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82화 (182/225)

EP.182 18장. 무림맹 - (10)

쾅!

독고령이 거칠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맹원과 위일청이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령, 괜찮습니까?”

“… 안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잠깐만요, 일청. 어이, 너.”

독고령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맹원을 불렀다.

“술 좀 가져다 줘. 안에 있던 새끼가 마셔도 된다네. 제일 독한 걸로.”

“오량주와 분주가 있는데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둘 다.”

“… 방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맹원이 고개를 숙이고 떠나고 둘만 남게 되자 당황한 위일청이 독고령에게 물었다.

“령,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독고령은 분을 삭히지 못 했다.

“그 개같은 새끼가…”

“전 군사가 무언가 했습니까?”

“…맹에 들어오래요.”

“근데 왜 그리 화가 나셨습니까?”

“그냥… 뭔가… 뭔가… 캬아아악!!! 그냥 짜증나요!!”

“…”

독고령은 쉬이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묵세휘의 시건방?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주제 모르고 날뛰는 멍청한 놈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보다 더 짜증나는 일은 묵세휘가 감히 위일청을 들먹거린 사실 때문이었다.

‘시발 새끼, 시발 새끼, 개 같은 새끼, 똥물에 튀겨죽일 새끼, 반드시 대갈통을 아작내고 만다…’

그리고… 그가 말한 일들이 어느 정도 진실에 닿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복수만 생각하며 지킬 것 없던 독고진 시절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독고령은 달랐다.

잃을 게 없는 독고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당문에만 몰두하고 달려나갈 수 있었으나, 독고령은 잃고 싶지 않은 게 많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제 3자의 입을 통해 지적당하자 짜증날 수 밖에.

‘시발 놈이 뭘 안다고 감히…!’

그리고 그 사실을 역으로 이용당해 맹에 들어오라는 되도 않는 말까지 듣자 독고령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 일청.”

“네, 령.”

“맹에서 한 명만 죽이면 안 될까요? 아니, 죽이는 거 까진 아니더라도 사지 중 한 쪽만 자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허락을 구하는 독고령을 보고 위일청은 한숨을 내쉬기보다 그녀를 껴안았다.

“령.”

“…네, 일청.”

위일청의 품에 안기자 방금까지 올라오던 울화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의 품에 안겨, 가슴에 머리를 폭 기대고 독고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해요, 일청. 화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얘기해줄래요?”

위일청의 말을 듣자 독고령이 슬며시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 듣고 싶어요?”

“령의 고민은 내 고민이라고도 생각해서요.”

위일청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닌가요? 저한테 굳이 허락을 구하는 게 왠지 저도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 일청의 이름이 나오긴 했어요.”

“그럼 얘기해주세요, 령.”

위일청이 독고령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웃어보였다.

“전 군사가 령한테 무례를 저질렀으면 내가 앞장서서 맹을 뒤엎을게요.”

“풉… 크큭…”

“왜 웃어요, 령?”

“일청이 그렇게 말하니깐 뭔가 이상해서요.”

“아마 나도 령한테 물들었나 보네요.”

“그러게요…”

독고령이 위일청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의 고개를 잡아 내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일청은 참 신기해요.”

“제가요?”

“네. 방금까지 정말… 무림맹을 통째로 부숴버리고 싶을만큼 화가 났었는데…”

독고령이 활짝 웃어보였다.

“이젠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여전히 술이 필요한가요?”

독고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요.”

“그럼 돌아가서 천천히 이야기해보죠.”

위일청이 손을 내밀자, 독고령은 그의 팔에 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독고령과 헤어진 뒤, 묵세휘는 그녀가 여러 개의 술을 요청했단 이야기를 듣고 남궁진에게 향했다.

“맹주.”

“다녀왔나?”

“얘기 나누고 왔습니다.”

“고생했네. 반응은 어떻든가?”

“화를 내더군요.”

“그 말을 좀 동글동글하게 하면 자네도 참 좋은 사람일텐데 말이야…”

“뭘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하아… 독고 소저나 위공자가 불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만…”

한숨을 푹 내쉬며 남궁진이 다기를 가져왔다.

“뭘로 들겠나?”

“용주차 있습니까?”

“… 그 흙탕물을 용케도 마시는구만.”

“독고 소저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함부로 주지 말라고 했거늘… 그 괴상망측한 판단 방법 좀 그만둘 생각은 없나?”

남궁진은 묵세휘가 용주차를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용주차를 권하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묵세휘가 말하기를 처음 보는 이에게 호불호가 심할 먹거리를 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면 그것만으로 대충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 그래서, 독고령은 어떤 이던가?”

“맹주가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광마에게 얻어맞았음에도 원한은 없다고.”

“… 얻어 맞다니 거 표현을 좀…”

“아무튼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말은 거칠게 하는데 속은 따스한 이더군요.”

“그랬소?”

남궁진이 차를 건네주자 묵세휘가 후릅 마시고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용주차의 매력을 왜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나 말해보시오.”

“행동은 무례한데 그래도 정인이 하는 말은 듣더군요. 맹주의 말이 맞았습니다.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으면서 위 공자의 이름을 꺼내니 바로 버럭하더군요.”

탁.

찻잔을 내려놓고 묵세휘가 웃으며 남궁진을 바라보았다.

“결국 위일청이 중요합니다. 위일청이 입맹하겠다 하면 독고령도 알아서 따라올 것입니다. 아마 반대도 마찬가지일테고요.”

“흐음…”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음에도 남궁진이 깊은 한숨을 내뱉자 묵세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 뭔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래도 광마 어르신의 딸이지 않나? 이렇게 순순히 일이 진행되는 게 뭔가 꺼림칙하구만.”

“원하는 걸 주면 다 듣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제의했기에 그러는가?”

“미래의 안녕과 가족의 행복… 정도요?”

“… 묵 군사.”

“예, 맹주.”

“자네가 사파나 마교에 가지 않아서 참 다행이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렇게 묵세휘는 웃으며 차를 또 한 잔 들이켰다.

독고령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망나니인줄도 모르고.

*

독고령이 위일청과 함께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백리소현과 은관영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잠시 야한 생각도 고개를 들었지만, 독고령은 그보다 우선 자신이 묵세휘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위일청에게 했다.

그의 품 안에서, 아주 온건한 방식으로.

“그러니깐 그 십새끼가 일청을 들먹이면서 반 쯤 협박 비슷하게 하더라고요.”

“… 용케도 화를 참았네요, 령.”

“도중에 멱살 한 번 잡았는데 일청 때문에 참았어요.”

“잘 했어요, 령.”

“헤헤…”

위일청이 머리를 쓰다듬자 독고령이 기분 좋게 웃으며 다리를 까닥거렸다.

“아무튼… 다른건 다 괜찮았는데요…”

“네.”

“그 새끼가… 나중에 나랑 일청이랑 그… 그러니깐…”

독고령이 새빨갛게 뺨을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그… 같이 지내게 되면 있잖아요…”

“네, 령.”

“아… 그으…”

독고령이 부끄러움에 갈라진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애… 애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령이 원한다면 언제든지요.”

“그… 근데 그거까지 들먹이면서 맹에 안 들어오면 은원 때문에 힘들거다, 문제가 생길거다 이러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깐 또 짜증나네…”

“령.”

“… 네.”

“잘 참았어요.”

위일청이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위로했다.

그러자 독고령이 그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 일청이 부탁했으니깐…”

“그래도요. 듣다보니 저도 조금 화가 나는데 령은 어떻게 참았을지 쉬이 상상이 안 가네요.”

“그쵸? 와… 진짜, 일청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그 새끼 모가지를 무림맹 정문에 걸어놨을텐데.”

“풉, 그러면 정말 무림공적이 되는데요, 령?”

“까짓 거 다 오라고 하죠. 검신 영감님이나 검후 할매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크큭.”

위일청이 독고령을 껴안고 잠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그녀의 체온을 즐기다가 입을 열었다.

“령.”

“네, 일청.”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나요?”

“… 군사를 한 대 쥐어패고 싶다?”

“그런거 말고요.”

“그럼요?”

“음… 예를 들어 저는 맹에 들어가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가 령 때문이었어요.”

“나 때문에요?”

“네. 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천축까지 가야하는데 맹에 속하게 되면 발이 묶이니깐요. 또 령과 앞으로도 더 많은 곳을, 천하를 유랑하면서 함께 추억을 쌓고 싶었거든요.”

“…”

“령은 나중에 무얼 할 생각이였나요?”

“나중에요?”

“그러니깐… 앞으로요. 천축에도 가고, 전에 소현과도 약속했다고 했죠?

“네.”

“그 뒤에는요?”

“…”

독고령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고민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위일청은 금세 그녀의 머리색이 조금씩 분홍색으로 바뀌어감을 깨달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더니 잠시 후, 독고령답지 않게 매우 자그마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녀가 무언갈 말했다.

“…를 가지고 싶어요…”

“네?”

“일청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요…”

독고령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아… 안 될까요…?”

“…”

“일청…?”

“령은… 하아… 정말…”

“흐엑?!”

갑자기 위일청이 독고령을 꼭 껴안고 그녀의 정수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자, 독고령이 당황하며 머리를 감쌌다.

“왜… 왜요?!”

“그런 건 제가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령이 가로챘으니깐요.”

“… 네?”

“안 될 리가요, 령. 내가 거절할 줄 알았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

“전에 한 번 말했잖아요. 령이 술에 취해서 찾아온 날 밤에…”

“기…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때의 령도 참 귀여웠는데 말이죠.”

“흐아아…”

“그 뒤에 제가 했던 말도 기억하나요, 령?”

“으으…”

독고령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중얼거렸다.

“… 저도 셋이 좋아요.”

“그럼 됐네요.”

“그… 그래도…”

독고령이 눈을 글썽이며 물었다.

“… 나로 괜찮아요, 일청?”

“무슨 말인가요, 령?”

“애… 애기를 잘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소소 아가씨는 잘 돌봤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령. 령이라면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 그리고 나도 처음인데요, 뭘.”

“아니… 그… 그렇죠.”

“나중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지 말죠, 령. 막상 때가 닥치면 잘 해낼 거예요.”

“으으… 네…”

“그러니깐 지금 말할게요, 령.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요.”

“… 네?”

“먼저 말하겠다고 했는데 다른 건 이미 령이 말해버렸으니 이건 내가 먼저 말해야겠네요.”

“뭐… 뭐를요…?”

자신의 품에 안고 있던 독고령의 등을 돌려 그녀와 마주보고 위일청이 이마를 맞붙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와 여생을 함께 해줄래요, 령?”

“… 네?”

“아내가 되어달라고요.”

독고령의 손을 붙잡고, 위일청이 말했다.

“령과 함께 있으면 항상 행복해요. 령과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어떤 역경도 해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령과 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고 싶어요.”

“아…”

“나와 백년가약을 맺어요, 령.”

독고령은 자신도 알 수 없는 까닭에 눈물이 차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환희의 눈물이였다.

눈물이 방울져 눈가에 맺히자, 독고령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일청.”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