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96화 (196/225)

EP.196 19장. 건곤일척 - (9)

독고령은 자리를 파하고, 잠시 밖으로 나왔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맹의 내부에 누가 만들어놓았는지 모를 멋드러진 연못을 바라보며, 독고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갑작스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당문에게 가지고 있던 끝모를 복수심이 조금씩 희미해지며 그 자리를 행복이 채우고 있을 즈음, 이런 이야기를 듣게되니 독고령은 마음이 심란했다.

그 때.

“령 아야.”

“아… 할머니.”

“…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할머니라고 부르지 말거라. 제발 부탁하마.”

“히힛.”

투덜대는 검후를 보며 독고령이 배시시 웃자, 그녀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 무슨 일 있더냐?”

“네?”

“답지 않더구나.”

“…”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더냐?”

“언제는 돌려말하셨어요?”

독고령이 살짝 툴툴거리자, 검후가 피식 웃었다.

“하긴…”

“… 왜요?”

“솔직하게 말하면 본녀가 너를 찾아간 이유 중엔 꽤나 저열한 이유도 있었노라.”

“저열한 이유요?”

“… 네 복수심을 빌리고 싶더구나.”

검후는 연못을 바라보며 자신의 속내를 실토했다.

“네가 당문에게 가지고 있는 원한이 얼마나 큰 지 알고 있는데다 그 무위도 잘 알고 있노라. 하필 걸린 게 막역지우의 목숨이라 본녀가 염치를 잊고 너를 찾았구나.”

“그렇게 말하실거 까지야…”

독고령이 피식 웃자, 검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령 아야, 솔직히 말해다오.”

“뭘요?”

“네가 무의식적으로 배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았노라.”

“아…”

“일청이의 아이를 뱄더냐?”

“…”

검후의 질문을 듣고 독고령은 쑥쓰러운 듯 웃으며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니… 네. 가가의 아이를 가지게 된 거 같아요.”

“아미타불…”

“왜… 왜요?! 그렇게 이상해요?!”

검후가 불호를 읊조리자, 독고령이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그 모습을 보고 검후는 자애로운 미소로 그녀의 손을 쓸었다.

“감당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불호를 뇌까리노라. 아미타불의 대자대비함은 어떤 일도 들어주시니깐.”

“…”

“네 과거와 상관없이… 아니구나. 네 과거까지 포함하여… 너에게 너무나 큰 축복이 찾아왔구나, 령 아야.”

검후는 그 자그마한 몸으로 온 힘을 다해 독고령을 안아주었다.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로다. 축하한다, 령 아야.”

“… 고마워요, 할머니.”

“예끼.”

“히힛…”

“얼마나 됐느냐? 설마 보타문에서…”

“아뇨… 얼마 전부터 그랬어요. 그… 맹에서 나온 뒤로요.”

“아하…”

검후가 실실 웃었다.

“음탕한 년 같으니라고.”

“아… 아니거든요! 이제 가가랑 혼인도 하니깐 그래서… 뭐 그렇게 됐어요…”

“그렇구나.”

검후의 얼굴은 웃는 표정에서 천천히 굳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독고령의 어깨를 토닥였다.

“령 아야, 너는 이번 전쟁에서 빠지는 게 좋겠구나.”

“네?!”

“이 곳에서 몸을 돌보고 있거라. 본녀가 알아서 하마.”

“아니…! 할머니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죠.”

독고령이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어깨에 올린 검후의 손이 그녀를 짓눌렀다.

“… 할머니, 아까까진 나보고 도와달라매요.”

“그 땐 네가 회임한 사실을 몰랐노라.”

“뭐가 달라지는데요?”

“많은 것이 달라지지.”

“이익…!”

검후가 계속하여 독고령을 못 움직이게 막자, 결국 그녀는 내공을 끌어올려 검후의 손을 떨쳐냈다.

“나 아직 멀쩡해요! 언제든 전쟁에 참여할 수도…”

“틀리구나. 령 아야, 네가 전쟁에 참여한다고? 아이를 배에 품고서?”

“뭐가 문젠데요?!”

“이제 곧 새로운 생명을 낳고 어미가 될 아이에게 생명을 빼앗아달라 부탁하라는게야?”

“그냥 조심히…”

“하다못해 달거리를 하는 날에도 비무를 피하곤 하거늘 임신한 몸은 어떻고?”

“그렇다고 나보고 평생 기다려 온 원수를 죽일 기회를 넘기라고요?”

독고령의 말을 듣는 순간, 검후가 물었다.

“그래, 이 참에 물어보자꾸나.”

“뭘요?”

“너는 독고령이더냐, 독고진이더냐?”

“그야 당연히…! 당연… 히…”

독고령이 머뭇거리자, 검후가 대답했다.

“너는 독고령이니라.”

“…”

“복수심에 자신마저 불태우던 복수귀 독고진은 더 이상 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내 앞엔 그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자신의 아이만 볼 날을 기다리는 독고령이란 이름의 여인 밖에 안 보이는구나.”

검후가 독고령의 두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간곡히 청하마, 령 아야.”

“할머니…”

“본녀가 전쟁을 막으러 가는데 있어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친우를 구하기 위함이니라. 허나 그만큼 중한 이유가 바로 너와 같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위해서니라.”

검후는 독고령의 손이 귀한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작 그 전쟁에 너와 뱃속에 있을 다음 세대의 씨앗을 던져넣을만큼 본녀의 낯짝은 두껍지 않구나.”

“하지만… 저는…”

“부디 모른 척, 어쩔 수 없이 본녀의 청을 들어주면 안 되겠더냐?”

검후가 고개를 들어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한 없이 어린, 자그마한 소녀의 몸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자비로운 어미의 눈으로 독고령을 올려보았다.

“응? 그렇게는 안 되겠더냐, 령 아야?”

“… 임신을 안 했을 수도 있잖아요.”

“령 아야…”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요? 혹시나 안 했을 수도…”

“그러지 말거라, 령 아야. 응?”

검후가 독고령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지 말아다오.”

“… 할머니.”

“본녀가 몸 성히 돌아올 터이니 나중에 네 아이를 보여다오.”

“진짜아…”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자꾸만 목이 매여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검후 때문에 닦지 못 하고 그저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나보고 어쩌라고요…”

“미안하구나. 본녀가 미안해…”

“흐윽…”

결국 독고령은 검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검후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독고령이 눈물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독고령은 자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

결국 독고령은 맹을 나와 다시 장원으로 돌아갔다.

일부러 남궁진과 묵세휘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지금 만나는 건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황급히 장원으로 향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는데도 결심이 필요한 자신을 눈치채고, 독고령은 꽤나 놀랐다.

‘나는 변했구나.’

검후의 말대로였다.

위일청은 그녀에게 감당할 수 없이 큰, 그리고 평생을 간직해 온 복수심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 정도로 크나큰 행복을 선사해주었다.

그렇기에 독고령은 억지로 외면하고, 또 눈을 돌리며, 마치 도망치듯 장원으로 돌아갔다.

“령 매! 어디 갔다왔어?! 걱정했잖아…!”

“아니… 그… 잠깐 검후 할머니가 찾아와서…”

“말하고 가지 그랬어. 또 전처럼 말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잖아.”

“… 미안. 다들 곤히 자고 있길래…”

“진짜…”

어색한 웃음으로 백리소현의 책망 섞인 목소리를 흘려넘기고,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가가랑 관영인? 일어났어?”

“다 일어났지. 이미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둘이 같이 있어?”

“관영이는 일이 좀 있나봐.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네.”

“그…래?”

독고령은 망설였다.

이대로 위일청을 만나 검후의 말대로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그저 그의 품 속에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여인의 삶을 살 지.

아니면 은관영에게 찾아가 혹시나 들어온 정보가 없냐 물으며 전쟁에 머리를 드밀지.

그 두 선택지 사이에서 독고령은 망설였다.

“령 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

독고령은 결국 선택했다.

“… 관영이는 어딨어?”

맹에서 장원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독고령은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꼭 붙잡아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찝찝함이 무엇인지 독고령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자였던 시절, 독고령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아온 ‘독고진’의 잔재.

검후는 그녀를 독고령이라고 했으나, 독고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여전히 독고진이며, 독고령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그녀는 조심스레 은관영의 방문 앞에 멈춰섰다.

“관영아, 안에 있어?”

“네에…”

“들어간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먹 냄새가 훅 올라왔다.

“… 이게 다 뭐야?”

“중원 각지에서 오는 서신이요오. 아침부터 맹에 갔다왔나요, 독고 언니?”

“… 알고 있었어?”

“일어나서 알았어요.”

그녀의 방 한 쪽 벽면엔 거대한 무림지도가 그려져있었다.

지도 위에는 어지럽게 움직이는 글자의 향연이 펼쳐져있었고 은관영은 그 앞에 서서 여러 서책과 서신들을 짜맞추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어요.”

“들었어.”

“어디와 어디의 전쟁인지도 들으셨나요?”

“… 어지간한 명문 세가는 다 참여했고, 무당과 소림, 마교, 그리고… 모용에 당문까지 있다고 들었어.”

“누가 일으킨 지도… 들으셨나요?”

“응? 모용벽 아니야?”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은관영은 축 처진 표정으로 그녀와 마주 보았다.

“… 언니, 저 믿으세요?”

“믿지.”

“그럼… 문주님은 얼마나 믿으세요?”

“응?”

갑자기 은약벽이 왜 튀어나오는가.

그런 의문을 잠시 물러두고 독고령은 은관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너만큼 믿지.”

“… 언니.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냥 언니한테만 털어놓는 헛소리라 생각해주세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아무래도 있잖아요… 그… 으으…”

은약벽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다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게요… 으… 정말 미친 소리 같은데요오…”

“그냥 시원하게 털어놔봐. 언니가 다 들어줄…”

“우리 문주님이 전쟁을 일으킨 거 같아요!”

“… 뭐?”

“헛소리 같죠? 진짜 헛소리 같죠오? 근데 정보를 모아보니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문주님 밖에 없어요오.”

“그게 무슨…”

“이거 보세요!”

은관영이 방에 걸어둔 무림지도를 손바닥으로 쿵 내려쳤다.

“지금 요녕과 하북 사이에 전선이 형성됐어요. 근데 이 곳에 원래 뭐가 있는지 아세요오?”

“글쎄…?”

“천진이 있어요! 개방의 본거지요.”

은관영의 설명을 듣자 독고령은 가장 처음 위일청과 만났을 때, 개방의 눈을 피해 배를 이용하여 단번에 산동에 입성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맞네. 거기가 개방이구나.”

“개방의 본거지라고 하면 당연하게 거지가 엄청나게 많겠죠? 아무리 전쟁이라한들 개방은 자신의 일을 절대 놓지 않아요. 게다가 근처에 하오문 산동지부나 하북지부 같이 제법 규모가 큰 지부도 있고요.”

“… 근데?”

“정보가 안 들어와요. 뚝 끊겼어요.”

“… 뭐?”

은관영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주변 인근의 정보가… 뚝 끊겼어요. 마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리려는 것처럼요.”

“전쟁 중에 바빠서 못 전달하는 게…”

“문주님은 보통 자신의 위치를 숨기세요. 철저하게 준비된 일정이지만, 가끔씩 그 경로를 비틀어서 마치 문주님이 어디에도 계시는 것처럼 위장하곤 하시죠. 근데 전 문주님이 어디로 향하는 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저희가 막 의녀문에 들어설 즈음, 문주님은 청해성에 가셨어요.”

“청해성?”

“마교와 대치하고 있는… 곤륜의 앞마당이죠.”

“…”

“그 곳에서 범상치 않은 마기를 지닌 두 명과 한 젊은 여인을 하오문의 안가에서 봤다는 첩보가 있었어요.”

“그게 왜…”

“저희 문주님은 투신과 연이 있으세요. 전부터 투신께서는 서장 너머에 관심이 많으셨고, 문주님은 색목인과도 친분이 있어서 꾸준히 투신과 교류를 나눴어요.”

은관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마교가 갑자기 요녕에 나타났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가장 먼저 곤륜을 넘어야 하는데 그 곤륜을 넘는 것도 엄청 큰일이죠. 투신께서 지키고 계시니깐. 그 다음에는 내내 정파의 영역이죠. 공동, 종남, 화산, 소림, 팽가까지… 그 모든 눈을 피하기 위해선 대막을 지나야하는데 대막을 지나서 요녕으로 돌아들어왔다고 한들 길잡이가 필요해요! 근데…”

은관영이 애원한듯, 마치 자신의 말을 부정해주길 원하는 듯이 독고령에게 매달렸다.

“… 문주님이 청해성을 방문한 이후로 투신께서 사라지셨어요.”

“…”

“문주님은 소문주 시절에 대막 쪽의 동태를 살피는 일도 담당하셨다 들었어요. 아마 그 쪽으로도 지식이 있겠죠.”

“야… 너 지금…”

“중원의 중심지인 이 곳, 안휘성 지부의 하오문에서는 어떤 정보도 받은 적이 없는데 하북 인근에 마교와 당가, 모용세가와 은원이 있는 문파는 전부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너…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이고 부정하려고 애써봤는데요…”

은관영이 절망 섞인 목소리로 탄식했다.

“우리 문주님이… 이번 전쟁의 배후 같아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