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5 18장. 무림맹 - (3)
“아잇, 시발.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이라도 했냐?!”
독고령의 짜증 섞인 욕지거리가 튀어나오자, 장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령, 아무리 그래도 무림의 선배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잇, 진짜! 맹주!! … 님.”
“… 말하시오, 독고 소저.”
“연회를 준비했다매요?”
“맞소.”
“술이랑 고기는 어따 팔아먹고 무슨 늙은 장로들이 튀어나와서 영웅이 어쩌구저쩌구 그러고 있어요?”
“… 그냥 어디까지나 감사를 표하는…”
“가~암~사?”
독고령의 눈썹이 휘어지며 그녀의 입가에 이죽거리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난 진짜 아무 상관없이 그냥 당문이랑 빌붙었으니깐 혈교주 조진 거 뿐이고! 감사고 뭐고 원하는 것도 없으니깐 그냥 술만 적당히 독한 걸로 주면 끝이에요. 그리고 감사는 무슨…”
“… 거 젊은 처자가 말이 너무 심한…”
“닥쳐.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독고령이 갑작스레 흉흉한 기세를 내뿜자, 장로들을 볼을 푸들거리며 분노했다.
하지만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어찌 저리 어린 나이에 이만한 내공을…!’
‘괴물이로다…! 정녕 괴물이로다…!’
독고령의 내공이 유형화되어 그녀의 주변에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빠지직.
이윽고 알현실의 이곳저곳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독고령은 조심스레 남궁소소의 귀를 틀어막고 입을 열었다.
“야 이 벌레 같은 새끼들아. 어디까지나 감사를 표하는? 지랄하고 있다.”
“…”
“감사가 아니라 원한을 품어야하는 거 아니야? 니들 시발 당가위랑 붙어먹지 않았나?”
“아니… 그으… 우리도 나름의 노력을…”
“내가 어린애가 있어서 참는 중인데 얘 눈을 가리는 순간 네 혀를 날려버릴거야. 다음에는 신중히 생각하고 짖어.”
“…”
그러자 입을 연 장로가 두 입술을 꼭 오므렸다.
“지랄하지 마, 새끼들아. 내가 너희한테 감사를 받을 입장도 아니고 이제 와서 친한 척 해봐야 존나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신나서 추살령 선포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지랄이야?”
“… 장로들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
“맹주. 고개 숙이지 마.”
남궁진이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독고령이 남궁소소의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장로들도 혹여나 어디 한 곳이 잘릴까 싶어 다들 입을 오므리거나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곤 했다.
독고령이 남궁진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네가 고개를 숙이지 마. 나는 네 딸을 납치하는데 협조한 이 새끼들을 대신해 네가 고개를 숙이는 게 존나 이해가 안 가거든? 그러니깐 하지 마. 소소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허나…”
“나는 되묻는 게 존나 싫어. 내가 똑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도 존나 싫고. 대가리 숙이지 마라.”
문득 남궁진은 독고령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후려치던 독고진이 생각났다.
“혹시…”
남궁진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스스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묻지 않고서는 못 참을 것만 같아서 입을 여는 순간,
“령 아의 말이 맞노라.”
검후가 앞으로 나섰다.
“사람이 늙으면 지혜로워진다고 하나 다들 그런 것은 아니지. 오히려 추해지는 자도 많거늘 너희들의 꼬락서니가 그러하다.”
“… 검후님.”
“부끄러움을 안다면 더 이상 입을 열지 말거라. 본녀의 얼굴이 다 달아오르니.”
검후가 꾸짖기 시작하자, 독고령은 슬며시 내공을 거둬들였다.
“너희들이 누구더냐? 장로다. 나이가 많고, 연로했기에 남들보다 더 지혜롭고 세상을 사는 이치를 깨우치고 있으리라 여기며 너희들이 젊었을 적에 비해 쇠퇴했다고 한들 존중해주는 자리가 바로 장로직이니라.”
검후가 장로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헌데 이게 무슨 꼬락서리더냐? 본녀가 아무리 정치에 어둡다한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짓거리가 눈에 훤히 보이더구나. 령이 저 아이를 칭송하여 그 공을 뺏으려고 했더냐? 아니면 너희들이 시킨 일을 행했다고 거짓이라도 말하려 할 셈이었더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저 아이를 보는 즉시 무릎을 꿇고 오체를 투지하여 사과하지 못 할 망정 빳빳이 고개를 세우고 이 아이를 맞이해?!”
검후가 일갈하자, 장로들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제 검후의 시선은 옆에 서있던 남궁진에게 향했다.
“너 또한 마찬가지니라.”
“… 듣겠습니다.”
“처음에 네 놈이 찾아와서 감사를 표할 때까지만 해도 그럴만하다 느꼈노라. 자식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무림의 공적을 처치했으니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포상을 논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 허나 이건 무엇이더냐?”
“… 송구합니다.”
“한 번 장로들의 간계에 당해서 곤혹을 치렀으면 두 번은 없었어야지!!”
검후의 심후한 내공이 담긴 사자후가 알현실에 울려퍼지자 몇몇 장로들은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조금 놀랬다.
‘… 좋은 말만 할줄 아는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뭐라고 할 때는 또 하시네.’
괜히 같이 온 남궁소소가 겁을 먹은 듯 몸을 오들오들 떨자 독고령이 그녀를 안아들어 토닥여줬다.
“… 괜찮아, 소소야.”
“하지만 아빠가 혼나는데…”
“아니야. 혼나는 거 아니야.”
“… 그럼요?”
“나아지는 중이지.”
독고령이 옆에 서있던 백리소현을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가와 남궁소소의 귀를 슬며시 막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로들은 고개를 들어 보라. 저 아이가 당가위가 납치하여 협박한 아이니라.”
“…”
“네놈들이 술과 약에 빠져 저지른 일이니라. 살아돌아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 아이가 어디 한 곳 성하지 못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맹주가 무얼 하기도 전에 본녀가 직접 야차가 되어 네놈들을 심판했을게야.”
그제서야 장로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 어찌해야 용서를 청할 수 있습니까?”
“이미 한 번 말했지 않았더냐?”
“… 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게 가장 우선이니라. 네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면피할 생각에 급급하구나.”
검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더는 본녀를, 그리고 너희들의 사문이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거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생길 것만 같아 더는 못 있겠구나. 먼저 나가보마.”
검후가 알현실의 밖으로 나서며 문득 독고령을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너무 다그치지 말거라.]
[…새끼들이 열 받게 하잖아요.]
[그러다 정체를 들키면 잘도 감당하겠구나. 그래도 강호에 배분이 있으니 적당히 욕하고 봐주거라. 행동이 어리석을지언정, 천성이 나쁜 아이들은 아니니라.]
[… 눼.]
탁.
검후가 밖으로 나서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남궁진이었다.
“… 아무래도 본 모가 생각보다 멍청했구려.”
“아잇, 또 뭘…”
“밖에 누구 없느냐?!”
“예, 맹주님.”
남궁진이 소리치자 문이 열리고 맹원 중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맹주님?”
“손님들을 모시고 좋은 방을 내드리게. 음식도 연회장 말고, 객실로 보내주고.”
“예.”
“독고 소저, 잠시 소소를 돌봐주실 수 있겠소?”
“뭐하게… 요?”
“일단 내부 정리부터 하고 감사를 표하는 게 순서인 듯 하오. 아직 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본 모가 순서를 그르쳤소.”
“… 얼마나요?”
“오늘 내로 끝내리다.”
“…”
독고령은 고개를 들어 동의를 구하듯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독고령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요. 대신 방에 좋은 술을…”
“안 됩니다, 령.”
“안 돼, 령 매.”
“안 돼요오, 독고 소저.”
“…”
갑작스레 터져나온 반대 의견에 독고령은 멋쩍은 듯 웃었다.
“… 그럼 나중에 다시…”
“예. 먼저 들어가 계시오.”
“이따 다시 뵙죠, 맹주님.”
하나둘씩 독고령과 위일청의 일행이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알현실의 내부에 장로들과 남궁진만 남자,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탁상에 검을 올려두고 검집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고만 있었다.
탁.
탁.
탁.
검집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고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장로들의 등은 축축이 젖어들었다.
이윽고…
“우리가 잘못했소, 맹주!”
그 침묵을 견뎌내지 못 하고 장로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숙였다.
“… 여전히 ‘우리’라고 칭하는구려.”
“헙…”
“한 때는 장로님들과 다시 잘해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소. 그래도 다들 대문파의 장로거나 일대제자였던 분들이니 내 멋대로 일을 벌였다가 화합을 깨지 않을까 걱정도 했소. 허나…”
탁.
남궁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더는 안 되겠군.”
“…”
“이게 본 모가 맹주로서 해야할 마지막 일인 듯 하오.”
남궁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장로들에게 말했다.
“현 시간부로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을 무림맹의 장로직에서 해임하려고 하오. 해임 사유는 각 문파에 통보될 것이며 앞으로 무림맹의 장로직을 어찌할 지에 대해 장문인들과 논의해봐야겠소.”
“맹주…!”
“그대들이 자초한 일이니 그냥 받아들이시오. 불만이 있다면…”
남궁진이 손가락으로 검의 콧등을 툭 밀어내 검날을 드러냈다.
“검으로 말하는 것 외에는 듣지 않겠소.”
“허어…”
장로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질끈 감았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여 탁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남궁진 또한 눈을 감았다.
‘… 다시 엉덩이라도 맞고 싶군.’
썩어빠진 무림맹을 바꾸기 위해 무림맹주가 되겠노라 광마에게 밝혔다가 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누군가는 그를 치욕으로 여길 지도 모르지만, 남궁진은 지금이라면 자청해서라도 두들겨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뿌리는 새로운 싹을 틔워내기엔 무리였다.
‘본가로 돌아가 이젠 무얼 해야하나 고민해야겠군.’
그렇게 남궁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알현실을 나섰다.