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99화 (199/225)

EP.199 19장. 건곤일척 - (12)

“당문의 소가주, 당정이라 하오.”

“모용의 삼남, 모용벽이라 하오.”

당정과 모용벽이 처음 만난 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거울같다 여기곤 했다.

정파지만. 독을 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당문.

정파지만, 선비족의 후예란 이유로 오랑캐라 취급받는 모용.

기이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둘은 금세 친해졌고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십여년.

둘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막사를 떠나 야산으로 찾아온 모용벽은 서슬 퍼런 밤하늘을 쳐다보며 달아오른 자신의 머리를 식혀주는 기분 좋은 밤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 왔나?”

“왔네.”

“오랜만… 이군.”

모용벽은 자신을 찾아온 이, 당정을 보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 꼬락서니가 왜 그런가?”

모용벽이 보기에 당정은 퍽 이상했다.

푸르딩딩하게 불어터진 손.

거뭇거뭇한 안색.

그리고 새빨갛게 핏줄 돋은 눈.

몸에선 썩은 내를 풀풀 풍기며 들어서는 당정을 보고 모용벽은 과거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친우가 아니였다면 진즉에 그를 내쳤으리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친우는 젊은 시절 만났을 때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 옆에 있는 그 아이, 설마 세린인가?”

“그렇네. 세린아, 인사올리거라. 아빠의 오랜 친우이자 모용세가의 가주인 벽이니라.”

“인사는 됐…”

“받게.”

“…”

당정의 옆에 서있는 자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숙이자, 모용벽은 마지못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역겹군…’

당정이 딸 아이를 잃고난 뒤에 이상해졌음은 알고 있었으나 설마 딸 아이의 시체를 기워 강시로 만들 정도로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푸른 달빛보다 더 창백한 달빛이 당정의 옆에 서있던 강시를 비추자, 모용벽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아내며 눈을 돌렸다.

“… 무슨 일로 보자한건가? 원래라면 따로 만나는 일 없이 자네가 무림맹을 정리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아아… 합비에서 일이 좀 틀어졌어. 그래서 그냥 이 쪽으로 왔지.”

“이 쪽엔 이미 충분한 병력이 있어. 괜히 왔군.”

“검신은 어떻게 죽이려고?”

“…”

당정의 질문에 모용벽이 이를 드러냈다.

“검신은 내가 잡는다고 했을텐데.”

“허나 아직도 처리하지 못 했지. 걱정말게, 이제 내가 왔으니. 자네보다 내가 전쟁을 더 잘 알지 않겠나? 정마대전 때 참전도 안 한 자네가 뭘 알겠나?”

“비아냥거리기 위해 왔으면 그냥 가게.”

모용벽은 당정에게 휙 등을 돌렸다.

하지만…

“… 이건 뭔가?”

“보면 모르나? 권신일세. 나 소림의 방장이요~ 하고 뒷방에서 세월만 축냈으니 얼굴을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승복의 강시를 보고 모용벽은 불쾌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사마외도에 한 발짝 걸쳤다 한들 죽은 시체가 걸어다니는 광경은 그리 유쾌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불쾌함의 문제를 떠나 실리적인 문제 또한 있었다.

“소림은 어쩌려고?”

“어차피 소림도 잡아야하니 내가 번거롭지 않게 이 쪽으로 몰고왔네. 권신의 얼굴을 살짝 비춰주니 그 대머리들이 격노하는 꼴이 참… 크큭. 자네도 봤어야하는데 말이야.”

“… 숭산에 들렸나?”

“들리기만 했겠나. 현판을… 아. 자네는 현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 미안하네.”

“미쳤군, 자네.”

모용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림이라니.

일개 개인의 무위로 신위에 오른 자가 검신, 남궁원청이라면

소림은 모든 강호 문파 중에서 가장 강한 문파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묶여있다 한들 소림이 가진 무위는 항상 차원이 다른 무언가로 평가받았거늘, 그 소림의 역린을 건드리고 왔다 당당히 말하는 자신의 친우를 보며 모용벽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분노까지 느꼈다.

“모든 걸 망칠 셈인가?”

“아냐아냐. 그냥 내가 제일 잘 하는 걸로 하려고 하네. 그러기 전에 자네의 도움이나 받고자 온 거지.”

“하북과 산동 지역을 정리하는데도 벅찰텐데 거기에 소림까지 불러들인 연유를 모르겠군.”

“기왕 할 거 일망타진 하자는 거지. 반대로 생각해보게, 소림만 치우면 중원까지 치고 내려가는 데 걸림돌이라 해봤자 남궁세가 하나일세.”

“무얼 하려고 하나?”

“독을 풀려고.”

“…”

“그동안 모아온 독들을 아낌없이 풀 예정이라네. 그 정도라면 이 인근에 개미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지옥도로 만들 수 있어. 어떤가?”

모용벽은 무심결에 당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빛이 당정의 얼굴을 비추자, 그의 눈동자가 유독 도드라져보였다.

그 눈에 번들거리는 것은 광기였다.

“이보게, 정…”

“왜 그러는가, 벽?”

“자네… 무엇을 바라고 왔는가?”

“무엇을 바라다니?”

이제는 강시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정은 싱긋 웃었다.

“약조하지 않았나, 벽. 강호를 불태우고, 모든 것을 다시 세우겠노라 하고.”

“패도를 걷고자 했지만, 폐허를 걸을 생각은 없네.”

“이전에도 계획을 말하지 않았나. 전쟁을 일으켜서 강시들로 병력을 충원하자고.”

“독은 얘기가 다르지.”

“그리 다를 게 뭐 있다고. 크큭… 아! 피독주, 피독주가 필요하겠군.”

당정이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피독주를 하나 건네주었다.

“잘 가지고 있게. 아, 오늘 검신과 싸우는 건 잘 봤네. 그 영감, 아직도 팔팔하더군.”

“…”

“내일 다시 보세나. 적당히 기회를 엿보다가 내가 뒤를 치겠네. 아, 소림도 근처에 와있으니 조심하고.”

당세린을 안아든 당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던져놓고 권신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모용벽은 불안감을 느꼈다.

‘… 미치겠군.’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모용벽은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벌여놓은 일, 기호지세였다.

달리는 호랑이에서 내리기엔 너무 늦었다 생각하며 모용벽은 각오를 다졌다.

다시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발목을 붙잡는 한 줄기 불안감이 있었으나 모용벽은 애써 무시했다.

다시 돌아와 잠을 청하기 위해 몸을 눕힌 뒤에서야 그 불안감이 무엇인지 그는 깨달았다.

‘마교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 꺼냈군.’

당정이 건네준 피독주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자신이 느낀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거 마교가 사천을 휩쓴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용벽은 제일 처음, 당정과 손을 잡는 순간에 이를 밝혔었다.

당시의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오늘 다시 만난 당정은 어딘가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해 잠시 가슴 속에 묻어놨으리라 생각하며 모용벽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모용벽은 검을 차고 다시 최전선에 섰다.

“… 모용 가주.”

“말하시오, 천마.”

“소림이 끼어들었네요.”

“대신 우리도 아군이 하나 추가될 것이오.”

“음?”

“더 말할 시간이 없겠군.”

당문과 당정이 찾아왔음을 얘기하려 했으나 그와 마찬가지로 최전선에 그 모습을 드러낸 남궁원청, 팽유덕, 황보기, 그리고 소림의 승려를 보며 모용벽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묵직한 철봉을 붕붕 돌리며 앞으로 나서는 승려를 보고 천유하가 입을 열었다.

“저 자가 당대의 방장인가요?”

“… 그럴테지.”

얼마 전까지는 소림의 백팔나한을 이끌던 백팔나한장이었다가 권신의 입적 이후 새로이 방장의 자리에 오른 무각 대사가 심후한 내공을 담아 고했다.

“마교의 간악한 무리와 혈교의 잔당을 처리하고자 오늘 소림은 살계를 열고자 하오. 죄없는 중생들의 피까지 흘리게 만들고 싶진 않으니 지금이라도 자리를 뜨길 권하오.”

“풉…”

무각 대사의 말을 듣고 천유하가 웃음을 참지 못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광명좌사… 크큭…”

“예, 하늘이시여.”

“저 땡중의 머리통을 가져오라.”

“존명!”

그 날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은 빈틈이 많구만?”

“이익…!”

쇄도해오는 남궁원청의 검을 힘겹게 막아내며 모용벽이 이를 악물었다.

“늙은이… 그 입을 좀…!”

“여유도 많이 사라졌군. 무위는 뛰어나지만, 수양이 약해. 마공에 손을 대서 그런지 심마에 쉬이 노출되던가?”

“닥…쳐!”

콰광!

넘실대는 마기를 가득 담아 크게 검을 휘두르자 남궁원청이 공격을 흘리곤 모용벽의 가슴팍에 일장을 날렸다.

“커헉…!”

가슴의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검을 고쳐쥐고는 추가로 이어질 남궁원청의 공격에 모용벽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방심했…’

하지만 그 때.

“쿨럭… 크흡!”

어떤 공격을 받지도 않았는데 입을 틀어막고 피를 토하는 검신을 바라보며, 모용벽은 승리의 단초를 잡았다.

“몸이 안 좋나보군, 늙은이.”

“…”

남궁원청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공격은 힘이 없었다.

‘끝내주마…!’

쉬익!

모용벽의 공격이 남궁원청을 압박해들었다.

“쿠흑…!”

“어르신!! 큭…!”

옆에서 팽유덕이 검신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천유하는 이미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대로 남궁원청의 목을 끊어내고 이 전장을 휩쓰리라.

그것이 바로 자신이 걷는 패도의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하며 모용벽이 그 장대한 첫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어…?”

모용벽의 시야가 기울었다.

아니, 기울어진 건 그의 몸이었다.

‘이게 무슨…’

습관처럼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모용벽은 자신의 내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앞으로 한 걸음..

검을 들어 눈 앞에 보이는 남궁원청의 목에 칼을 틀어박으면 모든 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 중요한 순간에 내공이 일어나지 않다니.

온 몸의 혈맥이 무언가에 틀어막힌 것을 알고 당황하던 모용벽의 시야에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이보게, 벽.”

“당… 정…?”

“정말 고맙네.”

“그게 무… 슨… 우욱!”

갑작스레 욕지기가 올라 바닥에 시원하게 게워내자, 모용벽은 거무죽죽한 사혈을 토해낸 것을 보고 모공이 송연해졌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당정에게 물었다.

“하독을… 언제…”

“어제 만나는 순간부터. 혹시 몰라 피독주로 가장한 독도 하나 주었지.”

“대체 왜…”

“고독이 딱 하나 모자랐네. 생각해보니 마공을 익힌 자의 고독은 만들어 본 적이 없더군. 자네 덕분에 살았어.”

당정의 손이 모용벽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의 손은 한없이 차가웠다.

“끄륵… 으윽…!”

“버둥대지 말게. 그럴수록 자네만 힘들어.”

“끄으윽…!”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패도는 내가 대신 이뤄주겠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모용벽은 자신의 단전으로 모여드는, 아니 빨려드는 내공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꽈리를 튼 독과 마기와 악의를 느끼며…

“네가… 네가아악…!!”

“그러게 왜 그랬나. 하필 손을 잡아도 마교라니 말일세.”

뚜둑.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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