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88화 (188/225)

EP.188 19장. 건곤일척 - (1)

사천.

모든 독의 종주라 자부하는 당문이 오랜 세월 패자로 군림하던 곳.

중원과 떨어져 있음에도 당당히 오대세가의 일좌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명문세가였으나 이제는 그저 시체 썩는 냄새와 매캐한 독의 냄새만을 풍기하는 음침한 곳이 되어버린 당문의 거처 내에서 두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혈라에게 연락은?”

“여전히… 없습니다.”

“대법은?”

“…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정녕…”

“소문이… 맞는 듯 합니다…”

콰직.

당문의 가주, 당정이 자신이 앉아있던 용상의 손잡이를 부러뜨렸다.

“대법을 실행하였음에도 혈교주가 돌아오지 않더냐?!”

“… 예.”

“어떻게…!!”

당정이 용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그의 손 틈 사이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윤회를 끊은거지?”

“… 모르겠습니다.”

“누가!!!”

당정의 전신에서 흉흉한 기운이 끌어오르자, 그에게 보고하던 무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누가 죽였나? 누가 윤회를 끊었지?! 삼신도 해내지 못 한 일이거늘 대체 누가…!!”

“… 독고… 령이라고 합니다.”

“독고…?”

끊임없이 자신과 가문을 괴롭히던 원수의 성을 듣는 순간, 당정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더니 수하를 바라보곤 눈을 부릅뜨며 물어보았다.

“또 광마야?”

“광마가 아니라… 그의 여식이라고 합니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아아!!!”

“가… 가주님, 또 다시 심마가…!”

“닥쳐!!”

수하에게 일갈하며 당정이 자신의 얼굴을 손톱으로 벅벅 긁어댔다.

“또… 또 광마구나… 크큭… 또 광마야…!!”

“…”

자신의 얼굴을 피가 흐르도록 긁어대는 가주를 바라보며 수하는 조심히 몸을 내뺐다.

홀로 남은 당정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광마가… 광마가 문제야. 그래, 처음부터 광마 그 개새끼가 문제였군. 광마가 문제였어. 광마가 딸아이를 죽였어, 광마가 마교를 불렀어, 광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광마가… 광마가…!!”

그 때 몸을 내뺐던 수하가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 당정에게 드밀었다.

“…가주님. 소문주를 데리고 왔습니다.”

“세린아!”

“…”

당정의 붉게 변한 눈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보고 수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세린아…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

딸 아이의 시체를 기워 강시로 만든 아비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수하는 알 수 없었다.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파랗게 질린 피부의 딸 아이를 껴안자, 겨우 마음이 안정된 당정이 수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독고령. 그러니깐… 광마의 여식이 혈교주를 죽였다고?”

“… 예.”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알려진 바도 없고 저잣거리에 이야기만 나돕니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삼촌은?”

“… 당가위 장로께서는 모든 것을 껴안고 살해당하신 듯 합니다.”

“무림맹을 장악하긴 글렀군. 쯧… 거기에 쌓아둔 강시들도다 버렸고… 조련사는?”

“… 그도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죽었군.”

방금까지 자신이 긁어생긴 얼굴의 핏자국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당가위가 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지금일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할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혈라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계약이 의미가 없구나.”

당정이 혈교주와 손을 잡은 이유는 처음부터 하나 뿐이었다.

뜻이 맞았기에.

당정은 사천을 외면한 백도무림이 원망스러웠고, 그 사단을 벌인 마교를 증오했다.

혈라는 다시 자신의 세를 불리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백도무림과 마교가 눈에 거슬렸다.

서로 뜻이 맞은 둘은 우연히 만나 한 배를 탔다.

혈라가 강시를 만들어 군대를 만들면, 당정이 백도무림을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가게 만들어 더 많은 시체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마침내 발호할 그 날, 그동안 만들어두었던 강시 군대와 당가위가 장악한 맹의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백도 무림을 최대한 빠르게 장악한 뒤, 마교와 싸우는 계획.

마교와의 전면전을 위한 병력수급과 동시에 백도무림에 대한 복수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혈라가 죽은 이상, 혈교도들은 더 이상 당문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시를 수리하거나 다루는 방법은 알고 있으나 강시를 만드는 방법은 끝까지 혈라가 가르쳐 준 적이 없기에 당정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시가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혈라와 당가위가 같이 죽었으니 지금쯤 맹에서도 여기까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당정에게 남은 길은 하나 뿐이었다.

“사천을 떠야겠다.”

“!!”

당정의 말이 뜻하는 바가 명확했기에 수하가 환희로 몸을 떨었다.

“그럼 드디어…!”

“요녕으로 향한다.”

“모용세가는 아직까지 답신이 없습니다. 놈들이 저희의 속내를 알아차렸을까요?”

“알아차렸다고 한들 검신에게 발이 묶여있으니 상관없어. 게다가…”

당정이 소매에서 서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다른 서신도 받았지.”

“… 하오문주를 믿으십니까?”

“믿지 않는다. 그 년이 광마와 붙어먹은 것을 잊었을 리가. 하지만 고약한 년이더군.”

당정이 서책을 툭 던져주자, 첫 장에 적힌 글을 보고 수하의 눈이 커졌다.

“… 이게 정말입니까?”

“그 뒷장에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도 가득 쓰여있더구나. 믿건 안 믿건 무조건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

“무서운 여자군요.”

“하지만 이 정도면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볼만하지.”

“…”

“준비는?”

당정이 묻자, 수하는 받아든 서책을 내동댕이치고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항상 되어있었습니다.”

수하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맴돌자, 그 모습을 보며 당정 또한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쉬지않고 요녕으로 향한다. 휴식은 죽음 뒤에 챙겨도 상관없어.”

“예…!”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이가 있으면 모조리 베고, 또 벤다. 뒤쳐지는 자가 있으면 미련없이 버려라.”

“예!”

“가라!”

“존명!!”

수하가 밖으로 나가자, 당정이 내공을 가득 끌어올려 외쳤다.

“일어나라, 강시들아!!!”

“끄르륵…”

“크륵…!!”

그의 말에 답하듯 파도처럼 밀려드는 엄청난 수의 강시들이 당문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가라!”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그어어어어억!!”

“으뤄어어어억!!!”

그 날.

엄청난 무리의 강시들이 사천 일대를 빠져나갔다.

*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노부가 잘못 들었나 보군.”

다시 고개를 돌린 남궁원청이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이보게, 백련휘.”

“예, 어르신.”

“모용벽 이 놈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게야?”

“저도 잘…”

“허어… 참…”

남궁원청이 한숨을 내쉬는 순간, 누군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아, 이 곳이구려.”

“아니?! 이게 누군가?”

수풀을 헤치고 나온 이는 호탕하게 웃으며 남궁원청에게 두 팔을 벌렸다.

“크하핫,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잘 지내셨지요?”

“오랜만이구나, 유덕아! 아니… 팽 가주라고 해야지.”

“그냥 편하게 불러주십쇼, 어르신. 으하핫!”

“그럼 옆에 있는 자는…”

“황 모가 인사 올립니다, 어르신.”

수풀을 헤치고 나온 것은 무애도선 팽유덕과 뇌력권존 황보기였다.

“만나서 반갑네. 선대보다 더 강한 뇌명을 일으킨다 내 무성한 소문만 듣다 오늘에서야 만나는구만.”

“허허… 과찬이십니다.”

황보기가 웃으며 칭찬을 받아들이자, 남궁원청이 물었다.

“헌데 두 사람이 이 곳은 어찌 온 겐가?”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어르신이 보낸 게 아니셨습니까?”

“으음?”

연락이라니?

남궁원청이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순간, 그의 기감에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늘에서 조용히 나풀나풀 떨어지는 모습은 가히 선녀라고 불릴만한 자태였다.

“연락은 제가 보냈어요, 검신 어르신.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 하오문주 아닌가?”

갑자기 은약벽이 튀어나오자, 검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오문주가 팽유덕에게 왜 연락했단 말인가?

그런 검신의 속내를 알 지도 못 하고 옆에 있던 도선이 호탕하게 웃으며 은약벽에게 인사를 건넸다.

“크하핫, 오랜만이오!”

“비켜요. 다른 분이랑 같이 왔으니깐.”

“여전히 쌀쌀맞으시구려.”

“모일 이가 많으니깐요. 일단…”

하오문주가 남궁원청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제 독단적으로 다른 이들을 불러모은 점은 죄송합니다, 검신 어르신.”

“무슨 이유가 있던가?”

“한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일에 참관자가 없으면 안 되겠지요.”

“허허…”

“그리고 소개시켜주고 싶은 이도 있어서요.”

은약벽이 손짓하자, 그녀의 등 뒤로 두 명의 젊은 청년이 걸어나왔다.

한 명은 두 눈을 더벅머리로 가린 숫기가 없어 보이는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거지들이나 입을 법한 누추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한 이였다.

“오, 후개와 파수꾼이군.”

팽유덕이 슬쩍 아는 체를 하자, 그제서야 검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강호에 자자한 그 둘이구만.”

“검신께서 알아주시니 부끄럽습니다.”

“… 부끄러운 허명입니다.”

검신이 은약벽을 쳐다보았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저 둘은 너무 어렸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싸움을 보여주는 것 또한 나쁘진 않았지만, 배분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자신의 허락도 없이 다른 이들을 참관시킨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남궁원청은 솔직하게 그 속내를 드러냈다.

“그래서 이 젊은 두 아이를 보여주기 위해 무례를 범한 것이더냐?”

“그리 멍청한 계집은 아니랍니다. 저 두 아이는 눈과 귀가 될 아이들이라서요.”

“승부의 결과를 무림에 퍼뜨릴 셈이더냐?”

“네. 검신께서 허락하신다면요.”

“허허… 이상하구나. 총명한 네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은약벽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조용히 웃자, 남궁원청은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

“소개시켜줄 분은 저 분이랍니다.”

“음?”

은약벽이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그 곳엔 젊은 여인이 긴 삿갓을 푹 눌러쓰고 있었다.

“누구기에 얼굴까지 가린게야? 하오문주가 오늘 평소답지 않게 노부를 불편하게 하는구나.”

“어머, 정체를 알고나면 놀라실텐데요?”

은약벽이 소개한 여인이 삿갓을 들어올리는 순간, 남궁원청의 가슴에 남은 흉터가 욱씬거렸다.

“강호의 대선배를 만나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삿갓 너머로 드러난 여인은 젊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남궁원청은 그런 것보다 그녀의 생김새에 놀랐다.

눈매가 자신이 알고 있던, 자신과 일생을 다툰 이와 소름돋게 닮았으니깐.

“천마신교의 교주, 천유하라고 합니다”

“허어…”

남궁원청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은약벽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약벽아.”

“예, 어르신.”

“… 무슨 짓을 저지른게야?”

“제가 매번 말씀 드렸잖아요, 어르신.”

은약벽이 부채를 접고, 싱긋 웃어보였다.

“전 무림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죠.”

당문의 모든 이가 떠난 사천 당문의 비어있는 본가에는 한 서책이 나돌아다니며 바람에 부대끼고 있었다.

바람이 멈춤과 동시에 책장이 멈추며 제일 앞 장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독선. 저는 하오문주, 은약벽이랍니다.

그대가 아주 오랫동안 마교를 증오했음을 알고 있어요.

모용세가와 손을 잡은 것 또한 마교를 중원으로 끌고 나올 이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굳이 모용세가와 지지부진한 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마교와 손을 잡았답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제가 당대 천마를 죽일 자리를 마련해 드릴게요.

요녕으로 오세요.

복수의 장을 준비해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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