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7 18장. 무림맹 - (15)
“으히힛…”
남궁진, 묵세휘와 함께 마신 술은 생각보다 유쾌했다.
딱딱하기 그지 없을 줄 알았던 남궁진이었으나 술이 들어가고 나서는 온갖 고충을 토로하며 징징거리는 모습이 여전히 그가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 장로 새끼들을 내가 다 조졌어야 했는데…!”
“아직 늦지 않았어,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하나씩 목 따러 갈까?”
“그래주시겠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거 두 분 너무 드셨습니다. 적당히 하시죠.”
“뭐, 새끼야! 너도 목 따고 싶잖아! 이 참에 새로 받은 무기나 시험해볼겸…”
“그럽시다! 갑시다! 오늘 창천의 검이 드높음을 장로들에게 보여줘야겠소!!”
적의 적은 아군이랬던가?
남궁진과 척을 진 적은 없었으나 똑같이 무림맹의 장로들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독고령과 남궁진은 서로 잘 맞았다.
“헌데 독고 소저.”
“왜?”
“… 내가 광마 어르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째 춘부장과 많이 닮으셨소?”
“…”
다만 가끔씩 날카로운 말을 툭툭 내뱉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새꺄, 내가 딸인데 당연히 비슷하지.”
“크하핫! 당연한 말이구려.”
“나중에 소소가 너 닮을까봐 두렵다, 야.”
“소소는 나를 닮으면 안 되지. 오히려 독고 소저를…”
“… 뭐야, 왜 말을 하다 멈춰?”
“외관이나 무력만 닮고 행실은 안 닮았으면 좋겠구려.”
“닮으면 내가 검신 영감님한테 맞아죽어.”
“으하핫!”
그렇게 한참을 술을 먹고난 뒤, 독고령은 깨달았다.
“우웁…”
“… 거 적당히 좀 드시지 그랬습니까?”
“오랜만이지 않소…”
“하아…”
남궁진은 술을 더럽게 못 했다.
독고령은 이제 막 기분이 좋아지려 할 즈음부터 남궁진이 연신 구역질을 해대며 술을 게워내고 있자 조금씩 파장이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결국 묵세휘가 일어나 그를 부축하며 술자리가 끝났다.
“… 못난 꼴을 보였네. 저 친구가 원래 술을 잘 못 하는데 오랜만에 좀 풀어졌구려.”
“아냐, 됐어. 나도 잘 마셨으니 뭐…”
독고령이 남은 술을 하나 집어들어 슬쩍 묵세휘에게 보였다.
“이거 가지고 간다?”
“들고 가시게. 그보다 선물은 마음에 드는가?”
“보면 모르냐?”
독고령은 품에 꼭 껴안고 있는 비익연리를 슬쩍 들어보였다.
“존나 마음에 들어.”
“다행이군. 장원을 치울 이도 조만간 보내둘 터이니 그 쪽도 둘러보시게나. 생각보다 좋은 장원이외다.”
“… 근데 저렇게 커봤자 쓸 일도 없는데…”
“나중에 문파라도 하나 차리지 그런가?”
“문파?”
“그대와 위 공자가 함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강호의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지 않겠나?”
“으음…”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은 문득 묵세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다 내가 사파가 되고, 마교가 되면?”
“크크큭… 첫 만남이 어지간히 마음 상했나 보군.”
“대답해 봐, 새끼야.”
독고령은 어디까지나 묵세휘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다.
항상 의기양양한 저 묵세휘를 한 번 말로 꺾어서 곤란한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위인이 못 되지. 위 공자 또한 마찬가지고.”
“… 뭐?”
“그대는 좋은 사람이네.”
“뭘 믿고?”
“맹주와 마음이 잘 맞지 않나?”
묵세휘가 반쯤 시체가 된 남궁진을 가르키며 말했다.
“속에 꿍꿍이가 있는 자들은 이 친구와 잘 지내지 못 하지. 팽유덕도 그랬고, 당가위도 그랬고, 다들 그랬어. 하지만 자네는 남궁진과 잘 지내더군? 그걸로 충분하네.”
“…”
“자네는 썩 괜찮은 사람이야. 행실이 거칠지만, 착한 이일세.”
“… 지랄.”
“아무튼 선물을 들고 어서 낭군님께 가보게. 오히려 본인과 맹주가 새색시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뺐은게 아닌가 위공자에게 미안하구만.”
“아… 알아서 하거든!”
“크큭,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즐거웠네.”
“… 오냐.”
그렇게 묵세휘는 남궁진을 부축하며 술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독고령은 잠시 남은 술병을 바라보다가…
‘… 맛있네. 일청한테도 하나 줘야지.’
손에 든 병 외에 또 한 병을 챙겨들고는 방으로 향했다.
“으히힛…”
독고령은 괜히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품에 들린 ‘연리’를 받아들고 위일청이 얼마나 기뻐할까 상상만으로 기뻤다.
게다가…
“… 가가.”
괜히 제자리에 멈춰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소리내어 되뇌이자,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했다.
“히힛…”
그렇게 씰룩거리는 입꼬리와 함께 독고령이 일행이 머물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 아직도 하고 있진 않겠지?’
방을 나온 지도 오래 됐으니 아무리 위일청이 대단해도 아직까지 하고 있진 않으리라 생각하며 독고령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나 왔어… 읏…”
“아, 령. 조금 늦었네요?”
“… 네.”
문을 여는 순간 풍기는 정사의 냄새와 함께 나신의 상태로 윗옷만 걸친 위일청이 독고령을 반겨주었다.
그리고…
“흐읏…!”
“하아… 하아… 흑…!”
나체로 바닥에 널부러져 아직까지 쾌락의 여운을 즐기는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는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눈에 들어왔다.
“… 방금까지 하고 있었어요?”
“도중에 쉬엄쉬엄하다가… 령이 조금 늦어서…”
“… 색마.”
“이제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령도 같이 갈래요?”
“읏… 하지만 그… 남녀의 욕실이 구분되어 있다고…”
“밤이 깊었으니 몰래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은 아주 잠깐 고민하곤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뭐… 나도 땀 많이 흘렸거든요…”
“크큭, 그래요. 그보다 손에 든 건 뭔가요, 령?”
“아… 이건 소흥주라고 맛있는 술이길래 가가한테 주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 고마워요, 령. 그보다 음…”
위일청이 난처한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가라…”
“… 왜요? 그렇게 부르는 거 별로예요?”
“들으면 들을수록 좋네요, 령.”
“히힛…”
위일청이 다가와 독고령에게 술병을 건네받고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령.”
“녜헷…”
위일청의 입술이 닿은 이마가 타는 듯 뜨겁게 느껴지자, 독고령이 손을 올려 괜히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녀가 들고있던 비익연리가 위일청의 눈에 띄었다.
“그건 또 뭔가요, 령?”
“아… 이거 내가 받아왔어요! 가가 주려고요!”
“… 네? 확인해봐도…”
“그… 음… 잠깐만요.”
독고령이 비익연리를 자신의 품 안에 꼭 끌어안며 새초롬하게 위일청을 노려보았다.
“가가.”
“… 네, 령.”
“나한테 준 연검, 누구한테 받아온 거예요?”
“가문의 창고에서 제가 가지고 나온 겁니다.”
예상과 다른 답변이 돌아오자, 독고령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 그럼 침어한테 받은건요?”
“… 령. 아무리 그래도 제가 다른 여인에게 받은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건네주진 않습니다.”
“내가 남이에욧?!”
“… 그 뜻은 아니고요. 미안해요, 령.”
“미안하면 여기.”
독고령이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내밀자, 위일청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히힛… 용서해줄게요.”
“술 마셨어요, 령?”
“조금요. 전에 술 마신 나도 좋다면서요?”
“평소의 령도 좋아하고요.”
“흐읏…”
위일청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독고령은 괜히 하단전이 욱씬거려 다리를 오므렸다.
“이젠 뭔지 가르쳐줄 건가요?”
“… 가가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그러니깐 이거 받으면 침어한테 받은 연검은… 음… 버리긴 아까우니깐 적당히 무림맹에 던져줘요.”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 궁금해지네요.”
“직접 봐요.”
독고령이 헝겊을 풀고 ‘연리’를 건네는 순간…
“… 맙소사.”
위일청의 눈이 커졌다.
‘연리’를 손에 쥔 위일청은 몇 번이고 검을 고쳐잡고 날을 확인하기도 하며 연신 감탄만 내뱉었다.
“아니… 이… 이걸 어디서 받아왔습니까?”
“묵세휘한테요?”
“협박했나요, 령?”
“… 가가.”
“실언했군요, 미안합니다. 아니… 이거 그냥 손에 잡는 순간 바로 알겠네요. 명검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군요. 뭡니까, 이거…?”
“천하제일인이자 천하제일 야금장이 만들어낸 신병이기요?”
“… 엄청난 내력이 담긴 물건이네요. 이걸 정말 준다고요?”
“당연하죠. 가가 아니면 누구한테 줘요? 게다가…”
독고령이 유성도와 함께 허리춤에 걸어둔 ‘비익’을 가르키며 말했다.
“… 이거랑 한 쌍이에요.”
“한 쌍이라고요?”
“네. 내가 가진 게 ‘비익’이고, 가가가 가진 게 ‘연리’예요.”
“아하… 둘이 합쳐서 ‘비익연리’군요.”
“…네.”
독고령이 괜히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 이 정도면 가가한테 줄 선물로 최고죠?”
“정말로요. 허어… 이걸 어떻게 해야할 지… 너무 큰 선물을 받았네요, 령.”
“… 그러니깐 침어한테 받은 건 내일 아침 다 버려요.”
“안 그래도 원래 제가 쓰던 물건들을 제외하곤 다 정리하던 차였습니다.”
“… 네?”
위일청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르키자, 그 곳을 본 독고령은 바닥에 가지런히 정리된 물건들 사이로 여러 연검을 보았다.
“… 그래도 이제 령과 혼약을 맺었는데 다른 여인이 준 물건을 몸에 두르고 있긴 그래서요. 정리를 좀 해두었습니다.”
“가가…”
독고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위일청은 그녀가 조금 감동이라도 받았으리라 생각했다.
“… 저렇게 많이 받았어요?”
“… 령.”
하지만 돌아온 독고령의 대답은 달랐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많이 받은 거예요? 게다가 저 비도, 전에 야행할 때 쓰던 그거 맞죠?”
“그… 령, 제가 또 남의 호의를 함부로 거절하지 못 해서…”
“이젠 거절해야죳!!”
“…”
“아잇… 아니, 얼마나 여자를 많이… 으…”
방의 한 구석에 위일청이 정리해둔 무기는 각양각생이었다.
그 곳엔 옷도 있었고, 영웅건도 있었고, 연검도 있었고, 심지어…
“속곳은 어떤 년이 준 거예요?”
“그게…”
“빨리욧!”
“… 적막이 줬습니다.”
“걔도 강호사절화죠?”
“그으… 뭐어… 령이 더 예쁩니다.”
“아니… 속곳을… 으아아… 캬아아악!!!!”
결국 독고령이 못 참고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거 꼭 불태워요! 내일 바로, 아니 지금 당장!!”
“… 네, 령.”
“빨리욧!”
“…”
위일청은 적막이 선물해 준 속곳을 손에 들고는 창문 밖으로 뻗어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한 순간에 재가 된 속곳을 확인한 뒤, 그제서야 조금은 마음이 안정된 독고령이 도끼 눈을 뜨고 위일청을 노려보았다.
“… 가가.”
“… 네, 령.”
“화 안 낼테니깐 말해봐요. 받은 물건이 저게 전부는 아니죠?”
“… 돈도 좀 있긴 합니다. 들고 다니기 곤란한 물건은 그냥 본가로 보내기도 했고…”
“하아…”
독고령은 위일청의 대답을 듣고 머리가 아파왔다.
왜 하필 이런 남자에게 빠져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그를 사모한 것인지 짐작도 안 갔다.
물론 독고령 또한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위일청은 그만큼 멋지고, 자상하고, 좋은 남자였으니깐.
하지만…
“… 그래도 내가 준 게 최고죠?”
“무… 물론이죠, 령. 이 연검이 살면서 받은 것 중 가장 기뻤습니다.”
“… 그럼 됐어요. 그리고…”
독고령이 위일청의 옷깃을 꽉 붙잡고는 그의 고개를 잡아내려 입을 맞추며 선언했다.
“… 이젠 내 남자니깐.”
“…”
“그렇죠, 가가?”
방금까지 화를 내다가 지금은 다시 금세 웃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 또한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부인.”
“흐엑?!”
“령이 저를 가가라고 부르니깐, 저도 령을 부인이라고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좋긴 한데 싫어요.”
“네?”
“이름을 불러주는 게 더 좋아요, 가가.”
독고령이 위일청의 목에 팔을 걸며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령’이라고 불러줘요.”
“그게 더 좋다면… 네, 령. 앞으로도 이름으로 부를게요.”
“… 네, 가가.”
쪽.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는 위일청이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럼 이제 씻으러 가볼까요?”
“… 이렇게 가려구요?”
“안아주는 거 좋아하지 않았나요, 령?”
“… 맹원이 보면 어떻게 하려구요, 가가…”
“금슬이 좋다고 부러워하겠죠.”
“그럼… 뭐…”
“싫으면 내려줄까요?”
“… 아니요. 대신…”
독고령이 위일청의 귓가에 속삭였다.
“… 나도 자기 전에 가가랑 야한 일 하고 싶어요…”
“…”
“안… 돼요…?”
발그레 뺨을 붉히고 묻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은 또 다시 하초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안 될 리가요, 령.”
“녜… 녜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