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90화 (190/225)

EP.190 19장. 건곤일척 - (3)

“약벽아.”

“예, 어르신.”

남궁원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은약벽을 바라보았다.

은약벽은 여전히 의뭉스런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었다.

“… 무슨 짓을 저지른게야?”

“제가 매번 말씀 드렸잖아요, 어르신.”

은약벽이 부채를 접는 순간, 남궁원청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 무림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죠.”

“… 네가 말하던 무림은 매번 사특한 사마외도의 무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더냐?”

“설마요. 저희 하오문도 전대 문주님 시절까지만 해도 사파와 정파 사이의 회색 문파였잖아요? 애초에… 정사마를 나누는 기준은 뭔가요?”

“…”

남궁원청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대답을 머뭇거리자, 은약벽의 옆에 서있던 천유하가 말했다.

“검신께서 대답을 못 하니 내가 대답할까요?”

“천마께서는 답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검은 머리를 찰랑이며 한 발짝 나선 천유하는 주먹을 꽉 쥐어 다른 이들에게 내보였다.

“힘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죠. 그 외엔 없어요.”

“힘이라… 재밌는 시선이네요. 어째서 그러한가요?”

“정파의 위선자들은 힘을 쌓는 이유를 수행을 위해서라고 말하죠.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천유하가 내공을 끌어올리며 장내에 모인 이들에게 이를 내보였다.

“지키기 위해서죠.”

“크하핫, 천마들은 대대로 광오함을 가지고 있는건가?”

남궁원청이 아무런 말도 없자, 옆에서 묵묵히 천유하의 말을 듣고 있던 팽유덕이 이죽이며 앞으로 나섰다.

“정파의 위선자라… 그래. 마교의 백정들이 매번 내뱉는 말이곤 하지.”

“함부로 앞에 나서지 마. 본좌는 지금 검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본좌라… 젊은 천마께서 그리 스스로를 칭할 실력은 되고?”

팽유덕이 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음?!”

어디선가 거무칙칙한 봉이 날아왔다.

챙!

팽유덕이 재빨리 도를 뽑아 튕겨냈으나 봉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던진 봉을 회수하며 두 사내가 마기를 풍기며 나타났다.

“천마꼐서 전 맹주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디 일개 문주 따위가 끼어들지?”

“… 대호법과 좌사군.”

“빠져라, 팽가. 네 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크… 크큭… 크하핫!!”

대호법의 경고를 듣고 팽유덕이 웃음을 터뜨리다…

“… 오늘 제대로 한 번 해 보자는건가?”

기운을 폭사했다.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가 끝난 듯 팽유덕이 도를 잡은 손을 고쳐잡으며 장내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자, 아무 말 없던 남궁원청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 유덕아, 기운을 거둬들여다오.”

“어르신.”

“… 궁금하여 그렇다.”

남궁원청의 눈이 천유하에게 향했다.

“지킨다라… 젊은 마귀야, 답해보라.”

“어떤걸요?”

“네가 생각하는 정사마의 기준이 궁금하구나.”

“간단하죠. 가증스런 위선자의 거죽을 얼굴에 쓰고 있으면 정파, 탐욕을 위해 솔직함을 드러내면 사파,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노라면 천마신교.”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

남궁원청이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당을 불태우던 네놈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말하는구나.”

“살려면 서로 죽고 죽이는 무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 손속이 잔혹했다느니 같은 소리는 하지 마시죠. 실망할 거 같으니깐.”

천유하의 눈이 남궁원청을 찬찬히 살폈다.

“역시… 강남의 귀한 땅을 차지한 지주답네요.”

“지주라…”

“고운 비단 옷, 옥으로 만든 형계,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기름기 있는 피부가 얼마나 잘 살고 있나 보여주네요.”

“핏덩이가 노부를 가지고 놀려드는구나.”

남궁원청의 손이 잠시 흐려졌다.

그리고…

파앙!

남궁원청의 격공장이 천유하를 덮쳤다.

“정곡을 찔려 화가 나셨나요?”

하지만 가볍게 손을 털어 그의 격공장을 쳐내곤 천유하가 피식 웃었다.

“정마대전이 왜 생겼을까요? 당사자인 검신께선 생각하신 적 있나요?”

“마귀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지.”

“그렇군요. 하긴… 가지고 있는 자는 모르죠. 비옥한 땅, 너른 강. 무인도 먹고 살아야 검을 휘두를텐데 되려 깨달음을 얻겠다고 스스로 배를 곪는 놈들이니 알 리가.”

또 다시 천유하가 비웃자, 옆에 있던 은약벽이 그녀를 제지했다.

“천마님, 이야기가 겉도네요.”

“어머, 미안해요. 하오문주. 음… 검신을 만나도 별로 화나리란 생각은 안 했는데 본능적으로 짜증이 치솟네요. 역시 저도 아버님의 딸인가봐요.”

“피가 무서운 법이죠, 후훗.”

마치 오래된 친우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은약벽과 천유하를 보며 팽유선이 으르렁거렸다.

“하오문주. 엉덩이만 가벼운 게 아니였나?”

“어머,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시는 게 무섭네요.”

“그래도 같은 백도의 무림인이라 믿었거늘, 마교의 버러지와 친하게 지내는 꼬락서니를 보니 욕지기가 올라서 말일세.”

“같은 백도의 무림인이라… 후훗.”

은약벽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죠. 저도 그대와 똑같은 버러지 같은 무림인이죠.”

“… 뭐라?”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을 해할 줄 밖에 모르는 버러지, 은원이란 명목으로 당당하게 사람을 죽이는 백정들, 관무불침이란 기치를 이뤄내 관의 통제도 받지 않는 역도, 약한 이에게 다정하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망나니들.”

은약벽의 눈이 가늘어지며 팽유덕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림인, 아니던가요?”

“허튼…!”

“…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약벽아?”

팽유덕의 말을 끊고 검신이 끼어들자, 은약벽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갑자기요? 이상하네요. 저는 항상 무림인이 싫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어르신도 위만 보지, 아래는 안 보시죠?”

“무림에 속한 이가 무림을 욕하더냐?”

“네, 그렇답니다. 가장 낮은 이들의 문파, 하오문의 문주인 저니깐 욕할 수 있죠.”

“너를 베는 일은 힘들지 않아. 허나 그냥 베기엔 마음에 걸리는구나.”

“이유라… 음… 이유가 필요하신거군요. 하긴…”

은약벽이 부채를 뺨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 년 많은 수의 마부가 죽고, 점소이가 다치고, 기녀가 화대를 못 받는 일이 많답니다. 으음… 제가 꾸준히 맹에도, 관에도 제기한 문제였죠. 알고 있으셨나요?”

“…”

“젊은 날의 실수, 그 정도 치기는 있어야 무인, 명문세가니 참고 넘어가라. 매번 똑같은 답변. 그럼에도 사소한 은원에는 목숨을 걸고 나서는 게… 역겹더라고요.”

“약벽아…”

“그깟 은원이야 물에 흘려넘기는 것도 방법일텐데… 정작 사람의 목숨을 귀히 여길 줄 모르는 자가 사람을 죽이는 데 가장 능하다는 이 모순에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시원하게 서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봤어요.”

은약벽이 두 손가락을 모으며 웃었다.

“죽고, 죽이는 자리요. 사이에서 제가 열심히 조율했답니다. 기쁘신가요?”

“… 이 곳에서 정마대전이라도 다시 일으킬 셈이더냐?”

“단순히 정마대전으로 끝날까요?”

그녀의 되물음과 함께 남궁원청은 또 한 무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 모용벽.”

“만나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검신.”

모용벽이 엄청난 수의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다.

“어머, 많이 데리고 왔네요?”

“천한 년.”

“야박하셔라. 요녕 일대를 재편하는 데 많은 도움을 드렸잖아요?”

“무슨 꿍꿍이더냐?”

“후훗.”

모용벽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낌새이자, 은약벽은 웃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장내에 모인 모든 분에게 지금부터 소개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제 손님이니 이 정도 배려는 해드려야겠네요.”

은약벽이 먼저 모용벽을 가르키며 말했다.

“모용세가는 패권을 잡아 무림을 일통하는 게 꿈이랍니다. 그래서 천마신교와 손을 잡으셨죠. 마공으로 벽을 깨는 성취를 이루셨다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 쪽이 적성에 맞으셨을 거 같네요.”

“이 년이…!”

“이 쪽에 계신 천마께서는 비옥한 땅을 원하는 지극히 실리적인 섭정자세요. 그래서 가장 비옥한 땅인 중원 일대를 칠 수 있는 교두보를 원하시기에 제가 빗장을 잠그고 있던 투신을 치워드렸답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맞아 기쁘네요.”

“당연히 중원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오대세가의 수좌를 이 곳에 모셔야했는데 어머나… 검신께서 알아서 요녕까지 와주시니 너무 기쁘네요.”

“…”

“요녕에서 중원까지 내려가는 길목을 지키는 호북 일대도 치워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팽가주와 황보가주도 초청드렸답니다. 가문의 일원을 안 끌고 왔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이미 다 확인했답니다?”

“고작 이게 다인가, 음존?”

이를 악물고 묻는 팽유덕을 보며 은약벽이 되물었다.

“부족하신가요?”

“이게 다냐고.”

“다는 아니랍니다.”

“그럼 다 부르게. 지금 당장!”

팽유덕이 도를 들어올리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오늘 네 년과 함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을 참할테니!!”

후웅!

팽유덕이 도를 휘두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천유하가 검을 뽑아 들어 팽유덕의 도기를 막아섰다.

“길잡이가 죽으면 곤란하지. 게다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텐데?”

“닥쳐라, 마귀!”

“후훗, 잘 부탁드려요. 천마님.”

은약벽이 몸을 뺌과 동시에 모용벽이 교대하듯 앞으로 나왔다.

“검신은 어쩌시겠소? 나는 일대일도, 다대일도 좋은데.”

“… 극명아.”

“예, 어르신.”

“신의와 함께 빠지거라.”

“…”

“어서!”

“… 예.”

“어… 어르신!”

“운영.”

남궁원청이 운영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다행이구만.”

“예?”

“모용벽, 저 놈. 건강하구만. 그새 나았나보네.”

“…”

“어서 가보게, 딸 아이의 혼례는 지켜봐야지.”

“신의 어르신…”

“어서 가게!”

재촉하듯 말하는 남궁원청의 말을 듣고, 결국 운영이 노극명에게 부탁했다.

“… 극명, 부탁합니다.”

“예.”

그렇게 운영과 노극명이 자리를 뜨자, 모용벽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하면 되겠소, 검신?”

“혼란하구나… 이해가 안 가는 게 너무나 많아.”

“무슨 소리요?”

“허나 한 가지는 확실하구나.”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버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들었다.

“… 모용벽, 네 놈이 결국 야심을 못 버렸구나.”

“다들 그렇지 않소? 가슴에 큰 뜻을 품어야 사내지.”

“클클클, 암모술수를 꾸미는 것보단 낫구나.”

남궁원청이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모용벽 또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이 검게 물들며,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장내에 모인 이들이 다들 긴장하며 손에 쥔 무기를 다시 고쳐잡았다.

그리고…”

“쳐라!!”

“권존! 가신을 불러모으게!!”

“예!”

“정파의 위선자놈들을 죽여라!!!”

“가라!!”

순식간에 수라장이 벌어졌다.

어느새 몸을 빼내 멀리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은약벽은 조소를 흘렸다.

“… 무림인은 다 거기서 거기네요.”

패권을 원해 마교와 손을 잡은 모용세가.

그에게 노려지는 남궁원청.

요녕과 맞닿아 모용세가와 같이 패권을 다투는 하북팽가와 황보세가.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자리잡고 있는 비옥한 땅을 원하는 마교.

그리고…

“마교를 싫어하는 당문과 무당은 언제쯤 찾아올까요? 방장을 죽인 당문을 미워하는 소림은 또 언제올까요? 검신이 죽은 뒤, 분노하며 달려올 맹주는 언제 도착할까요?”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귀들의 다툼.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 일련의 각축장을 바라보며 은약벽은 흐뭇함을 갖출 수 없었다.

“모두 바보 같네요.”

문득 누군가 떠올랐다.

이 광경을 같이 기뻐해 줄 이, 광마.

그는… 아니,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떠올리며 은약벽은 서책을 써내려갔다.

*

독고령이 맹에서 머물게 된 건 고작 3일이었다.

“나가주시게, 독고 부인.”

“엥?”

“… 제발 꺼져달란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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