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18장. 무림맹 - (5)
남궁진과 헤어진 뒤, 특실로 향하던 묵세휘는 구겨진 인상을 펼 수 없었다.
‘젠장, 하필 많고 많은 이들 중에 광마의 여식이라니…’
광마의 이름을 듣자 문득 그의 가슴에 남은 오래된 마음의 상처가 떠올랐다.
‘그 자만 아니었다면 맹이 이 꼬라지가 되진 않았을… 하아. 아니군, 내 탓이다.’
묵세휘는 잠시 특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오랜만에 돌아온 무림맹의 건물은 여전했다.
“…”
손을 들어 맹의 기둥을 훑으며 그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처음 묵세휘가 맹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우연히 친분을 얻은 제갈세가의 가주에게 소개받은 남궁진이었다.
초야에 묻혀 그저 이렇게 살다 가리라 생각하던 묵세휘였으나 남궁진과 처음 만난 날부터 더 나은 강호를 꿈꾸며 밤새 이야기를 나눈 뒤, 묵세휘의 지식에 감명 받은 남궁진의 간곡한 청에 따라 그는 결국 맹의 군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가문도, 배경도 없는 묵세휘였으나 제갈세가와 남궁세가가 그를 지원해주며 결국 맹의 군사 자리까지 오른 뒤로는 모든 게 순탄했다.
당가위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
“… 광마에 대해 들어본 적 있소, 군사?”
“모를 리가요. 최근 당문을 지독하게 괴롭힌다죠?”
“알고 있었군. 헌데 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게요?”
“설마 당문의 힘이 부족할까 싶어서요. 그보다 요 근자에 사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군사.”
당가위가 싸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묵세휘를 다그쳤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중에 광마에게 피해를 본 문파가 몇인지 아시오?”
“… 한낱 개인의 무력은 집단의 힘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장로님.”
“그 자는 그걸 가능케 하오. 맹의 병력을 써서 광마를 잡아주시오.”
“굳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군사.”
두 번이나 자신의 말을 끊자, 묵세휘도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당문이 피해를 얼마나 입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백도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입니까?”
“당연히 백도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요. 그런 이름 높은 마두가 명문세가와 대문파의 위상을 깎는다면 이는 곧 민초들의 불안으로 이어지겠지. 군사란 자가 이런 것도 짐작 못 한단 말이오?”
“어디까지나 세가와 문파의 위상만 깎이겠지요. 광마란 자가 아직 무림공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한 번도 양민을 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광증이 있는 자가 양민을 해치지 않으리란 믿음만큼 헛된 것도 없어 보이는군.”
“…”
당가위의 말을 들은 묵세휘는 더 이상 그의 청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사파의 준동을 막는 것도 바쁜 시기에 하필…’
결국 묵세휘는 당가위에게 약속했다.
“… 조만간 토벌대를 편성해 보내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이다.”
멀어지는 당가위의 등을 노려보며 묵세휘는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젠장. 그깟 마두 하나가 뭐라고.”
이 때까지만해도 묵세휘는 몰랐다.
이것이 광마와 그의 길고 긴 악연의 시작이 될 줄은.
“… 군사님.”
“무슨 일입니까?”
“… 청룡단과 현무단이 돌아왔습니다.”
“광마는 생포해왔습니까?”
“… 그게 말입니다…”
“음?”
말을 하길 꺼려하는 맹원을 보는 순간 묵세휘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 이게 무슨…”
“… 죄송합니다, 군사님. 패배했습니다.”
“두 개 단을 이끌고도 패배했다고요?”
“… 예.”
묵세휘가 정보를 취합한 결과 광마는 아무리 강해봤자 도왕 정도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살짝 과하다 여겨질 정도의 병력을 보내 한 번에 일을 처리하고 당가위의 툴툴거림을 더 이상 안 듣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나타난 결과는 정 반대였다.
“아니… 도대체 왜 패배한 겁니까?”
“… 그가 너무 강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전투가 시작하고, 미리 연습해둔대로 검진을 이뤄 그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는요?”
“… 하나씩 공략당했습니다. 진을 이루는 무인을 하나 사로잡아 자신의 품에 껴안고는 인질로 삼자 망설이던 무인이 하나씩 그의 도에 나가떨어졌습니다. 어느새 진법을 유지할 이들이 줄어들자 그 후엔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요.”
“허어…”
묵세휘가 가진 지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맹에 속한 맹원들이 누구나 익히는 구궁음양진은 그 깊이가 오묘하여 개인이 쉬이 당해낼 수 없는 진법이다.
하물며 각 단을 이끄는 단주들 또한 검왕, 권왕이라 불리던 이들이다.
그런데도 패배하다니…
“일단 몸을 돌보세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다시 전략을 짜보겠습니다.”
“… 예.”
그 날부로 묵세휘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는 당가위가 아닌 광마 독고진이었다.
묵세휘의 무공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림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무인들은 대부분 단기결전에 특화되어 있고, 장기전으로 가면 약해진다.
일 대 일의 싸움에 익숙해져있지, 다 대 다의 싸움엔 익숙하지 못 하다.
그렇기에 다 대 일의 싸움을, 아주 수준 높은 진법을 구현해낼 수 만 있다면 진을 이루는 무인들보다 몇 수 위의 적도 제압할 수 있다.
그것이 묵세휘가 가진 확고한 신념이었고, 그 신념을 독고진은 매번 철저히 부숴놓았다.
패배가 늘어날수록, 맹 내부에서 묵세휘의 기량에 대한 의구심이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하나둘씩 군사로서 가진 그의 권한이 장로들에게 넘어갔다.
결국 맹에서 고립된 묵세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가 되었고, 남궁진은 그를 지키기 위해 잠시 묵세휘를 맹의 밖으로 내보냈다.
*
꾸욱.
‘나이를 먹었는지 쓸모없는 옛 추억이 떠오르는군.’
이제는 다 과거의 일이라 생각하며 묵세휘는 묵은 앙금을 털어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제 맹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남은 여생을 제갈세가의 식객으로 지내지 않겠냐는 청을 받아 고민하고 있던 와중, 오랜만에 남궁진의 요청으로 다시 맹에 돌아왔다.
그런데 또 광마가 얽혀있는 일이라니.
‘우스운 일이군.’
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묵세휘가 다시 특실로 향해 걸어갔다.
조금씩 시야 멀리 특실이 눈에 들어오자,
“하으윽… 일처엉…!”
“…”
여인의 교성이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려퍼졌다.
‘… 환청인가?’
문득 묵세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훤히 떠있었다.
설마 이런 대낮부터 맹에서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정신나간 맹원이…
“흐읏! 하윽…!”
“아니, 이 무슨…”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들리는 여인의 교태섞인 목소리에 묵세휘는 소리의 발원지를 쳐다보았다.
“설마…”
특실이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분명 특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묵세휘가 한 걸음씩 특실에 가까워질수록 신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 사이사이로 물기 섞인 음탕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일처엉… 빨리 안 하며언…”
“네, 령… 금방… 크윽…!”
퍽! 퍽!
특실에 가까워질수록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리자 묵세휘는 넋이 나갔다.
일청, 령.
분명 광마의 여식이라 불리는 독고령과 그 정인이라고 말했던 위일청이리라.
“말세로다… 말세야…”
두 남녀의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묵세휘는 눈치 없는 이는 아니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다시 알현실로 돌아간 묵세휘는 맹주를 찾았다.
“맹주!! 맹주!!”
“… 무슨 일이오?”
“특실에 찾아가니 밖에서도 운우지락을 나누는 소리가 울려퍼지더이다! 어찌나 음탕한지…”
자신이 들은 바를 남궁진에게 그대로 털어놓자, 그는 곤란한 듯 묵세휘에게 답했다.
“그 독고 소저 말이오… 별호가… 음란검이오.”
“아니… 그… 허어…”
묵세휘가 당황한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니, 어떻게 사람의 별호가 음란검일 수가…”
“… 나도 참 신기하오.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붙는 별호란 게 으레 멋드러지거나 무공의 특성이 잘 묻어나오거늘 이상하게 독고 소저는 그… 으음…”
“젠장. 이래서 광마 놈과 엮이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세휘…”
“거 이름으로도 그만 부르십쇼. 그냥 빈객이라 부르십쇼.”
“…”
끝까지 무림맹과는 거리를 두려는 묵세휘를 보며 남궁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 그래서 돌아오신거요?”
“젠장. 들어가봤자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 하긴.”
“돌아버리겠군요. 아니… 허어… 이 무슨.”
연신 열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묵세휘를 보며 남궁진이 차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 위일청 말이오.”
“이제야 생각나는군요. 위씨 세가에서 색마가 하나 나왔다더니 하필 광마의 여식과 붙어 먹었습니까?”
“… 그건 뭐 젊은 놈들이 시기하며 붙인 멸칭이지 않소. 나름 협객의 풍모가 있다고 들었…”
“광마와 색마라니. 최악의 조합입니다. 저 둘을 맹에 들여야 할 정도로 맹이 망한 겁니까? 이 곳이 맹인지, 사마련인지 알 수가 없군요.”
“… 너무 다그치지 마시오. 위 공자는 검후님의 제자기도 하오.”
“검후님이요? 그 검후님 맞습니까?”
“천하에 검후라 불리는 분이 둘이나 있소?”
“젠장.”
묵세휘는 믿을 수 없다는듯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제가 맹을 나간 사이 도대체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마교가 또 쳐들어오기라도…”
“세휘.”
“하아… 알았습니다, 그만 말하죠.”
“그 열이 뻗치면 입을 좀…”
“알고 있습니다, 맹주님도 알지 않습니까? 저 원래 이렇게 말하는거. 제기랄… 상황이 상황이니 좀 툴툴대도 이해해주십쇼.”
“… 알겠소.”
묵세휘는 머리를 쥐어뜯으려다 꾹 참고 남궁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 정말 저 둘이 필요합니까?”
“그렇소. 아무튼 믿을 이가 그대 밖에 없으니 맹에 있는 동안 많이 도와주시오.”
“젠장…”
“쓰읍… 그 말을 좀…”
“시발시발 거리진 않았잖습니까?”
“어허…”
“알았습니다. 그만하죠. 떠날 때는 말이나 하고 떠나겠습니다.”
“… 잘 부탁하오.”
묵세휘가 고개를 까닥거리곤 밖으로 나섰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남궁진은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마 어르신, 거 적당히 적을 만들지 그러셨소…’
하필 독고령이 광마의 여식이고, 묵세휘가 광마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결과가 겹쳐 남궁진은 괜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별 일은 없겠지.’
하지만 남궁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미 독고령을 통해 위일청을 맹으로 들이는 일은 거절당한 상태였다.
다시 이야기를 꺼내봤자 그 아비에게 물려받은 듯한 포악한 성정이 고개를 들어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리라.
그렇다고 다른 이를 보내자니 믿을 이가 없었다.
오랜 벗이자, 지음인 묵세휘 외엔.
‘잘 부탁하오, 세휘. 믿을건 그대 밖에…’
쾅!
그 때, 밖으로 나갔던 묵세휘가 문을 박차고 다시 들어왔다.
“무… 무슨…”
“시발, 못 해먹겠습니다! 역시 색마에 음란검이네요!!”
“아니, 또 왜…”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
“남들 다 있는 곳에서 도대체 무슨… 허어…”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는 묵세휘를 보며 남궁진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위 공자, 적당히 좀 하지 그랬소…’
과연 색마.
괜히 붙은 이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