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7 19장. 건곤일척 - (10)
은관영의 말을 다 듣고 나온 독고령은 마루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 은약벽이…’
은관영의 의심은 독고령이 들어도 꽤나 아귀가 맞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아귀가 맞는 걸 넘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그녀가 자주 하던 말.
[전 무림을 없애버리고 싶어요.]
그녀가 가끔씩 드러내는 무림에 대한 증오와 무림인에 대한 경멸.
그런 것들이 은관영의 추측과 더해지자, 독고령은 확신이 생겼다.
‘정말 은약벽이… 하지만 왜…’
게다가 은관영은 직접적으로 말하길 꺼렸지만, 그녀가 했던 말 중에는 은약벽이 마교와 내통했다는 암시도 깔려있었다.
전에 독고령을 무당산으로 보낼 때만 하더라도 마교에게 적지 않은 혐오감을 드러냈던 그녀가 아니던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냥 못 들었으면,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으리라 후회됐다.
굳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검후가 밝혔던 것처럼 독고령이 참전해주길 원하는 것이리라.
그녀가 가진 무위는 강호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강력했으니 모두가 그녀를 원하리라.
묵세휘의 말은 반 쯤 맞았다.
그녀의 힘이 강하니 알아서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승냥이 떼는 아니었다.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독고령이 알고 지내던, 친한 인물들 뿐이었다.
‘아니지. 이제 곧 승냥이 떼도 몰려드려나…’
어디 그 뿐이랴.
전쟁이라 함은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자리였다.
만약 당문이 승리한다면?
만약 모용이 승리한다면?
독고진의 딸, 독고령으로 위장해서 살아가는 그녀를 과연 그들이 가만히 놔둘까?
그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문득 살의가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전쟁터에 나가 그 버러지 새끼들을 도륙내고 싶었다.
‘미치겠네…’
지독한 살의가 들끓은 뒤엔 허무가 찾아오고, 이내 습관적으로 만지게 된 자신의 하복부를 쓰다듬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문득 독고령은 위일청이 보고 싶었다.
그냥 그의 품에 안겨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달콤한 사랑의 말을 중얼거리며 행복한 미래만 꿈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독고령은 그대로 그 편안함에 기대어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을 깨달았다.
위일청도 중요하지만, 그 곳에는 그녀와 연관있는 자들이 많았다.
절기를 가르쳐준 남궁원청.
막역지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운영.
운영 못지 않게 오랫동안 함께한 은약벽.
비연과 그녀의 할아버지 앞에서 반드시 복수하겠노라 다짐했던 대상, 모용벽.
그리고 가족의 원수, 당정까지.
‘… 가야하나.’
독고령이 재차 자신의 하복부를 쓰다듬고 있던 와중.
“하아…”
“무슨 일로 그리 한숨입니까, 령?”
“흐엑?!”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독고령이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엔 위일청이 있었다.
“… 가가.”
“크큭, 왜 그렇게 놀라고 그럽니까? 야한 생각이라도 했나요, 령?”
“아… 아니거든요!”
“이리와요. 날이 쌀쌀한데 왜 밖에 나와있습니까?”
위일청이 자연스레 독고령의 곁에 앉아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그의 체온을 즐기며 독고령은 자연스레 위일청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댔다.
“아침에 어디 갔었나요, 령? 자고 일어나니 방에 없어서 놀랬습니다.”
“… 미안해요. 검후 할머니가 오셔서요.”
“스승님이요?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그게…”
독고령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답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평소와 다름을 알아차린걸까?
위일청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
“…”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체온을 즐기며 느긋하게 한참을 앉아있다, 독고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안 물어봐요?”
“물어보길 원하나요?”
“… 모르겠어요.”
“그럼 묻지 않을게요, 령.”
“…”
위일청의 묻지 않겠다는 말에, 독고령은 가슴 한 켠에 무언가 얹힌 것만 같았다.
“… 안 궁금해요?”
“궁금하죠.”
“근데 왜 안 물어봐요?”
“령이 말하기 싫어하니깐요?”
“근데 왜 계속 질문하듯이 말해요?”
“그냥요?”
“아잇…!”
독고령이 위일청의 품에서 버둥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크큭. 뭘 그리 걱정합니까, 령?”
“… 나 걱정한 티 나요?”
“그럼요. 령은 거짓말을 못 해서 얼굴에서 다 티가 나니깐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어요.”
“씨이…”
버둥대다보니 어느새 위일청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게 된 독고령은 고개를 돌려 그와 마주보았다.
“가가.”
“네, 령.”
“… 고민이 있어요.”
“뭔데요?”
“그… 음…”
독고령은 그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그 전쟁에 위일청의 아버지도 끼어있단 사실이 떠올랐다.
“… 가가의 아버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
몸과 몸이 붙어있어서 였을까?
위일청의 몸이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마치 예상치 못한 불의의 일격에 당한듯 굳어버린 위일청은 잠시 후,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하아… 제 아버지요?”
“… 그냥 그… 궁금해서…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가가.”
“으음…”
위일청은 보기 드물게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독고령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잠시 그녀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는 머리를 비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 그게 고민이었나요, 령?”
“꼭… 그런 건 아니고요.”
“하아…”
“마… 말하기 싫으면 진짜 안 해도 되는데…”
“아버지는 으음… 그… 뭐라고 해야할까요…”
위일청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령을 만나지 못한 접니다.”
“… 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위일청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는 얘기해야할 내용이긴 했네요. 제 본가가 흑룡강에 있단 얘기는 했었나요?”
“네. 위씨세가 그러면 흑룡강 일대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는 무가라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희 가문은… 으음… 아주 특이한 점이 하나 있죠.”
“뭔데요?”
“… 여문도가 엄청 많습니다.”
“…”
“그리고 대부분은 으음… 아버지의 여인입니다.”
“… 아버님도 소녀경을…?”
“예…”
위일청은 마치 자신의 치부를 말하듯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하아… 령도 알다시피 소녀경엔 내공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가문에서는 내내 그 심법을 숨겨왔다고 들었습니다. 무인에게 내공 증진은 마약과도 같다보니 단순히 여러 여인과 몸을 섞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상승하는 꿈의 심법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독고령 또한 처음 위일청의 내공심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고, 직접 그 쾌락을 겪은 이후로는 헤어나올 수 없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소녀경의 원래 구절에는 평생을 함께로 한 배필하고만 하라고 신신당부가 있었습니다. 헌데 저희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 그 규율을 깨버렸죠.”
“으응…?”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은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많은 여인과 관계를 가졌다면 위일청만큼 내공량으로 유명해야할 것이 그의 아버님이여야했다.
하지만 독고령은 단 한 번도 위일청의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의문을 이해하듯 위일청은 탄식하며 사실을 고백했다.
“… 아버님은 원해도 할 수 없으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너무 많은 여인들이 아버지를 원한 데다가 아버님은 모든 여인을 공평하게 사랑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여인들끼리 아버지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있었고, 몇몇은 아버지에게 질려 그 분의 곁을 떠나기도 했지요.”
“…”
독고령은 위일청의 고백에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으음… 욕심이 과하셨습니다.”
“… 가가.”
“모든 여인을 사랑할 자신도 없으면서 일단 쾌락을 선사하여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곤, 나중에 버리곤 하셨죠. 그 모든 것은 일신의 무력을 위해서였는데 타고난 재능은 부족하셨는지 감당할 수 없는 내공 때문에 단전이 깨졌습니다. 과욕이 부른 참사였죠.”
위일청은 힘겹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야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버님은 평생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와중에 내공에 대한 욕심이 요즘은 권력으로 옮겨갔는지 모용세가와 작당모의를 하고 계시더군요.”
“… 가가, 그만 얘기해요.”
그의 얼굴이 괴로워보이자, 독고령은 손을 들어 위일청의 뺨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위일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아마 저도 똑같이 늙었을 겁니다. 령을 만나지 않았다면요.”
“네?”
“소녀경을 다 익히고 난 뒤, 저는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버지보다 훨씬 재능있고, 아버지보다 훨씬 대단한 무인이 되리란 사실을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손을 떼어내곤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자식의 목표는 결국 부모가 되더군요. 그래서였는지… 저는 강호의 모든 여인을 다 사랑하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실패했지만, 저라면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죠.”
위일청은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령을 만나고, 관영과 소현 덕분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
“살을 섞고, 한 이불을 덮고, 쾌락을 공유한다고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더군요.”
“… 그럼 어떤 관계가 사랑하는 사이던가요, 가가?”
“서로가 함께 지내면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 지 상상하게 되는 사이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쓸어넘기며 말했다.
“령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내일을, 한 달 뒤를, 1년 뒤를, 그리고 10년 뒤의 우리를 상상하게 되더군요.”
그의 말을 듣자, 독고령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녀 또한 위일청과 함께하는 미래가 어떨지 상상했던 적이 있었기에.
“저도요, 가가. 와… 뭔가 신기하네요.”
“서로 마음이 통했나보네요, 크큭.”
독고령은 문득 위일청이 상상한 미래의 자신이 어떨지 궁금했다.
“가가, 나는 나중에 어떨 거 같아요?”
“령은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차분해질 거 같아요.”
“제가요?”
“네. 지금은 괄괄하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차분한 여인의 모습에 저도 놀라곤 합니다. 아니면 어린아이를 좋아하니 자식과 친구 같은 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네요.”
“… 일청은 나이를 먹어도 지금과 똑같을 거 같아요.”
“어떤 느낌인가요?”
그의 질문에 독고령은 위일청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도 이렇게 매일. 나를 설레게 만들어줄 거 같아요.”
“그런가요?”
“…네.”
위일청의 가슴에 안기며 독고령은 눈을 꼬옥 감았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다시 한 번 그 달콤함을 느끼며, 그 사이사이 씁쓸함을 맛보며 독고령은 결심했다.
온전히 이 행복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더는 후환을 남기면 안 되겠구나.
나는 더 이상 독고진이 아닌, 독고령으로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이제 모든 걸 매듭지어야겠구나.
“령, 내 얘기도 했으니 령의 아버지 얘기도…”
“가가, 할 말이 있어요. 정말… 정말 중요한 얘기예요.”
“뭔데요, 령?”
독고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정인이자, 첫사랑이자, 부군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랑하는 사람.
이번 일만 끝나면 과거는 잊고 온전히 위일청의 아내로서 여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독고령은 말했다.
“가가를 사랑해요. 아주 많이요.”
“저도요, 령. 령을 아주 많이…”
“하지만. 이대로는 온전히 가가를 사랑할 수 없어요.”
“… 네?”
“두고 온 은원이 제 발목을 계속해서 붙잡더라고요.”
“…”
위일청이 진지해보이는 독고령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전쟁이 일어났어요.”
“전쟁이요?”
“모용, 당문, 마교, 무당, 소림, 팽가, 황보… 셀 수 없이 많은 문파가 끼어든 대전쟁이래요.”
“…”
위일청이 당황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독고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가가가 내게 준 사랑은 은원을 다 잊어버리고 살기에 충분한 사랑이였지만… 가끔씩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새까만, 오래된 복수심이 그 뒷맛을 씁쓸하게 만들어요.”
“… 령.”
“이번 기회에 그 모든 것을 털어내고… 온전히 가가와의 행복을 즐기고 싶어요.”
모든 원수가 한 자리에 모이는 기회.
어쩌면 원수가 승리하여 독고령과 위일청의 미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전쟁.
독고령은 지금이 바로 결과를 하늘과 땅에 맡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할 때라 생각했다.
“가가. 몸 성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할 수 없어요. 하지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요.”
위일청의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진심을 꾹꾹 담아내어 독고령이 부탁했다.
“나… 요녕에 가고 싶어요.”
“…”
고개를 숙인 독고령은 그저 묵묵히 위일청의 대답을 기다렸다.
“… 왜 나한테 그런 걸 묻나요, 령?”
“가가니깐요.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가가의 부인이니깐요.”
“그럼 대답이 정해져있네요, 령.”
“… 네?”
혹여나 그가 거절하나 싶어 고개를 들자, 위일청과 눈이 마주쳤다.
“같이 가요, 령.”
“… 가가.”
“처음 령이 나한테 고백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어요.”
“…”
“사랑해요, 령. 정말 많이요.”
위일청이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 슬쩍 웃으며 말했다.
“령은 함께 죽어달라 부탁했지만, 나는 아직 령과 못 한 게 너무 많아요. 이미 함께 죽기로 약속했으니깐, 나도 부탁 하나만 할게요.”
“… 어떤 부탁이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같이… 아주 오래… 오래 살다가… 그러고나서야 함께 죽어줘요, 령.”
“아…”
“같이 가요. 어디든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