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 18장. 무림맹 - (4)
알현실을 나온 독고령은 막상 상황이 진정되자 다시 짜증이 솟아올랐다.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장로들의 면면을 떠올리자 조금씩 진정되었던 화가 끓어올랐다.
‘십새끼들 대가리 다 한 대씩 후려쳐야 했는데!’
당정한테 빌붙어서 자신을 몰아세울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꼬라지가 보기 역겨웠다.
남궁소소와 위일청이 옆에 없었더라면 진즉에 피바다를 만들었을텐데…
“나쁜 생각하고 있죠, 령?”
“흐엑?! 아... 아닌데요?”
“딱 사고치기 직전의 표정입니다.”
“맞아맞아.”
“하아… 독고 소저는 화를 좀 줄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오.”
“아니… 내가 뭘…!”
“령.”
위일청이 손을 들어올리자, 독고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 애 보는 앞에서 하지 마요.”
“잊어버렸나 봅니다, 령. 더한 것도…”
“마… 말하지 마요! 안 할게요! 화 안 낼게요!”
“… 약속입니다?”
“…”
독고령이 침묵했다.
위일청의 ‘약속’은 확실한 약속임을 알고 있기에 독고령은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령, 대답 안 할 건가요?”
“… 아니, 근데 장로 새끼들이 잘못한…”
“각방 쓸까요?”
“엑?”
듣도보도 못한 협박을 듣자 독고령은 당황했다.
“각방이라니요…?”
“령이 약속하지 않는다면 오늘부터 같이 안 잘 거예요.”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죠. 령이 대답하지 않았으니 오늘부턴…”
“아… 알았어요! 화 안 낼게요! 약속할게요!”
“약속한 겁니다, 령? 적어도 맹에 있는 동안 더 이상 화는 안 내는 겁니다.”
“…”
“역시 방을 따로…”
“… 눼.”
결국 독고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위일청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붙잡곤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착하네요, 령.”
“다…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이제 와서 부끄러워할 게 뭐 있습니까, 령.”
“그치만…”
독고령이 얼굴을 붉히고 백리소현과 은관영을 쳐다보자, 그 둘은 이미 독고령을 놀릴 준비가 끝난 듯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남궁소소가 웃으며 말했다.
“아! 언니 머리 색이 또 바뀌었어요.”
“… 조용해, 소소야.”
“왜요?”
“아무튼… 조용하라고…”
남들 앞에선 한없이 사나운 야생마일지 몰랐으나 적어도 위일청의 옆에 있을 때면 독고령은 한없이 순한 양이었다.
*
장로들이 모두 떠난 알현실 안에 두 남녀가 차를 들이켰다.
“… 맛이 좋구나.”
“다행입니다.”
“그래서… 예까지 본녀를 따로 부른 이유가 무엇이더냐?”
검후가 자신을 부른 남성, 검선 남궁진을 쳐다보며 묻자 그 또한 찻잔을 내려놓았다.
“… 검후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불렀습니다.”
“맹주직을 떠넘길 생각이라면 거절하겠노라.”
“…”
남궁진이 입을 벌리고 우뚝 멈춰서자, 그 모습을 보고 검후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허어… 정녕 본녀에게 맹주직을 맡아달라 부탁할 셈이었더냐?”
“… 검후님이라면 맹주 자리에 오르셔도 아무 말도 안 나올 것이고 이번 사태로 인해 벌어질 다른 문파의 불만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너 또한 죄를 면피하려들 셈이더냐?”
“면피가 아니라 책임을 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소인의 생각이로다.”
검후가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남궁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진아야. 아둔하고 올곧은 아이야.”
“욕을 하시는지 칭찬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칭찬이니라. 아둔함은 노력으로 고칠 수 있으나 올곧은 성품만은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
“네가 맹주 자리를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더냐?”
검후의 질문에 남궁진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 맹을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치기(稚氣)였죠.”
“헌데 나이를 먹었다고 치기가 없어졌더냐?”
“저도 이제 자식이 있으니깐요.”
“치기가 어찌하여 나쁜 것이더냐?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올곧게 세상을 보는 법이니라. 그렇다면 어린 기운(稚氣)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겠지.”
“하지만 이미 크게 실패하였습니다.”
“실패 한 번으로 포기할 것이라면 네 놈은 배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노라. 네 어미가 너를 낳을 때 머리가 뒤집혀서 발부터 나온 역위라 전전긍긍하던 게 떠오르는구나. 그 때 주희가 포기했더라면 너는 여기 없겠구나.”
자신의 딸인 남궁소소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외형으로 이제는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자, 남궁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 그럼 제가 어찌 해야합니까?”
“감내하거라. 그리고 잘못을 바로 잡거라. 나이도 먹은 놈이 자신이 벌여놓은 난장판을 다른 이에게 넘기겠단 꼴이 사내대장부로서 할 짓은 아닌 듯 하구나.”
“하아… 사람들이 납득할까요?”
“그건 네가 해결할 일이지.”
“…”
엄한 말로 자신을 꾸짖는 검후를 보며 남궁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 멍청한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멍청한 줄 알면 고치도록 노력하거라. 원청이 그 놈이 지금 네 꼴을 봤다면 볼기짝을 후려쳤을게야.”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 가서 볼기짝이라도 맞고 싶군요.”
“…?”
검후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궁진이 웃어넘겼다.
“그냥 옛 일입니다.”
“실없기는… 본녀는 이만 가보마. 정 도움이 필요하거든 늙은 본녀를 괴롭힐 생각말고 위일청과 독고령이나 잘 꼬셔보거라.”
“벌써 가십니까?”
“같이 데리고 온 제자가 광증이 있어서 누군가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하노라. 남에게 맡길 일이 못 되니 어쩔 수 없지.”
“아…”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현실을 나서기 직전, 잠시 남궁진을 돌아보았다.
“본녀가 마지막으로 도움을 하나 주도록 하마.”
“듣겠습니다.”
“장수를 공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더냐?”
“… 먼저 말부터 쏴야하죠.”
“잘 알고 있구나. 그대로 행하거라.”
“… 예?”
남궁진이 이해를 못한듯 멍한 표정을 짓자, 검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위일청과 독고령 말이니라.”
“아… 그럼 먼저 독고 소저의 환심부터 사서…”
“아니. 일청이를 돌보거라.”
“네?”
“령 아가 겉으로 보이는 그 성정이 포악하지만, 일청이 앞에선 한없이 순하더구나. 결국 일청이가 가자고 하면, 령 아도 그 길을 따를게야.”
“… 그렇군요. 저는 영락없이 독고 소저가 일행의 중심에 서있는 줄 알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령 아가 우두머리처럼 보이겠지. 허나 그 중심에 있는 자는 일청이니라. 일청이가 무엇을 원할 지 잘 생각해서 얘기해보거라.”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궁진이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려들자, 검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본녀도 감사 인사는 슬슬 질리는구나. 나중에 원청이 통해서 문파에 시주 좀 넣어달라고 해다오. 그리고 귀찮은 일에 괜히 부르지 좀 말라고 하고.”
“예.”
검후가 밖으로 나서자 그 뒷모습을 보며 남궁진이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 군사를 불러오게.”
“예, 맹주님.”
위일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림맹 제일의 지략가를 불러들였다.
무림맹에는 군사라는 직위가 있다.
맹의 내부 관리부터 조직 개편, 작전의 수립, 맹주의 말 벗까지 맹의 내조를 총 책임지는 위치이자 사실상 맹의 살림꾼 역할을 하는 자리.
하지만 그렇기에 최소한의 권력만 가진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가 군사직이었다.
군사의 역할이 너무나 다양했기에 이를 두려워했던 장로들이 계속하여 군사의 권력을 축소시켜 지금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군사라는 이름이 가진 명예는 드높았다.
대대로 사마세가나 제갈세가가 이 군사직을 차지하여 장로들과 함께 구파일방의 권위를 확고하게 만들곤 했지만, 이번대의 군사는 달랐다.
묵세휘.
초야에 파묻혀 있던 그를 맹의 군사직에 추천한 이는 바로 전대 무림맹의 군사이자, 현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묵세휘의 지혜에 비하면 나의 지혜는 한 없이 미천하여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다.’ 라는 말 한 마디로 그는 하루 아침만에 무림맹의 군사직에 올라섰다.
그런 걸출한 인물이였음에도 체제상 장로보다 낮은 지위와 세가의 배경이 없었기에 결국 맹에서 고립되어 뒷방에 밀려나고 지금은 가진 바 권한이 아무 것도 없는 그였으나 맹을 다시 세우기로 마음 먹은 지금 이 시기.
묵세휘 이상의 아군이 남궁진에겐 없었다.
하지만…
“재야에 풀어두고는 이제와서 저를 다시 찾으시는군요, 맹주.”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묵세휘의 가시돋힌 말을 듣고도 남궁진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맹이 엉망진창으로 치닫는 와중에 남궁진은 결국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이 묵세휘를 잠시 다른 곳으로 보냈었다.
“… 이제와서 다시 부르게 된 것은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당가위는 죽었고, 장로들도 모두 파면한 지금 이 시기야 말로 개혁의 때라 생각하여 염치없이 다시 그대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리 모셨소.”
“하아… 제갈가주와 위기(圍棋)나 즐기면 행복했을텐데 다시 고생길에 올라야합니까?”
“부탁하오. 그대 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소.”
“…”
묵세휘가 묵묵히 고개를 숙인 남궁진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검게 물든 머리였으나 어느새 그 사이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몇몇 보이자 결국 묵세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뭘 하려고 하십니까?”
“맹에 젊은 피를 들이고 싶소.”
“대문파가 재능있는 자는 꼭 잡고 있을텐데 무슨 수로 빼오시려고 그러십니까? 게다가 예까지 저를 불러서는 고작 인재영입이라니 원…”
“대문파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차기 천하제일인의 후보가 지금 맹에 있소.”
“누굽니까?”
“독고령.”
독고령의 이름을 듣자, 묵세휘가 인상을 구겼다.
“독고 씨라면…”
“맞소. 광마의 여식.”
“… 광마의 여식이 그 정도로 강합니까?”
“그대가 광마 어르신을 그리 안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소. 허나 꼭 맹에 붙잡아야할 인재요.”
“얼마나 강한지 얘기해주십쇼. 그래야 은원이라도 접어두지 않겠습니까?”
“… 혈교주를 죽였소.”
“…”
혈교주를 잡았다는 얘기를 듣자, 묵세휘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하… 말세군요. 그런 포악한 자의 여식이 강하기까지 하다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을 떨 꼬락서니가 벌써부터 눈에 선하…”
“군사.”
“저 아직 군사직 새로 안 받았습니다. 그냥 객으로 온 겁니다.”
“세휘, 부탁하오. 어떻게든 독고령을 맹에 붙잡아두고 싶소.”
“… 젠장.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이젠 군사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세휘라고 불러야지.”
“하아…”
오랜만에 남궁진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문득 옛날의 추억이 떠오르자 정에 흔들린 묵세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령,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말 감사하오!”
“… 광마의 여식이라고 하니 성격도 괴팍하겠군. 실패할 수도 있으니 벌써부터 기대하진 마시죠.”
“일단 그녀에게 정인이 있으니 그 정인인 위일청부터…”
“됐습니다. 일단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하죠. 특실입니까?”
“그렇소이다.”
“… 갔다와서 다시 얘기하죠.”
묵묵히 떠나는 묵세휘를 보며 남궁진은 환희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당가위가 맹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묵세휘의 지혜가 마교에 의해 고통받던 무림의 판도를 확연히 바꿔두었다.
그 뿐인가? 관아의 개입마저 막아내며 관무불침의 가치까지 성립시킨 희대의 수완가기도 했다.
그런 그가 나섰으니 독고령은 물론이고 위일청까지 맹에 들어올 게 분명하다 믿으며 남궁진은 기대하며 묵세휘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맹주!! 맹주!!!”
“… 벌써 왔소? 생각보다 빠르…”
“젠장! 역시 광마의 여식이 맞지 않습니까?!”
그가 얼굴을 붉히며 돌아오자 남궁진이 당황하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오?”
“제기랄. 역시 그 아비의 그 딸이군. 딸 년은 천박하기까지 합니다!”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보시오. 내가 도통 이해가 안 가는군.”
“아니… 그… 허어…”
묵세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 하고 남궁진에게 털어놓았다.
“… 특실에 찾아가니 밖에서도 운우지락을 나누는 소리가 울려퍼지더이다. 어찌나 음탕한지 원…”
“아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남궁진은 창 밖을 쳐다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훤한 대낮이었다.
이런 시간대에도, 그것도 처음 방문한 맹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니…
“커흠커흠… 그…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선남선녀가 한 방에 있으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 법…”
“정신차리세요, 맹주.”
“…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소이다.”
“뭡니까?”
“독고 소저 말이오… 그…”
남궁진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 별호가… 음란검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