 목소리의 발원지를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한 번에 최대한 넓게 퍼지는 독을 개발 중이던 때였어. 기억나는군. 화전민들이 제법 많은 산골이었어.”
“어디야!! 모습을 드러내!!!”
“모습을 드러내야하는 건 네가 먼저지, 크하핫!”
당정의 웃음소리가 몇 번이고 메아리치며 울려퍼졌다.
“가가? 가가라고? 그 개백정 새끼가 이런 여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닥쳐!!”
“색마 위일청, 그대는 알고 있었나?”
“닥치라고!!!”
독고령이 어떻게든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당정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대의 정인이…”
“잠어약청파(潛魚躍淸波)”
그 때, 독고령의 귓가에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위일청이 연리를 크게 휘두르며 검기의 파도를 일으켰고.
“파랑섬(波浪閃)”
곧 이어 파도가 산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