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200화 (200/225)

EP.200 19장. 건곤일척 - (13)

소란스러운 전쟁의 한복판 속.

당정은 왠지 모를 상쾌함까지 느끼며 방금 막 죽은, 아직은 온기가 남은 모용벽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배꼽 밑 세치.

단전이 위치한 그 곳에 살을 뚫고 손을 집어넣은 당정은 만족스레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았다.

고독.

그냥저냥한 고독도 아니고, 절대고수의, 그것도 마기를 뒤섞은 물건.

혈교주를 통해 자신의 몸을 강시로 뒤바꾸고, 온 몸에 흐르는 피를 독으로 뒤바꿨음에도 여전히 독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 하자 그가 선택한 마지막 수였다.

전장의 소란도 신경쓰지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당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으로 당문의 비원은 완성되리라.’

고독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이 썩어내려 어느새 뼈가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당정은 개의치 않았다.

‘이것으로 나의 복수가 완성되리라.’

고독을 입 안에 삼키자,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자신의 장기를 녹여내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정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것으로…’

마침내 자신의 단전에 내려선 마지막 독이 이미 몸 안에 있던 다른 독과 섞이는 것을 느끼며.

당정은 비전을 따라 독을 운공하였다.

‘천하는 독인을 맞이하리라.’

마침내 당정의 기경팔맥을 한 바퀴 다 돌고난 뒤, 그의 온 몸에 퍼져있던 독은 한없이 정순한 독이 되어 그의 단전에 자리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몸 안의 모든 불순물이 당정의 칠공에서 뿜어져나오며 육체를 재구성하였다.

마침내 다시 눈을 뜬 당정의 눈은 모든 게 새로이 보였다.

검후 이후, 또 하나의.

두 번째 환골탈태를 경험한 무인이자,

당문의 비원.

독인(毒人)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요녕에서 일어난 무림의 대전쟁은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불씨를 일으킨 자의 의도에 따라, 그 불씨는 전 무림을 불태우는 거대한 불로 커져나갔다.

“무서워라.”

자신이 일으킨 거대한 불을 바라보며 은약벽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묵묵히 앉아있던 은호가 물었다.

“… 문주님.”

“왜 그러나요, 은호?”

“…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으음?”

은호의 질문을 듣자, 은약벽이 흥미로운 듯 얼굴에 미소를 띄며 그를 쳐다보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나요, 은호?”

“… 죄송합니다. 문주님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이 광경은…”

은호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들을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전장의 한복판, 사람들의 파도가 피해가는 둥글게 비어있는 터가 보였다.

그 곳에 시선을 기울이자 검신, 도선과 대적하고 있는 모용벽, 천유하가 보였다.

모용벽과 남궁원청의 일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멀리 떨어진 이 곳까지 공기가 떨리는 것이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일전이었다.

그 옆에서 거리를 두고 싸우는 도선과 천유하는 어떠한가?

도선은 이름과 같이 묵직한 7척 장도를 휘두르며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그에 대적하는 천유하는 멀리서 보아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꺼먼 마기를 뽑아내며 도선을 상대로 조금은 유리하게 싸우고 있었다.

중앙의 대장전이라 할 수 있는 4인의 주변으로는 그 여파에 인해서일까.

그 주변으로 무당, 소림, 황보세가, 하북팽가와 모용세가, 빙궁, 마교, 흑룡강 일대의 문파가 뒤섞여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장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은호는 매번 등골이 서늘해지곤 했다.

번개를 부른다는 뇌력권존의 주먹이 뇌명을 일으킬 때마다 바닥에 검은 그을음만 남기며 인간을 파편 덩어리로 갈아버렸다.

빙궁의 빙제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빙공으로 사람을 얼려놓고 통째로 부숴버리곤 했다.

투명한 얼음이 피로 물드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은호의 피도 같이 식어가곤 했다.

은호는 새삼스레 자신이 배워온 무공의 목적을 재차 실감했다.

자신이 배운 무공은 상대방을 좀 더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전장은 무공의 존재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 이 광경이 정말 문주님이 보고 싶은 광경이셨습니까?”

은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문주님… 지금 이 곳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끔찍하죠?”

“…”

은호의 떨리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은약벽의 목소리는 한없이 잔잔했다.

“이게 무인들의 실상이랍니다, 은호. 우리가 평생을 갈고 닦아온 무공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이에요. 봐요. 저 소림의 승려분들이 맨손으로 마교도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문주님!!”

은호는 은약벽의 말을 참지 못 하고 말을 끊었다.

“대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파랗게 얼굴이 질린 은호를 보며 은약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호는 아직도 여리네요.”

“문주님, 이건 여리거나 강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문주님!!!!”

느긋하게 대답하는 은약벽을 보며 은호는 혼란스러웠다.

눈 앞에 있는 여인이 정말 자신이 존경하던 은약벽이 맞는가.

“말했잖아요, 은호. 전 무림을 없애버리기 위해서라고.”

“… 저희 또한 무림인입니다. 문주님께서 말하시는 무림엔 저희 하오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있죠. 은호, 그러니깐 잘 지켜봐요.”

은약벽의 눈이 빛났다.

“은원이 얼마나 무용한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들이 우릴 어떤 눈으로 보는지. 이 참에 한 번 느껴보세요.”

“… 저는…”

은호는 도대체 은약벽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은약벽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저건…”

갑작스레 전장의 한 축이 무너져내리며 새로운 세력이 끼어들었다.

마교의 뒷편에서 나타난 일련의 물결이 전장을 양분하며 중앙으로 향했다.

‘강시들…?’

얼마 전에 당문이 인근에 도착했음은 알고 있었기에 은약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이 이 전쟁의 핵심이었다.

백도와 마도 상관없이 가장 큰 피해를 입히며 동귀어진하리라.

‘기왕이면 좀 더 많은 세력이 모였을 때 왔으면 좋았겠지만…’

시기가 좀 이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싶었다.

마침 맹의 세력도 인근에 거의 다 왔다 하였으니.

갑작스레 배후에 나타난 강시떼의 습격에 당황한듯 마교의 무리가 빠르게 무너지는 게 살짝 균형을 깨뜨리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

은약벽의 시선에 누군가 들어왔다.

“… 독선?”

전장을 가로지르는 녹색의 장포를 입은 사내는 소매를 휘적거리며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중앙의 대장전이 막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이대로 남궁원청이 모용벽의 칼에 목이 떨어지는가 싶었는데 이게 웬 걸.

“응?”

갑자기 쓰러지는 모용벽,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는 독선.

그 모습을 보고 은약벽은 어딘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설마…”

은약벽이 원하던 건 어디까지나 공멸이었다.

적당한 균형을 이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차륜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마무리를 광마, 독고령이 매듭짓는 그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당정이 모용벽의 몸을 궤뚫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보고 은약벽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호, 후개! 막아야합니다.”

“… 예?”

“독선을 방해해야해요!”

“그게 무슨…”

방금까지 전장을 관망하던 은약벽이 갑작스레 안색이 질려 일어나자, 은호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채 되묻기도 전에 은약벽은 이미 전장에 몸을 날린 상태였다.

절정에 이른 그녀의 경공이였음에도 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은약벽은 후회했다.

‘제발…!’

어느새 허공에 떠오른 당정의 몸을 보며 은약벽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내공을 담아 내지른 그녀의 목소리가 당정을 방해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칠공에서 분출되는 노폐물 때문일까.

그의 귀는 막혀있었다.

마침내 전장에 도착한 은약벽이 내공을 끌어올려 당정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탁!

“후우…”

“…”

노폐물 사이에 뒤덮여있던 당정이 은약벽의 공격을 막아냈다.

“끄으윽…!”

“이게 당신께서 보던 천하였습니까, 어르신?”

“무슨… 아아악!!!”

당정이 잡은 팔이 그대로 녹아내리자, 은약벽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것엔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당정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던 남궁원청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만한 무위를 가지고도 사천을 돕기 힘들었습니까?”

“… 지금이라도 멈추어라.”

“늦었습니다.”

“꺄악!!”

“제 딸아이가 죽기 전에 말하셨어야죠.”

당정이 은약벽을 내동댕이치듯 던져버리고는 몸에 묻은 노폐물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전장의 함성은 멎어있었다.

이 곳에 모여있는 모든 무인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인외의 무언가였음을,

그리고.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는 광경임을.

“무림에 고한다.”

당정의 목소리는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협을 논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백도 무림을 불태우겠다.”

고요한 목소리 사이사이 묻어나오는 증오가,

“패도를 논하며 죄없는 이들을 도륙한 마도 무림을 단죄하겠다.”

그의 소름 끼치는 내공이 이 곳에 모인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먼저 마교의 무리부터 하나씩 그 팔과 다리를 뜯어내며 죄를 묻겠다.”

당정의 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천유하였다.

“달게 받도록.”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까는 소리하고 있네, 미친 놈이!!”

“음?”

당정의 머리 위에서 가공할만한 분홍빛 검기가 날아들었다.

“흥.”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기가 꽤나 위협적이긴 했으나 당정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문의 비원을 이루어냈다.

스스로 온 몸에 느껴지는 전능감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으리란 자신을 넘어 확신을 심어주었다.

자신의 새 몸을 시험해보기 딱 좋으리라 생각하며 온 몸에 차고 넘치는 내공을 끌어올려 내공의 실을 쭉쭉 뽑아냈다.

실은 곧 다발이 되고, 다발은 곧 한없이 응축되어 살인적인 하늘의 빛을 이루어냈다.

수강(手罡).

자신에게 날아드는 저 연약함 검기는 수강과 부딪히는 순간 존재감을 잃고 그저 흩어지리라 생각하며 당정이 손을 휘두르는 순간.

서걱.

“윽…!”

수강을 뚫고, 검기가 파고들어, 그의 손에 한 줄기 검상을 그었다.

생각보다 강맹한 위력에 당황한 당정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내려선, 검기를 날린 무인을 쳐다보았다.

넘실거리는 분홍빛의 머리.

짜증이 잔뜩 나있는지 하늘로 치솟은 눈초리.

이제 막 약관을 넘어선듯한 어린 무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당정은 당황했다.

‘여인…?’

강호에 이렇게 강한 여무인이 있었나 당정이 생각을 더듬던 와중, 그녀가 도를 치켜들어 당정을 향했다.

“누구냐?”

“누구냐고?”

그녀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당정에게 향했다.

“다른 개새끼들은 몰라도 네가 날 모르면 안 되지.”

“누구냐고 물었다.”

“하… 시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그녀가 으르렁댔다.

“죽은 아비와 어미, 그리고 형제와 남매까지. 모두 6명의 가족을 너에게 잃었다.”

“…”

“네가… 네가 날 이 좆같은 무림에 뛰어들게 만들었어!”

“설마…”

“가족이 죽은 그 날부터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당문의 개새끼는 내게 목숨을 빚졌고, 이제 그 빚을 받으러 찾아왔다. 이 개새끼야.”

그녀, 독고령이 도를 고쳐잡고, 일영기를 끌어올리며, 당정에게 외쳤다.

“내가 광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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