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5 18장. 무림맹 - (13)
“네 모가지. 달라고 하면 주냐?”
“…”
독고령이 씨익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자, 묵세휘 또한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하면 드리리다, 크큭.”
“재미없는 새끼.”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독고령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묵세휘가 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군. 위 공자와는 얘기 잘 나누었나?”
“적당히.”
“결론은?”
“네 얘기 들어보고 결정하려고.”
“흐음…”
묵세휘가 전처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시발, 너 그 지랄은 왜 하는거냐?”
“아, 이거 말인가? 습관일세.”
“병신같은 습관이네.”
“원래 삐뚤게 보아야 바로 보이는 것도 있고, 다르게 보아야 보이는 것도 있다네.”
“기분 나쁜 새끼.”
“무엇이 궁금한가, 얘기해보게.”
묵세휘가 독고령이 툴툴대는 것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려들자, 독고령이 입을 꾹 닫았다.
“막상 이야기하라고 말하면 안 하는군.”
“… 고민 좀 해보고.”
“무엇을 말할지 생각은 안 하고 왔는가?”
“어.”
“…”
“뭐, 새끼야.”
“묻고 싶은 게 있었던 거 아니였나?”
“막상 얼굴보니 짜증나서 말이 안 나오네.”
“그럼 한 대 치게.”
뚜둑 소리와 함께 고개를 바로 하고 묵세휘가 독고령에게 툭 말을 던졌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케묵은 원한이 있다면 털고 가지. 한 대 치게.”
“존나 아플걸?”
“기절할 정도만 아닌 세기로 때려주게. 한 방에 기절할 거 같으면 두, 세 대로 나눠서 때리게. 정신을 잃으면 이야기를 못 나누지 않나?”
“… 미친 새끼네, 이거.”
“가능한 빨리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거든. 어서 치게, 어디를 때리고 싶나?”
묵세휘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독고령을 보며 마주 섰다.
“뼈를 부러뜨리고 싶다면 오른손은 남겨주게. 다리가 부러지는 건 괜찮다만, 손이 부러지면 일을 보는데 지장이 생기거든.”
“…”
“안 때릴 생각인가?”
정말 맞을 각오를 한 모양인지 되묻는 묵세휘를 보며 독고령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보다 약한 새끼를, 그것도 저항도 안 하는 새끼를 패는 취미는 없어. 시발…”
“그럼 다시 앉아도 되겠나?”
“하, 시발. 별 미친 새끼가 다 있네 진짜…”
“몇 번 들어도 영광이군.”
“시건방은 적당히 떨어. 한 번만 더 혀를 놀리면 못 걷는 신세로 만들테니깐.”
“그런 협박이 내게 안 통한다는 것은 알지 않는가? 고통은 내게 큰 두려움은 아니라네.”
“…”
그의 말대로였다.
묵세휘는 적어도 폭력에 쉬이 무릎 꿇을법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독고령은 묵세휘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무공을 제대로 익힌 이도 아니었고, 강자도 아니었다.
은관영은 커녕, 백리소현과 싸워도 압도적으로 패배할 정도로 약한 이처럼 보였다.
근데 그렇게 약한 이가, 자신을 앞에 두고 저리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독고령은 뭔가 답답함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신념이었기에 더더욱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고민되었다.
“… 너 진짜 좆같이 마음에 안 드네.”
“솔직한 게 싫은건가, 바른 말을 하는 게 싫은건가? 간언이 달갑지 않은 건 역사가 증명하긴 하네.”
“간언은 시발. 그래서 위일청을 들먹였나?”
“사람을 알아보려면 주변 인물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봐야지. 장로들도 내가 맹주를 통해서 구슬렸다네. 선물은 마음에 들던가? 일행들은 좋아했을 듯 한데?”
“하…”
“말했잖나.”
묵세휘가 씨익 웃었다.
“이게 집단의 힘일세. 아직도 내가 자네보다 약자처럼 보이나?”
“존나 약하지.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 쯤은 언제든지 족칠 수 있지.”
“하지만 자네는 그러지 않는군. 맹주가 두려운가? 아니면 맹이 두려운가?”
“난 두려운 게 없어, 개새끼야.”
“그렇다면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나보군. 역시 자네는 외강내유형 인간일세. 겉으로는 강한 척 거친 말과 무력을 뽐내지만, 속으로는 다른 이를 감싸는군. 협객의 상이야.”
“아, 지랄 좀…!”
독고령이 역시 어디 한 곳 부러뜨러놔야겠다 마음 먹는 순간, 누군가 방문을 열었다.
“술을 가져왔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왔군. 한 잔 마시고 이야기하지.”
“하…”
혼자 오지 말 걸 그랬다 후회하며 독고령은 맹원이 가져온 소홍주를 집어들었다.
“좀 마시고 다시 이야기 나누지. 흥이 오르는군.”
“술병으로 맞을래?”
“비싼 술이니 다 마시고 때리게. 내용물이 아까우니깐.”
“…”
덤덤하게 말하는 묵세휘를 보고 독고령은 잠시 손에 들린 소홍주와 그의 머리를 번갈아보다가… 그냥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대작은 안 해주나?”
“대작하면 니 대가리 깨진다.”
“아쉽군.”
그렇게 둘은 묵묵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비우는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독고령이었다.
“… 맛있네.”
“그렇지? 소흥주는 주향이 참 좋다네. 가는 길에 몇 병 더 줄 테니 위 공자에게도 전해주게.”
“…”
“왜? 싫은가?”
“하…”
독고령은 문득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여전히 꼴보기 싫은 묵세휘였으나 그가 괜히 위일청을 알아서 챙겨주니 또 ‘제법 괜찮은 새끼인가?’ 라는 생각이 물씬 머릿속에 떠올라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발견한 독고령은 괜히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위일청이 아까 자신에게 했던 얘기 때문인지.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주면 받으마.”
“크큭, 그러게. 얘기해두겠네.”
“기왕 주는 거 좀 이것저것 줘.”
“뭘 좋아하는가?”
“나 말고, 위일청이 좋아하는 걸로.”
“나는 위 공자가 좋아하는 걸 잘 모르네. 자네가 얘기해주게.”
“일청은… 음…”
문득 독고령은 위일청이 무얼 좋아할까 고민했는데… 떠오르는 게 몇 없었다.
“… 여자를 좋아하지. 아잇…!”
“정인 아니었나?”
“이제 곧 부인.”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군.”
“아까 방금 약속했지.”
“청혼을 받았나? 축하하네.”
“오냐, 고맙다.”
“별 말을. 언제쯤 식을 올릴 셈인가?”
“… 아직 안 정했는데…”
“혼수는?”
“… 이제 곧…”
“허어…! 이거 원…”
묵세휘가 탄식만 내뱉자, 독고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새끼야?”
“자네는? 위 공자에게 아무것도 안 주었나?”
“… 안 줬는데?”
“허허… 이거 참. 이보게, 음란검.”
“아잇, 뒤진다 진짜?”
“그럼 뭐라고 부르는가?”
“아, 시발 그냥 대충 독고 소저라고 하던가.”
“소저라고 부를 순 없지. 이제 곧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소저가 아니지.”
“그럼?”
“부인이라 부르는 게 가장 맞지 않겠나?”
“흐엑?! 부... 부인?”
“위 공자의 아내니 부인이지. 아닌가?”
“아니… 마… 맞긴 한데…”
새삼스레 남에게 부인이란 말을 듣자, 독고령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정말 자신이 위일청과 남은 여생을 함께 하겠노라 얘기한 것이 실감났다.
“이보게, 부인. 혼례는 일생의 한 번 뿐인 기회일세, 근데 아무것도 안 받는다니?”
“… 일청이 나중에 준다고 했거든.”
“그렇게 말해놓고 평생 안 주는 파락호 놈들도 많다네.”
“이… 일청은 아니야!”
“물론 위 공자는 안 그렇겠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내로 이름이 자자하지 않나?”
“그… 그렇지. 새끼,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하면 나중에 후회가 안 남겠나?”
“… 후회?”
“새삼스럽지만 본인도 이미 혼례를 했다네. 집에 애가 둘이나 있지.”
그 말을 듣고 이 때다 싶어 독고령이 비아냥거렸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용케도 너랑 결혼했네.”
“크큭,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아내가 맘고생이 심했지. 매번 밖에 나가 내기바둑이나 조금 두다 돌아오는 게 전부였던 나를 보고 무얼 믿었는지, 참…”
“…”
“뭐 여튼, 본인은 당시에 아내에게 청혼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 주었던 것이 못내 가슴에 회한으로 남더군. 지금이야 뭐 제갈세가의 가주께서 이리저리 편의를 봐주고 있어서 형편이 나아졌네만, 아내도 같은 생각이더군.”
“같은 생각?”
“아내도 사랑만으로 다 되리라 생각했었지. 근데 그래도 징표 하나 쯤은 있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하며 후회하더군.”
“…”
“자네는 후회하지 말게. 직접적으로 물어도 좋고, 몰래 물어봐도 좋으니 위 공자에게 물어보게. 무얼 좋아하냐고. 가능한 오래 남을 물건으로 서로 선물하게.”
“… 그래.”
독고령이 손에 들고 있던 소흥주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한 모금 들이키고는 그에게 물었다.
“시발, 근데 내가 이 얘기를 왜 너랑 하고 있냐?”
“자네가 먼저 꺼낸 얘길세. 거기에 내 오지랖이 들어간거고.”
“… 하긴.”
“어디서 살 지는 정했나?”
“몰라. 그냥 정말 약속만 딱 했어.”
“합비는 어떤가?”
“… 여기?”
“그래, 이 곳. 합비.”
묵세휘의 머리가 조금씩 기울었다.
“지리로 따지면 이 곳보다 좋은 곳이 없지. 중원과 강남을 잇고, 장강과 이어져있으며 성도와도 가깝지. 게다가 자네는 검신 어르신의 제자이지 않은가?”
“… 안휘랑도 가깝고?”
“안휘랑도 가깝지.”
“… 꽤 괜찮네.”
“흐음…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군. 같이 나갈텐가?”
“어딜?”
“제법 괜찮은 장원이 있다네. 맹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 중 하나인데 쓸모가 마땅치 않아서 비워둔 곳이지. 구경하러 가지 않겠나?”
“지금?”
“이보게, 부인.”
“윽… 왜?”
“이제 곧 위 공자와 혼례를 치를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리 안주인이 될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나?”
“아… 안주인?”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묵세휘가 그에 맞춰 고개를 삐뚤게 기울였다.
“그래. 집안의 기둥이 위 공자라면 부인이 이제 내조를 담당해야 할테지. 그렇다면 뭐가 중요한가? 집일세. 좋은 터에 자리잡은 집이 곧 가정의 화목으로 이어지는 게지.”
“그… 런가?”
“그렇고말고! 자식은 안 낳을겐가?”
“… 낳을건데.”
“내가 전에도 말한 게 그런 거 아니겠나? 치안이 좋은 곳이여야 자네도 안심하고 자식을 키울테지. 저 사파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자식을 키울셈인가?”
“그 새끼들 어차피 별 것도 아닌…”
“어허! 자식들이 다 사파 놈들을 보고 이상한 것을 배울 것 아닌가! 아이들은 한없이 순수하여 또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행하곤 한다네. 이제 막 네 살 먹은 아이가 시발시발 거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나?”
“그게?? 무슨 문... 제지?”
독고령이 정말 뭐가 문제인지 이해를 못 하는 듯 보이자, 묵세휘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위 공자가 가만 있겠나?”
“… 좀 싫어하겠네.”
“그렇다니깐! 허어… 이보게, 거 밖에 있느냐!”
“예, 군사님.”
“독고 부인과 잠시 장원에 다녀오려고 한다. 혹여 맹주님이나 위 공자께서 독고 부인을 찾으시거든 그렇게 이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아… 아니, 잠깐만 새끼야!”
묵세휘가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자, 당황한 독고령이 그를 막아세웠다.
“아니, 시발. 내가 거길 왜 보러 가?”
“위 공자가 좋아할걸세.”
“… 정말?”
“그렇대도. 아… 그러고보니 장원에 그것도 있구만.”
“그것…?”
묵세휘가 슬며시 맹원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주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뭔데?”
“자네 혹시 비익연리(比翼連理)라고 알고 있나?”
“… 뭔데, 그게?”
“비익조라는 새가 있는데 암, 수가 각각 한 쪽 눈과 한 쪽 날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함께 있어야만 날 수 있다는 새가 있다네.”
“… 병신 새네?”
“… 그리고 연리지는 뿌리가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자란 것을 뜻하지.”
“그게 왜?”
“둘 다 금슬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말일세.”
“…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만든 명검이 장원에 있다네.”
“… 명검? 신병이기야?”
“신병이기 급이랴.”
묵세휘가 씨익 웃었다.
“그 유명한 염라도객 주장이 말년에 자신의 딸에게 물려준 물건이거늘.”
“… 어?”
갑자기 염라도객 주장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독고령이 흠칫했다.
“… 수라나찰도법 만든 그…”
“맞네, 그 주장일세.”
당황한 독고령은 저절로 의문이 튀어나왔다.
“그 인간이 여기서 왜 튀어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