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5 19장. 건곤일척 - (8)
그 날은 유독 상쾌한 아침이었다.
“…”
독고령은 늘 똑같이 위일청의 품 속에서 눈을 떴다.
슬슬 쌀쌀해지는 바깥 날씨 때문에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좀 더 이 따스함을 즐기고 싶었다.
‘… 아직은 좀 이른가…’
아직까지 창 밖은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자연스레 손을 들어 몇 번이고 얼굴을 어루만져도 미동도 안 하는 자신의 정인을 바라보며 아마도 피곤하리라 생각하고 독고령은 따스한 품 속을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자 독고령은 살짝 몸을 떨며 자신의 배를 손으로 감쌌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장원으로 온 날부터 그녀는 자주 배꼽과 다리 사이, 자신의 하복부를 자주 어루만지게 되었다.
이게 어미의 위대함인가.
생명을 품었다 생각하자 자나깨나 10개월 뒤에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신경쓸 수 밖에 없었다.
‘… 따듯하게 해주는 게 좋다고 했지…’
두툼한 옷가지를 몇 개 챙겨입고는 아직 자고 있는 다른 이들을 잠시 쳐다보다, 독고령은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밤의 격렬했던 사랑의 흔적들을 지워내며 깨끗하게 몸을 씻어낸 뒤, 몸을 데운 독고령은 연무장이 훤히 보이는 마루로 나섰다.
그녀는 이 마루를 참 좋아했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연무장을 위일청의 아이들이 채우리라.
자신의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커나갈까.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해나가며 하복부를 어루만지고 있을 즈음…
“응?”
대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손님이 찾아오긴 이른 시간이었다.
누구일까 고민하며 조심스레 대문을 열자, 그 곳엔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령 아야.”
“검후 할머니.”
검후였다.
“… 무슨 일이세요?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녀는 답지않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독고령이 그녀의 안부를 물어봐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즈음, 검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호를 휩쓸 대전쟁이 벌어졌노라.”
“… 네?”
“모용벽과 남궁원청의 싸움이 끝이 아니더구나. 모용세가, 황보세가, 하북팽가도 모자라 천마신교가 끼어들며 무당, 소림까지… 가면 갈수록 커지고 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천마신교라니요? 정마대전이라도 벌어졌단 말이세요?”
“그리고…”
독고령이 행복에 눈이 멀어 까맣게 잊고 있던 이야기를 검후가 꺼냈다.
“당문 또한 끼어들었다.”
“!!”
증오스런 원수의 가문이 튀어나오자, 독고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껏 강호의 역사에 없던 대전쟁이니라. 그저 아비규환이 펼쳐져 불씨가 나날이 커지고 있노라.”
검후가 독고령에게 손을 뻗었다.
“본녀와 함께 맹에 가자꾸나.”
“…”
검후의 말을 들었으나 독고령은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잠시 자신의 정인이 자고 있을 장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검후를 쳐다보았다.
“가요.”
“홀로 갈 터냐?”
“… 네. 아직 다들 자고 있으니깐… 내가 대표로 얘기를 들을게요.”
“그래.”
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독고령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
“왔군.”
“어, 왔다.”
“앉게, 부인.”
묵세휘, 남궁진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독고령은 의자에 앉았다.
방에 모인 이들은 고작 넷 뿐이었으나 그 넷이 가진 무위와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하나같이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 검후 할머니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어.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렇다네.”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거야? 당문과 모용세가 얘기는 뭐고?”
“그 부분에서 혼선이 생기고 있다네. 원래 이런 일은 하오문이나 개방과 같은 정보집단을 통해 수집하곤 했는데 이번 일은 개방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그들 또한 아는 게 없더군.”
“…”
“그러던 와중, 팽가에서 연락이 왔다네.”
이야기가 끝나면 은관영을 통해 하오문 쪽 정보도 확인해봐야겠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재차 물었다.
“팽가? 도선?”
“대전쟁이 벌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더군.”
“대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그 때, 옆에서 잠자코 있던 남궁진이 입을 열었다.
“모용세가가 마교와 손을 잡은 듯 하오.”
“마… 교? 그 마교?”
“그렇소.”
남궁진은 독고령이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팽가에서 말하기를 모용벽이 사마외도의 술법을 익혀 아버지께 큰 상처를 입혔다고 하더군.”
“… 그냥 갑자기 강해져서 사마외도라고 말한 것은…?”
“아니오.”
남궁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운 천마가 정해진 모양이오. 모용벽이 새로운 천마가 이끌고 온 마교의 무리, 그리고 요녕, 길림, 흑룡강 일대의 문파들을 규합해 하북으로 치고 내려오는 중이라는군.”
“… 새로운 천마라니…”
“팽가와 황보세가. 두 세가가 막아내기엔 버거운 병력이었지. 아버님과 함께 전선을 뒤로 물리며 주변 일대의 문파와 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오. 그리고…”
남궁진이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 무당이 가세했소.”
“무당…”
마교에 대한 은원이 가장 깊은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작금 무림의 대다수는 무당을 얘기할 것이다.
그 예상과 같이 무당은 마교가 등장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가세했다.
“무당이 옛날에 비해 그 세가 약해졌다고 한들 의미하는 바는 컸소. 게다가 당문이 불을 질렀지.”
“… 당문이?”
“당문이 감숙, 섬서, 산서를 지나 하북을 쳤소. 목적지는 아마 요녕인듯 한데… 어마어마한 수의 강시를 이끌고 있소.”
“!!”
그 말을 듣는 순간, 독고령이 이를 악물었다.
한동안 위일청과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마음 한 켠에 잊고 있었던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필 당문이 산서를 지날 때 소림이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자 나섰고… 강시가 된 권신을 마주쳤소.”
“권신이… 강시가 됐다고?”
“소림 측이 확인했소. 그 후로는 소림도 당문을 쫓기 시작했소. 백팔나한과 무승이란 무승은 다 내보낸듯 하더군.”
명문세가 중 네 개의 세가.
구파일방 중 그 수좌라고 할 수 있는 태산북두, 무당과 소림.
마교.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군소문파의 개입까지.
“… 정말 대전쟁이군.”
“끔찍하게 지독한 은원의 고리로 엮여있지. 말이 군소문파라고 하지만, 그 군소문파 사이에 북해빙궁이나 철혈문과 같이 제법 강대한 집단도 섞여있소. 그리고…”
남궁진이 잠시 독고령의 눈치를 살폈다.
“… 뭐? 그냥 말해.”
“아니… 그…”
“내가 대신 말하리다, 맹주.”
옆에서 묵세휘가 끼어들더니 독고령에게 말했다.
“… 부군의 고향이 어딘지 알고 있는가?”
“위 가가? 아니… 어… 흑룡강…”
“맞소, 흑룡강.”
“아…”
“모용세가에 붙은 중소문파 중… 위 공자의 친가도 끼어있네.”
“엥?”
“그러니깐 그… 모용세가와 한 패가 된 이 중… 부인의 시아버지가 있단 소릴세.”
독고령은 그제서야 왜 다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지 깨달았다.
“… 시발.”
사실 독고령에게 있어 위일청의 아버지는 정말 어중간한 위치였다.
시아버지라고 굽실굽실 모실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막 대할 생각도 없었다.
위일청의 아버지니깐, 그의 소중한 사람이니깐 저절로 독고령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된 것 뿐.
하지만…
‘시발, 하필 붙어도 모용이랑 붙어먹었냐…’
독고령은 골머리를 썩였다.
“술 땡기네…”
“필요하면 한 잔…”
“… 아냐. 됐어.”
독고령이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좌중에 모인 세 명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 뭐? 왜?”
“독고 부인이 맞소?”
“아니… 자네가 술을 거절할 줄도 알았나?”
“령 아야, 그렇게도 상심이 큰 것이더냐?”
“… 누굴 술에 미친 년으로 보나…”
그저 아이를 밴 이후로는 술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들어 자제할 뿐이었는데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이 나오자 독고령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아니, 씹… 됐어. 또 짜증만 올라오네. 그래서 뭐? 왜 부른건데?”
“… 오늘 따라 독고 부인이 뭔가 이상하…”
“쓰읍.”
“… 큼큼.”
묵세휘가 목을 가다듬고는 본론을 꺼냈다.
“원래는 독고 부인에게 10년에 한, 두 번 정도 부탁을 하려고 했네. 헌데 그 시기가 조금 일찍 와버렸네.”
“니들 편 들어줘서 싸워달라?”
“…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다만, 그 안은 훨씬 복잡한 사정들이 있다네.”
“읊어봐.”
묵세휘가 턱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번 전쟁은… 승자가 없을 가능성이 높네.”
“승자가 없다고?”
“무림의 근간 자체가 휘둘릴걸세. 후우… 젠장. 관무불침을 아는가?”
“관무불침? 그… 나랏님이 무림인은 안 건드린다는 거?”
“그래. 그걸세. 본 군사가 맹주와 손을 잡은 이유기도 하네.”
“… 그게 왜 중요한데?”
“사람이 덜 죽네.”
“… 엉?”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묵세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충분히 힘이 강해진 세력은 쉽게 나서지 않는다네. 무당과 소림이 그러하지. 태산북두란 말엔 강호인의 존경도 있지만, 어찌보면 그들의 행보 그 자체일세. 태산과 북두성은 움직이지 않지.”
“… 그런데?”
“강대한 세력은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강대한 세력의 발호를 막는단 말일세. 억제력을 가지지. 원래 세력이란 게 그러하다네. 힘이 강해질수록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힘을 지키려 들지. 헌데 만약 정말로 강대한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인다면… 이를 누가 중재하였는가?”
탁.
묵세휘가 손가락으로 탁상을 내려찍었다.
“관일세. 결국 관이 나서서 제압할 수 밖에 없다네.”
“이번 일도 관에게 중재해달라고 하면 되겠네. 뭐가 문제야?”
“그렇다면 단순히 무림의 일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휘말리는 대전쟁이 될걸세.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일어날지 상상도 안 가는군.”
“…”
무림인은 강하고,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집단을 이기기 위해선 더 강하거나 더 큰 집단이 되어야했다.
“본 군사가 관무불침을 이루고자한 이유가 이걸세. 관군이 나서서 무림을 중재해준다? 좋은 일이지. 허나 관군은? 곧 백성이고, 민초일세.”
“… 시발, 끔찍하네.”
“이전에 본인이 황제 폐하를 알현했을 당시 이러한 논리로 무림의 일은 무림에서 해결하겠다 허락받았네. 대신 우리 또한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이 얘기는 나중에 함세.”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막 사건이 터졌으니…”
“이번 전쟁을 못 막아낸다면 황제 폐하의 신뢰가 떨어지고, 결국 관이 나설걸세.”
“…”
“안 봐도 뻔하지. 시산혈해가 펼쳐질걸세.”
묵세휘가 목을 매는 이유가 대충 이해가 갔다.
“그 뿐일까. 모용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 한들 안 그래도 당문이 혈교와 손을 잡은 것까지 생각해본다면 백도 무림의 근간 자체도 흔들릴걸세. 맹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흐려지고 있네.”
“자질구레한 이유네.”
“그럼 좀 더 절박한 이유를 들이대마, 령 아야.”
지금껏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검후가 입을 열었다.
“남궁원청 그 멍청한 놈이 그 곳에 있노라. 본녀와 오랜 세월을 지낸 친우이자,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맹주의 아비이자, 너의 스승이 그 곳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노라.”
“…”
“도와다오, 령 아야.”
검후의 절절한 눈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독고령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 조금만 생각해보고요.”
무의식적으로 또 한 번.
자신의 하복부를 손으로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