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9 19장. 건곤일척 - (2)
사람들은 그녀를 음존(音尊)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그녀를 음존(淫尊)이라고 멸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약벽은 무림맹이 준 호칭보다, 경국(傾國)이란 별호를 가장 좋아했다.
처음 무림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부터… 은약벽은 무림이란 거대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게 꿈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
그 날은 유독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문주님, 오늘은 가게를 일찍 닫을까요?”
“네. 손님들은 일찍 물리세요. 그리고… 술을 여러 병 갖다 주시겠어요? 독한 백주로요.”
“네, 알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강호에 퍼진 하오문의 지점 중 한 곳이었다.
창 밖에 우수수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잠시 손에 잡고 있던 붓을 놓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후훗.”
빗줄기 사이로 거한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까지 격전을 펼친 탓이라 온 몸의 근육이 부풀어오르고, 빗줄기가 닿을 때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험악해보였지만 은약벽은 우산을 하나 챙겨나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나요, 손님?”
“아, 시발. 힘들어 뒤지겠네.”
“당문은 어땠나요?”
“좆같더라.”
거한, 독고진은 온 몸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기루로 들어섰다.
“술은?”
“준비해뒀답니다.”
“역시 하오문주. 백주지?”
“당연히 백주죠.”
“그리고 혹시 의원도 불러줄 수 있나?”
“의원이요? 신의를 말하나요?”
“… 운영이 아니더라도 아무나.”
독고진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르켰다.
“눈이 침침해. 이거 좀 좆같네.”
“독에 당하셨나요?”
“그런 거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다. 시간 지나면 나을 줄 알았는데 계속 침침하더라고.”
“제가 한 번 볼까요?”
은약벽이 손을 뻗자, 독고진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받아들였다.
“음…”
독고진이 몸을 숙여 은약벽과 높이를 맞추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벌려 눈동자를 확인했다.
확실히 독고진의 안구에 무언가 희끄무레한 이물질이 끼어있는 걸 보고 은약벽이 인상을 찌푸렸다.
“… 실명독이네요.”
“시발. 이 개새끼들 요즘 좆같은 독 존나 많이 쓰더라.”
“이상하네요. 손님은 독에 대한 내성이 되게 강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번에 만난 새끼가 뿌린 것도 양기를 날뛰게 하는 독이더군. 양기가 날뛰니깐 광증도 잦아지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증상도 끼어들고… 이 시발!”
독고진의 얼굴이 울긋불긋 달아오르자, 은약벽이 그를 진정시켰다.
“… 독의 배합도 조금씩 바꾸나 보네요. 해독에 능한 자를 수배할게요.”
“가능한 빨리.”
“네, 후훗.”
은약벽이 손을 내뻗자, 독고진이 인상을 구겼다.
“안 잡으실 건가요? 눈이 불편하시다면서요?”
“…”
“후훗, 어린아이 같으셔라. 여인의 손도…”
“개소리 할 거면 놓는다?”
“매정하셔라.”
독고진은 은약벽이 이끄는대로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눈이 불편해서였을까?
평소보다 다른 신경이 예민해져있었다.
은약벽의 손은 생각보다 딱딱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강호사절화의 일원, 미녀임에 주목하지만.
독고진은 그녀가 하오문주이자, 음존이라 불리는 고수임에 주목했다.
이윽고 독고진의 코에 짙은 여인의 향기와 함께 술내음이 나는 곳에 도착하자, 은약벽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술도 따라드릴까요?”
“그 정도로 병신은 아니야.”
“아쉬워라, 후훗. 오늘 드디어 손님과 한 번 자보나 싶었는데 말이죠.”
“관심 없다.”
술상을 뒤적거리던 독고진의 손에 술병이 닿자, 그는 병을 집어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크으으… 좋군.”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시고요. 술이 돌면 독이…”
“적당히 내공으로 안 퍼지게 하고 있으니 상관없어.”
“… 손님이 그러시다면야.”
그렇게 한동안 방 안은 기이한 침묵에 휩싸였다.
독고진은 술을 기울이고, 은약벽은 말없이 서책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침묵을 깬 것은 독고진이 술을 다 비운 뒤, 다른 술병을 찾다 은약벽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 왜?”
“술병을 쥐어드리려고요.”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그러게요. 비가 와서 그런가?”
은약벽의 목소리가 촉촉해졌다.
“남자가 고픈 날이네요.”
“… 음탕한 년.”
“그러고보니 손님도 참 특이하단 말이죠? 아무리 일과 일의 관계라지만, 저는 손님과 제법 교분을 쌓았다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슬슬 동침할 때가 되지 않았나…”
“나 간다?”
“쯧. 혹시 동자공을 익히신 건 아니죠?”
“이익…!”
쿵!
독고진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계집질에 한눈팔 시간 따위 없어! 시덥잖은 헛소리를 늘어놓을거면 올라가지.”
“… 알았어요. 그만하죠, 후훗.”
“시발… 술 맛 버리게.”
일단 짜증을 내며 은약벽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지만, 얼마 못 가 술병을 내려놓은 독고진이 그녀에게 물었다.
“하아… 뭐?”
“네?”
“왜 갑자기 궁상이냐고.”
“어머, 제 얘기를 들어주시는 건가요?”
“… 해 봐. 이제 너랑 같이 지낼 날도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들어주지.”
“흐음…”
은약벽은 탁상에 턱을 괴고 독고진을 바라보았다.
“참 재밌는 분이란 말이죠, 손님.”
“… 뭔 지랄을 하려고?”
“아니랍니다. 그냥 혼잣말이에요.”
“…”
은약벽은 피식 웃으며 말을 흐렸다.
독고진이 겉은 거칠어도 속이 따스한 것도, 그리고 놀림받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약벽은 딱 거기서 멈췄다.
“저는 비 오는 날, 유독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제 인생에서 힘든 날은 항상 비가 와서 그런가봐요.”
“천하의 하오문주께서도 힘든 날이 있었군.”
“어머나, 저도 천출이랍니다. 5살 때였나? 어머니가 저를 기루에 내다파셨거든요.”
“… 몰랐군.”
“그 날 비가 많이 와서 내가 흘린 게 눈물인지, 아니면 빗물이 뺨을 타고 흘렀는지 헷갈리네요. 아무튼 그 때, 선대 하오문주께서 거둬주셨죠.”
독고진이 괜히 할 말이 없어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던 순간, 은약벽이 그의 술병을 뺏어들어 자신의 잔에 따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음… 나중에 알았는데요. 우리 어머니는 은원이 있었대요.”
“은원? 무림인이였나?”
“아뇨. 약방의 의녀였어요. 아버지는 약방의 의원이었고요.”
“… 근데 은원이 생겨?”
은약벽의 말이 잠시 끊겼다.
그녀가 술 잔을 비우고는 또 한 잔, 술잔에 술을 채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손님.”
“듣고 있어.”
“손님은 만약 신의께서 독선을 치료해주면 용서해줄 건가요?”
“용서는 무슨. 그 새낀 원래 그런 새끼라서 신경 안 써.”
“후훗… 무의미한 질문이었네요. 모든 무림인이 손님 같았으면 참 좋을텐데…”
주륵.
은약벽이 또 한 잔, 술을 마신 뒤 입가에 흐르는 술을 소매로 스윽 닦아냈다.
평소답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 독고진은 괜히 이마만 찡그렸다.
“… 원수를 치료해줬다고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살해당할 위기였다고 하더라고요. 구족을 멸한다나, 뭐라나. 그 구족에 내 부모님도 들어가 있고요.”
“복수는?”
“어머, 대신 해주시게요?”
“… 못 할 것도 없지.”
“마음은 고맙네요. 하지만 괜찮답니다? 이미 다 처리해뒀죠, 후훗. 그 날도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더라고요.”
“…”
은약벽의 목소리가 조금은 낮아진 걸 느끼고, 독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 복수를 했는데 왜 목소리가 우울하냐? 찝찝하게.”
“원수한테도 자식이 있더라고요. 그 애가 우는 게 괜히 나 같아서…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했을까요?”
“…”
은약벽이 뒷일을 독고진의 상상에 맡기자, 그는 말없이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 시발.”
“후훗. 괜히 술 맛을 떨어지게 만들었나요?”
“다음에 이딴 얘기할 거면 더 독한 술로 가져와, 시발.”
“어머, 이제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요?”
“… 올라간다. 남은 술은 방으로 올려보내.”
독고진이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약벽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기감을 끌어올려 더듬더듬 밖으로 나가는 독고진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손님.”
“뭐?”
“이제 당문은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직계 몇 명과 장로들, 그리고 독선 뿐이에요.”
“근데?”
“복수의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환희.”
독고진은 지체없이 답했다.
“독선 그 개새끼의 목을 따는 날, 세상이 떠나가라 웃을거야. 그리고 가족이 재가 되어버린 고향까지 당정 그 버러지 새끼의 목을 들고 찾아가 잔치를 벌이려고.”
“… 멋지네요.”
“갑자기 그건 왜?”
독고진의 목소리에 조금 짜증이 섞인 걸 느끼고, 은약벽은 그저 말을 얼버무렸다.
이럴 때 조금 더 얘기하면 금세 그의 광증이 올라와 난동을 부린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그냥요.”
“실없기는. 먼저 간다. 의원, 수배해놔.”
“네. 정 안되면 영약이라도 하나 훔치러 가실래요?”
“영약?”
“아까보니 태양혈 근처에 양기가 잔뜩 뭉쳐있더라고요. 광증도 치료할 겸, 극음의 영약이라도 손에 넣는 게 어떠세요? 그 영약이 북해빙궁의 신물이거든요.”
“그게 눈에도 좋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혹시 아나요? 음양지체를 이뤄 환골탈태라도 하실지, 크큭.”
“시발, 북해빙궁이면 여기서 존나 멀잖아. 일단 치료해보고 안 되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보지.”
“네, 손님.”
“간다. 너도 자라.”
“편히 주무시길.”
벽을 짚어가며 떠나는 독고진을 바라보다 은약벽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술잔에 남은 미적지근한 술을 마저 삼켰다.
“환희… 라…”
정말 기쁠까?
은약벽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찾아가 복수를 한 뒤, 원수의 자식이 내뱉은 말을 그녀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 된다면 죽어서라도!!]
고작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가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그 때, 은약벽은 깨달았다.
잘못된 것은 누군가의 원수를 치료해준 그녀의 부모도, 그녀의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었다.
무림, 그 자체였다.
은원을 갚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이 기괴한 강호가 문제였음을 깨닫자, 그 때부터 은약벽은 자신의 여생을 오직 무림의 종말을 위해 소모했다.
“… 맛이 없네요.”
취기가 오르는 데다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자, 은약벽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를 볼 때마다 그 날 죽인 원수의 아이가 흘린 피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기분 나빠.”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전 무림을 없애버리기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다 되뇌이며.
은약벽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