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 18장. 무림맹 - (12)
그렇게 한동안 떠들썩하게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독고령은 자신이 묵세휘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백리소현과 은관영에게 얘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니깐 내 아들이 위협받았단 얘기네, 령 매?”
“… 네가 아들이 어딨어?”
“령 매가 위 오빠랑 같이 애 낳으면 그게 내 아들이지.”
“… 아니, 그… 그렇긴 한데…”
이게?? 맞나???
독고령이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던 와중, 백리소현이 바닥을 탁 내리쳤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어? 령 매 성격에?”
“… 가가가 참으래서…”
“령, 령. 잠시만요, 령.”
“… 네?”
“그… 가가라는 표현 너무 자주 말하지 마세요. 이야기에 집중하기 힘드네요, 그냥 평소처럼 일청이라고 불러주세요.”
“왜…요?”
“…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힘겹게 내뱉는 위일청을 보며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히죽거렸다.
“령 매가 너~무 좋아서 못 참겠다네.”
“흐엑?!”
“부러워라아~ 나도 위 오빠 좋아하는데~”
“그… 그만 좀 해!”
“이히힛.”
“으히힛.”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바보처럼 웃는 걸 보고 독고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들이… 이상해졌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멍청해진 둔치랑 더 멍청해진 하오문만 남았어…’
독고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 그래서. 그 새끼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얘기가 흘러서 뭐… 이렇게 됐어.”
“묵 군사를요?”
“어.”
“… 척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요오. 개인적으로는 저도 독고 소저 이야기 듣고 화나긴하는데… 하오문의 소문주 후보로서는 좀… 무섭네요오.”
“무섭다고? 걔가?”
“독고 소저, 우리 문주님이 말하시기를 강호에서 딱 한 명만 하오문의 부흥을 위해 데려올 수 있다면 묵 군사를 데려오겠다고 말하셨어요오.”
“… 그 정도야? 걔가?”
“걔, 걔 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그… 해꼬지를 하실 성격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원한 관계는 안 됐으면 좋겠어요오…”
은관영이 굳이 저렇게까지 말하자, 독고령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 그냥 넘어가자니 영… 그런데.”
“어차피 맹에 들어오란 얘기 아니였어요오?”
“그렇긴 한데 쓰읍… 굳이 내가 그 새끼 밑으로 들어가는 거잖아. 별론데.”
“령 매, 령 매.”
“응?”
“나는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 어?”
백리소현이 갑자기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 그러니깐 군사님은 령 매가 이대로 당문에 대한 복수를 할 경우 또 다른 은원이 생긴다는 걸 얘기해준 거잖아?”
“그렇…긴 한데…”
“령 매를 믿고 있지만, 솔직히 나는 이번 일이 끝나고 좀 무서웠어.”
“…”
“그거 알아, 령 매? 나는 이번에 독에 중독됐었어.”
“독?!”
“응… 령 매가 많이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는데… 그… 조금 무섭더라. 갑자기 손발이 안 움직이니깐 무서웠어. 그리고…”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 령 매도 걱정됐어.”
“나는 괜찮아. 그런 새끼들은 나한테 전혀…”
“알아, 령 매 강하지. 근데… 그래도 걱정됐어.”
“…”
“한 편으로는 있지, 그냥 령 매가 편히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물론 령 매는 그렇게 살지 못 할 줄 알면서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백리소현이 자신을 걱정하자, 독고령은 마음이 복잡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감각은 참으로 낯설어서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론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독고령은 마음이 복잡했다.
화를 내야할지, 아니면 웃어야할지.
그런 그녀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났는지 독고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하자 그 모습을 보고 백리소현이 웃었다.
“령 매, 결국 선택은 령 매가 하는 거잖아?”
“그치.”
“나는 그냥… 령 매한테 가장 좋은 선택을 하면 좋겠어. 령 매가 가장 하고 싶은 선택지 말고, 령 매가 가장 안 다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선택지.”
“…그런 게 하아…”
“잘 고민해봐야지, 뭐. 위 오라버니는 어때?”
백리소현이 위일청에게 이야기를 넘기자,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소현과 같은 생각이에요, 령.”
“… 그래요?”
“이번에 혈교주를 잡은 것은 음… 솔직히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아직도 잘 안 믿겨지기도 하고, 검후님의 도움도 컸고, 살막주도 있었고… 다른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 그렇죠. 하지만 이번 건 어디까지나 소소가 납치되어 있으니 그랬던 거잖아요? 소소가 납치되지 않았다면 그냥 내가 혼자서 다 쓸어버렸을…”
“독고 소저 혈교주한테 절기 막혔잖아요오.”
“야잇… 안 막혔거든!”
“… 막히고 엄청 당황하는 거 봤는데요오.”
“…”
“게다가 묵 군사님 말대로 어느 세월에 당문 다 때려잡으려고 그러세요오?”
“아니 그 계속 꾸준히 하다 보면…”
“못 해도 몇 년일 거 같은데요.”
“… 좀 부지런히 다니면…”
“현실적으로 좀 오래 걸리겠죠. 묵 군사님이 말은 좀 삐뚤게 했어도 결국 당문 잡는데 힘을 주겠다는 거 아니에요오?”
“… 그렇지.”
“그럼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해야죠오. 무작정 싫다고만 하지는 마시구요. 이 참에 혼수도 좀 챙기고 그러세요오.”
“엑?”
“실리를 좀 따지세요, 독고 소저. 일단 묵 군사님이랑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자세히 다시 얘기해봐요오.”
“… 그러니깐… 하아…”
독고령은 다시 하나씩 천천히 묵세휘와 나눴던 이야기를 은관영과 백리소현에게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뒤, 백리소현은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은관영은 두 눈을 반짝였다.
“독고 소저.”
“왜?”
“조건이 좀 후하네요?”
“… 뭐?”
“물론 묵 군사님이 독고 소저 신경을 거스르긴 했는데 그렇잖아요. 맹에 이름만 올려도 되고, 딱히 소속되지 않아도 상관없고, 명분도 준다고 하고, 여차하면 맹원도 빌려달라 할 수도 있겠는데요?”
“필요없어. 어차피 나 혼자서 다…”
“아잇, 그러니깐 기왕 잡을거면 사람 많은 게 더 좋죠! 안 그래요?”
“저도 관영의 말에 동의해요, 령. 수가 많으면 그만큼 좋은 거 아닌가요?”
“… 그렇긴 한데…”
“무엇보다 령이 다칠 확률도 낮아질테고요.”
“…”
독고령이 불만스러운듯 입술만 툭 내밀고 아무 말도 안 하자, 위일청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령.”
“… 네, 일청.”
“전에 기억나요? 의녀문에서 잠깐 어디 갔다가 돌아오고 저한테 했던 말이요.”
“… 지금 그 얘기를 왜…”
“같이 죽어줄 수 있어요. 언제든지 기꺼이요. 하지만… 그래도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령은 당문의 복수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제가 중요한가요?”
“엑?!”
“굳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겠다면요?”
“아니… 그… 갑자기 그렇게 물으면…”
“령 매가 중요하니깐, 당문을 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당문이에요, 령. 사천에서 오랜 시간 패자로 군림한 명문가와 대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
“그걸 다 알고도 령과 백년가약을 맺겠노라 한겁니다. 선택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령. 하지만…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면 굳이 포기하진 말자는 거예요.”
“으으…”
“이제 더 이상 령 혼자만의 은원이 아니니깐요.”
위일청까지 나서서 은관영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독고령은 결국 머리를 감쌌다.
당문을 잡고 싶은 건 자신 뿐이었다.
그와 직접적인 은원이 있는 것도 독고령 하나 뿐.
하지만 위일청과 부부가 되겠노라 말한 순간부터… 더 이상 독고령 혼자만의 은원이 아니게 된다.
“… 그렇네요.”
혼자였던 독고진과 달리, 독고령은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묵세휘는 그 틈을 노려 제의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독고령 또한 그에게 화가 났던 것이었다.
그녀가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깐.
“… 묵세휘, 지금 어디 있을까?”
“만나러 가시게요오?”
“어.”
“맹원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문 앞에 한 명 서있던데…”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나으리라.
독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위일청을 바라보았다.
“일청, 나 다녀올게요.”
“같이 갈까요?”
“… 아니요. 둘이서 얘기하고 올게요.”
“령이 그렇다면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위일청이 독고령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 이마를 가렸다.
“애… 애들 보잖아요…”
“크큭, 이젠 익숙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같이 밤을 보내기도 할 텐데요?”
“으으…”
독고령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백리소현과 눈이 마주쳤다.
“령 매, 령 매.”
“… 놀리지 마.”
“아니, 좀 오래 있다 오라고.”
“응?”
“나랑 관영이는 소소 보느라고 오래 밖에 있었잖아. 그러니깐 령 매도 이제 양보해줘야지.”
“아! 맞아요!! 그동안 내내 독고 소저만 독점하고!!”
“아…”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너무 많이는 말고… 나도 이따 하고 싶은데…”
“아까 했잖아요! 위 오빠, 몇 번 했어욧?!”
“… 네 번 했습니다.”
“음란검!! 캬아아아악!! 네 번 하고도 부족하다니요!! 안 남겨두고 다 가져갈 건데욧!”
“령 매…”
백리소현마저 살짝 질린다는 표정을 짓자, 독고령이 툴툴댔다.
“씨이… 알았어. 오늘은 내가 양보할게.”
“후훗, 오래 있다 와~ 아니면 일찍 돌아와서 같이…”
“아… 안 그럴거거든!”
“기대하고 있을게요오~”
“아잇, 음탕한 년들아…!”
“제일 음탕하시면서 뭘. 빨리 갔다와요오! 너무 화내지 마시고욧!”
“… 오냐.”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위일청의 양 옆으로 들러붙는 것을 보며, 독고령은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소저?”
독고령이 밖으로 나가자 은관영이 말한대로, 주변에 서있던 맹원이 그녀에게 말을 걸자 독고령이 물었다.
“… 묵세휘 있는 데가 어디야?”
“전 군사님 말씀이십니까?”
“어.”
“맹주실 아니면 군사님의 방에 있으실 겁니다. 어딘지 가르쳐 드릴까요?”
“안내해주면 더 좋고.”
“예, 따라오시죠.”
그렇게 독고령은 맹원의 뒤를 따라 다시 한 번.
묵세휘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오랜만이군.’
묵세휘가 맹을 떠난 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방은 여전한 풍경이었다.
남궁진이 임시로 군사를 고용했다고 했으나 그는 사실상 장로들의 허수아비에 가까운 위치였고 가진 바 권력도 크게 없었기에 군사실의 풍경을 크게 바꿔놓진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것도 여기 있었군.”
맹을 떠날 때 자신이 놓고 간 다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묵세휘는 피식 웃었다.
돌고돌아 다시 맹에 돌아온 게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며 묵세휘가 하나둘씩 짐을 정리하고 있던 와중,
“군사님, 독고 소저가 뵙기를 청합니다.”
“…”
독고령이 찾아왔다.
“… 안으로 들라하게.”
“예.”
맹원이 문을 열어주자, 독고령이 당당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볼 때마다 참…’
당당한 발걸음은 가히 호걸이라 불리기 충분했고, 그녀의 미모는 강호사절화를 강호오절화로 바꿔둘만한 미모였다.
허나 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도 저렇게 인상을 팍 찌그러뜨리고 있는 게 묵세휘는 조금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게 그녀의 행실이었다.
“왔다. 그래도 군사직이면 좀 높은 거라고 들었는데 에라이… 방이 이게 뭐냐?”
의자를 발로 툭 차서 아무렇게나 걸터앉는 꼬락서니는 누가 봐도 사파의 행실거지였다.
“… 간소한 걸 좋아해서 그렇다네. 쓸모없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하지.”
“말은… 술 없냐? 술 마시고 싶은데.”
“아까 방에 몇 병 시켰다고 보고 받았네만 마시지 않았나?”
“안 마셨어. 이야기 좀 하자. 그래도 좀 멀쩡한 정신으로 얘기하고 싶으니깐 독한 백주 말고, 좀 은은한 걸로 시켜봐.”
“… 그냥 차나…”
“그 흙탕물 또 주면 남궁진이고 뭐고 상관없이 여기 다 아작낼테니 알아서 하고.”
“…”
저게 정녕 정파의 영웅이라 칭송받을 자의 언행이 맞는지 골머리를 썩히며 묵세휘는 밖에 있는 맹원을 불렀다.
“이보게, 게 있는가?”
“예, 군사님.”
“가서 소흥주 좀 내오게.”
“몇 병이나 내올까요?”
“하나…”
“세 병!”
“… 세 병 가져다주게.”
“예.”
맹원이 술을 가지러나가자, 묵세휘는 어떻게든 웃는 낯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독고령과 마주 앉았다.
“… 그래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자 찾아왔는가?”
“무림맹 들어와달라매. 자세한 얘기나 좀 나눠보자 싶어서.”
“들어오려고?”
“보고. 하는 거 봐서.”
“뭘 원하는가?”
“어… 글쎄. 지금 가장 원하는 건…”
독고령이 씨익 웃으며 묵세휘를 노려봤다.
“네 모가지. 달라고 하면 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